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희생은 온가족의 기쁨’

4월27일 오전 10시 서울 목동 SBS 사옥 6층 7스튜디오. 주황색 네온으로 유난히 눈에 띄는 ‘Challenge’라는 글씨가 한가운데를 장식한 세트와 방청객을 위한 20개 남짓의 의자가 놓인 아담한 녹화장. 녹화를 앞둔 스태프의 움직임이 분주하기만 하다.이날은 지난해 10월부터 방영 중인 ‘특명! 아빠의 도전’ 프로그램 29회 방송분 녹화가 예정돼 있었다. 일산 탄현스튜디오에서 이뤄졌던 이 프로그램 녹화는 개편을 맞아 시간대를 일요일에서 금요일로 옮기면서 처음 목동에서 진행됐다. 초조한 출연가족만큼이나 제작진에게도 숨가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이 프로그램은 직장과 가정에서 소외돼 가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자리를 잊고 사는 가족에게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일깨워준다는 의도로 기획됐다. 출연이 결정된 아버지는 도전과제를 받아 일주일 동안 연습할 시간을 갖는다. 아버지가 녹화현장에서 최종 도전에 성공하면 가족은 희망하는 상품을 받게 된다. 도전과제는 암기에서부터 격파, 묘기축구 등 다양하다. 서커스 수준으로 어려운 과제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아버지의 희생과 인내심이 필요한 프로그램이다.이날 출연이 결정된 가족은 두 팀. 딸 다섯을 둔 한재선씨(61) 가족과 3남1녀를 둔 김일계씨(47) 가족이 녹화를 앞두고 연습에 한창이었다. 오전에 먼저 녹화하기로 한 한재선씨 가족은 스튜디오 옆 분장실에서 초조한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었다.이날 한재선씨의 도전과제는 권총 뽑기. 0.3초 안에 권총을 뽑아 표적을 맞히는 것. 3m 떨어진 거리에 놓인 표적에는 센서가 있어서 불이 들어온 뒤부터 표적에 총알이 맞기까지의 시간이 자동으로 표시된다. 남자분장실에서는 카우보이 복장으로 갈아입은 아버지 한재선씨가 문을 열고 나왔다. 다섯 딸도 아버지에게 “긴장하지 말라”는 주문을 하며 스튜디오로 향했다.아직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이는 둘째딸 선애씨(28)에게 아버지가 훈련에 매진한 지난 일주일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제가 축구할 때 아버지가 뒷바라지 많이 해주셨는데 이번에 아버지 연습하시는 걸 지켜보면서 ‘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한씨의 첫째와 둘째딸은 여자축구 국가대표선수 출신이다. 셋째 진숙씨는 현역 국가대표선수다.스튜디오에서는 녹화를 위한 준비가 차근차근 진행됐다. 아버지는 무대 옆에서 권총 뽑기 연습을 시작했다. 일주일이나 연습한 권총 뽑기이지만 기록은 여전히 들쭉날쭉했다. 방청객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1.08초, 0.86초, 0.22초…’ “와~” 하는 딸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조명테스트가 시작되고 스튜디오 뒤쪽에는 다음 출연팀인 김일계씨 가족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녹화장면을 미리 보고 무대감각을 익히라는 제작진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의 도전과제는 퍼팅으로 컵 세우기. 골프공을 골프 퍼팅으로 앞에 놓인 컵을 향해 쳐 컵을 세우는 과제다. 자리를 잡고 앉아 녹화를 지켜보려는 가족과 달리 아버지는 가족들 뒤에서 커버도 벗기지 않은 골프채를 계속 휘두르고 있다.진행자와 패널이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진행자가 들어오니 스튜디오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무대에 오를 한씨 가족이 담당 PD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가운데 아버지는 혼자 떨어져나와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걸어본다. 방아쇠를 스튜디오에 들어와서만도 수십차례 당긴 아버지는 손을 계속 흔들며 손목을 풀어본다.“스탠바이~”녹화가 시작되고 재치 있는 진행자의 멘트와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지만 아버지 한재선씨의 표정에는 긴장만 가득할 뿐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딸 4명과 맏딸을 대신해 온 사위까지 총 7명의 한씨 가족이 무대에 올랐다. 진행자가 던지는 여러가지 질문에 아버지가 운을 뗀 첫마디는 “나이 먹으니 감각이 없어지네요”였다. “잘 때도 권총을 차고 잤다”는 한씨의 성공확률이 모니터에 표시됐다. 30%. 연습할 때 나온 결과를 평균 낸 것이다. 