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때 대약진… 세계 10위권

요즘 한국의 디자인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선진국 제품의 디자인을 모방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던 한국제품의 이 같은 변신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시계를 몇 년 전으로 돌려보자.때는 1999년 12월10일. 청와대에서 ‘산업디자인진흥대회’라는 생소한 행사가 열려 디자인업계 관계자 200여명이 대통령 앞에 나섰다. 건국 이래 이렇게 많은 디자인계 인사들이 청와대땅을 밟은 건 아마도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그리고 이날 “정보와 지식이 사회발전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되는 21세기에는 문화적 감각의 디자인이 세계 경쟁력의 원천이 될 것”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과 함께 정부 차원의 디자인산업 육성책이 발표됐다. 산업디자인 석사학위 소지자에 대한 병역특례 혜택, 디자인 전문회사 벤처기업 인정, 1,000억원 규모의 디자인 벤처펀드 조성, 지역별 디자인혁신센터 10개소 설립 등이 그 골자였다.아이러니컬하게도 전국민을 불안과 공포로 몰고 간 97년의 외환위기와 뒤이은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가 바로 오늘의 ‘디자인 한국’을 만들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라는 당시 상황은 국가적인 절망이었지만 무너진 하늘을 뚫고 살아나기 위해 우리 기업과 정부가 열심히 뚫었던 숨구멍 가운데 하나가 바로 디자인이었던 것이다.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의 홍사윤 책임연구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IMF 사태가 터지고 나서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과거와 같이 저가제품 위주로 수출을 하다가는 환율 상승이라든가 하는 위기가 닥쳤을 때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일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있었죠. 결국 장기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브랜드나 디자인, 문화산업 같은 소프트웨어적 요소를 강화해야 한다는 데 기업과 정부가 같은 생각을 갖고 적극적인 투자에 나섰습니다.”실제 LG전자의 경우 98년 대대적인 구조조정 속에서도 디자인 인력은 오히려 늘렸으며, 해외연구소를 확충하는 등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그 결과 97년 200여명 수준이었던 디자인 인력은 현재 600명을 바라보는 수준으로 늘었으며, 담당임원 1명이 이끌던 조직은 사장 1명과 임원 3명이 담당할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다른 기업들도 비슷한 경로를 거쳐 오늘의 입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디자인진흥원의 박희면 진흥본부장은 기업의 투자 확대와 함께 몇가지 요소를 더 꼽았다.“디지털산업이 확산되면서 이런 분야의 강점이 발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과 같은 IT인프라에서 다른 나라에 앞섰고, 때마침 한류 열풍 등으로 아시아권에서 한국의 국가 이미지와 브랜드 이미지가 크게 개선된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국가 이미지가 좋아지니까 한국 제품의 디자인에 대한 이미지도 함께 좋아진 거죠.”그러면 우리나라의 디자인경쟁력은 어느 수준에 와 있을까. 박본부장은 우리 경제순위에 부합하는 정도는 되지 않겠냐고 진단했다.“분야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대체로 GDP 순위인 세계 10위권 부근에는 와 있다고 봅니다. 진흥원의 조사결과 97년께 선진국의 70% 정도였는데 지금은 80%쯤은 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산업별로는 전자나 자동차 쪽은 디자인 경영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반면, 선박은 물량으로는 1ㆍ2위인 데 비해 디자인 능력은 좀 떨어지고, OEM 산업에 의존해 온 섬유 등은 브랜드와 함께 디자인 능력도 역시 부족하다고 봐야죠.”산업연구원의 이항구 자동차ㆍ조선팀장은 자동차산업의 경우 제품만 놓고 보면 선진국의 85% 수준까지는 쫓아왔다고 평가했다.“문제는 해외의존도가 높다는 겁니다. 자동차 디자인을 해외에 맡기면서 제품의 경쟁력 자체는 크게 높아졌는데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디자인을 전공한 인력 자체는 풍부하지만 아직 자동차 디자인에 대한 전문성이 떨어지고, 또 우수한 인재는 해외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 인력수급에도 문제가 있죠. 정부 차원에서 ‘스타 디자이너’를 집중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어떤 분야에서 집중적인 지원이 이뤄질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98년부터 디자인진흥원을 통해서 체계적인 조사 및 진흥정책을 펼쳐가기 위해 5년 주기의 디자인 센서스를 실시하고 있다. 이 조사에 의하면 200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디자인 경쟁력을 100으로 봤을 경우 일본이 135로 가장 높고, 유럽과 미국이 120을 약간 상회하고 있다. 우리의 주요 경쟁국인 대만과 홍콩도 우리보다는 높게 나타나 있다. 97년 기준으로 이뤄진 조사에서는 유럽과 미국 모두 130을 넘었던 것과 비교하면 선진국과의 격차는 5년 만에 상당히 좁아진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97년 우리나라의 82% 수준이었던 중국이 2002년에는 95%까지 쫓아온 것으로 나타나 결코 안심하고 있을 단계가 아니다.실제로 가격경쟁력과 품질경쟁력, 디자인경쟁력을 함께 비교해 보면 품질에 비해 디자인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식음료제품의 경우 품질경쟁력이 5점 만점에 3.8인 반면, 가격은 3.17, 디자인은 3.29로 나타났고, 섬유는 품질 3.46에 가격 2.9, 디자인 3.01, 의복은 품질 3.42에 가격 2.71, 디자인 3.35다. 이들 품목의 경우 품질에 비해 가격경쟁력을 크게 잃은 상태이고 디자인 역시 품질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자동차나 가전제품 역시 이 같은 현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 가격 3.08, 품질 3.62, 디자인 3점이었고, 가전제품은 가격 2.85, 품질 3.38, 디자인 3.08로 조사됐다.지난해 KOTRA가 체코와 폴란드, 헝가리 3개 국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소비자조사에서는 한국과 일본, 독일 제품의 디자인을 비교하는 설문에 대해서 절반에 가까운 49%가 한국제품의 디자인이 보통수준이라고 답한 반면, 고급스럽다는 답은 1.4%에 불과했다. 일본의 경우 현대적인 디자인이라는 답이 54%를 차지했고, 고급스럽다는 답도 16%로 나타났다. 독일제품은 현대적인 디자인이라는 답이 39%였고, 고급스럽다는 평가는 무려 33.5%에 달해 한국제품과 큰 격차를 보였다.디자인 인력의 양적인 면에서는 세계적인 강국이다. 2002년 센서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디자인 인력양성은 3만6,000명으로 미국의 3만3,000명은 물론 일본의 2만3,000명, 영국과 이탈리아의 2만명을 크게 앞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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