새로운 ‘가장의 자리’로 돌아가자

아버지가 귀가하시면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으로 달려나가 마중을 했다. 아버지가 출근하시면 우리는 대문까지 따라나가 배웅을 했다. 아버지는 식사 때마다 독상을 받으셨고 나머지 식구들은 다른 식탁에 모여 함께 식사를 했다. 장남인 나도 대학생이 된 후에야 아버지와 겸상을 할 수 있었다. 집안의 대소사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결정을 하면 가족들은 그 결정을 존중하고 따랐다.아버지는 함부로 크게 웃지도,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희로애락 표현도 자제했다. 그런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시던 순간이 있었다. 오랜 은행원 생활 끝에 지점장 발령을 받았을 때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셨다. 하나뿐인 딸이 결혼해 사위가 생겼을 때도 아버지는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다.아버지는 항상 일찍 일어나 정원을 손질하고 채소를 가꾸셨다. 좋아서 하실 뿐, 남에게 시키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는 큰돈을 내놓으셨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푼이라도 아끼셨다. 아버지는 항상 가족이 우선이었고, 자신은 그 다음이었다.아버지는 가부장이었다. 군림하는 가부장이 아니라 자기희생적인 가부장이었다. 지시하는 가부장이 아니라 솔선수범하는 가부장이었다. 말이 앞서는 가부장이 아니라 행동이 앞서는 가부장이었다.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소득원이었다. 한때 결혼한 세 아들의 학비와 생활비까지 책임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권위가 있었다. 경제력이 있고 도덕적으로도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에 권위가 있었다.어느새 나도 결혼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가 귀가해도 하던 일을 멈추지도, 현관으로 달려나오지도 않는다. 출근해도 배웅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소파에 앉아서 손을 흔들어 보이는 정도다.이제 집안의 조그마한 일도 아내와 상의해야 한다. 혼자서 결정했다가는 ‘난리’가 난다. 과거와 같은 가장으로서의 권위도 없다. 집안의 유일한 소득원인데도 그렇다. 소위 민주화가 된 것이다.남편·아내 ‘의식격차’ 줄여야최근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주부양자로 간주된다. 아버지들이 짊어지고 있는 가장 무거운 짐은 가족부양이라는 짐이다. 우리는 극심한 경쟁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직업 활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에서 대다수의 아버지들은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출근할 곳이 있고 수입이 괜찮은 아버지들은 그나마 다행이다. 사업에 실패한 경우나 현재 실직 상태에 있는 아버지들은 문제가 더 심각하다.실업의 결과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가정과 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규정하는 역할을 상실한 남성은 방향감각을 잃고 좌절하며 다양한 병리현상을 보인다. 실직한 남성이 직장이 있는 남성보다 자살할 확률이 19배가 더 높다는 보고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본다면 역시 부양자 역할이 아버지로서는 가장 어렵다.아버지들이 직면하는 또 다른 어려움은 변화된 부부관계에 적응하는 문제다. 전통사회에서의 부부관계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통제와 억압이 특징이었다. 현대사회로 이행하면서 부부관계는 반항과 투쟁이 그 특징이 된다.특히 196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여성해방운동을 통해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반항과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한 여성의 의식수준 향상과 여성의 사회진출이 증가하면서 시작된 점도 있다.현대 한국가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측면은 남편과 부인의 의식 격차다. 남편들은 여전히 가부장적 가족의식을 갖고 있는 데 비해 부인들은 성 평등적 가족의식을 받아들이고 있다. 남녀간 의식 격차가 부부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여성의 의식변화는 분명한 자기주장으로 나타난다. 부인의 자기주장이 분명하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자주 일어난다. 아직도 가부장적 의식이 남아 있는 남편들로서는 당혹감을 느낀다. 옛날처럼 아내가 참고 져주면 문제가 안될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오늘날 한국가정에서 부부관계는 더 이상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아니다. 아직도 집안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남편의 의사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부인의 권한이 크게 강화됐다.최근 서울과 수도권의 중산층 가정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설문조사 결과 가정의 금전관리를 ‘전적으로’ 또는 ‘주로’ 부인이 한다는 가정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이뿐만 아니라 자녀의 교육비 결정도 주로 어머니 자신이 하고 있었으며, 수험생 자녀의 과외나 학원수강 문제도 부인이 결정한다는 가정이 많았다. 남편이 결정한다는 가정보다 4배나 높은 수치였다.언제부터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정교육이 사라졌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밥상머리’ 교육이 없어졌다고 한탄도 한다. 아버지는 직장일로 바쁘다 보니 자녀교육에 참여할 기회가 줄어들었고, 입시위주의 교육에서 어머니가 자녀교육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녀교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중요하다.얼마 전 미국 명문 법과대학 학장에 한국계 미국인인 고흥주씨가 임명이 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언론은 고씨가 부모로부터 받은 가정교육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한 기자로부터 어떤 가정교육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고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실천 없는 이론은 생명력이 없고, 이론 없는 실천은 경솔하다’는 것부터 ‘늘 밤 12시 전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 일어나라’는 것까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6남매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항상 친절하라’와 ‘가족을 최우선에 둬라’는 것이었다.”다른 기자의 비슷한 질문에 고씨는 “‘열심히 공부해라, 겸손해라, 다른 사람을 도와라, 우리의 지금 처지는 대단한 행운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인생의 목표는 단순히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는 말도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이라고 대답했다.이 기사를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씨의 뒤에 부모가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미국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이제 아버지들은 힘든 부양자 역할을 혼자서 맡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버지 혼자가 아니라 가족이 함께해야 한다. 동시에 집안일도 가족이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아버지들은 부부관계가 더 이상 통제와 억압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그리고 어머니들은 부부관계가 반항과 투쟁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부부관계는 부부간에 책임과 권리를 공유하며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관계여야 한다. 더불어 직장일이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들은 시간을 할애해 자녀교육에 참여해야 한다. 아버지들의 인생경험을 들려주며 자녀들에게 인생의 안내자가 돼야 한다. 고씨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안병철·한양대 교수(한국가족학회 회장)약력 : 1951년생. 77년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86년 미국 코넬대 철학 박사. 86~96년 한양대 사회학과 조교수ㆍ부교수. 96년 한양대 정보사회학과 교수(현). 2000년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장. 한국가족학회 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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