스튜디오 뒤쪽에 자리한 다음 출연자 김일계씨 가족들이 “아…” 하는 안타까운 탄식의 소리를 터뜨렸다.“특명 아빠의 도전.” 진행자와 방청객이 동시에 “도전”을 외치자 웅장한 음악과 함께 스모그가 엄청난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무대에 표적이 설치되는 동안 잠시 녹화는 중단되고 아버지에게는 또 한번의 연습기회가 찾아왔다. 긴장을 고조시키는 분위기 탓인지 녹화 전 연습 때와는 전혀 딴판이다. 아버지는 아예 표적을 맞히는 것조차 어려워보였다. 총을 뽑는 데만도 수초가 흘렀다. 가족의 얼굴에는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버님, 충분히 연습하시고 마음 편하실 때 말씀하세요.” 안타까움을 담은 진행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씨는 “도전하겠다”고 외쳤다. 기회는 세 번. 세 번 중 한 번만 0.3초 안에 표적을 맞히면 되지만 아버지의 연습하는 모습을 감안하면 쉽지 않아 보였다.녹화가 다시 시작되고 아버지의 첫 번째 도전이 곧장 이어졌다. “탕”잠시 1초 정도 적막이 흘렀다. 진행자가 “0.25초”라고 소리친 뒤에야 온 가족이 얼싸안고 좋아하기 시작했다. 방청석에서조차 한 박자 늦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소감을 묻는 질문에 한씨는 “아무 생각이 안 난다”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저 아이들이 오늘의 나를 보고 조금이라도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아직도 멍하다”는 아버지 한재선씨는 “나는 0.85초라고 써 있는 줄 알았다”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스튜디오를 다 빠져나와서야 조금씩 긴장을 풀고 웃기 시작한 한씨는 그제야 “나도 할 수 있는 게 한 가지라도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그동안 없는 살림에 아이들 축구를 시키면서 힘든 일도 많았죠. 그런 일에 비하면 이번 일주일 동안 경험한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게 내 생애 마지막 도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점심을 먹고 다시 시작된 녹화는 약 1시간 만에 끝났다. 골프 퍼팅에 도전한 김씨 가족은 아쉽게 실패했다. 3회의 도전 중 세 번째 도전은 제작진까지도 거의 성공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 맞았지만 골프공으로 컵이 세워진 뒤 마지막 순간에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김씨의 맏딸 은지씨(22)는 “연습기간 중 온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게 가장 좋았다”며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 것도 소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원래 아버지가 일을 대충 처리하신다고 생각했는데 가족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연습에 임하시는 모습을 뵈니까 너무 놀랍고 기뻤습니다.”이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김진 작가는 “방송 초기에는 자녀들이 인터넷으로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프로그램 성격을 이해한 아버지들이 직접 전화와 편지 등으로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최근의 트렌드를 설명했다. 상품도 가족을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증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늘고 있어 금전적인 성과보다 가족의 추억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녹화가 끝난 뒤 한 제작진은 일주일 내내 아버지가 온몸에 멍이 들도록 훈련에 매달려야 하는 걸 두고 “우리 프로그램 별명이 ‘아빠의 학대’”라며 농담을 건넸다. 다소 지나친 말처럼 들리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아버지들이 이 학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통해 가족에게 기쁨을 주고자 몸이 으스러지도록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게 이날 녹화현장에서 증명된 이 시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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