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어도 느끼는 사랑 배워

우리 아버지는 칠순이 넘었지만 지금도 지하철로 출퇴근하신다. 그래서 1990년에 구입한 승용차의 주행거리가 아직도 10만km밖에 안된다. 차 좀 바꾸시라고 하면 “차만 잘 굴러가면 된다”며 버티신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우리 아버지도 검소하신 분이다.10여년 전의 일이다. 그날도 아버지는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서 귀가 중이셨는데 집 대문을 50m 정도 남겨두고 떼강도의 습격을 받았다. 뒤에서 뭔가 엄청난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었는데, 얼마 후 깨어보니 길바닥에 쓰러진 채로 지갑만 없어졌다. 대로에서 노인을 무자비하게 흉기로 강타하고 지갑을 뺏어간 대담하고 악질적인 강도사건이었다. 병원에 가보니 턱뼈가 동강 나 있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었지만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진 치밀한 범죄에 분노가 치밀었다.입원해서 고생하고 계신 중에 지방 어느 도시의 경찰서에서 범인을 잡았다고 전화가 왔다.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범인은 졸업식을 한달 앞둔 고등학교 3학년 학생 4명이었다.겁 없는 나이의 그들은 서울에 왔다가 유흥비가 떨어지자 하필 그날 그 자리에서 우리 아버지의 머리를 흉기로 내리쳤다. 그러나 순진한 구석이 있어서 막상 수표를 훔치고 나서는 사용할 엄두를 못낸 채 고향으로 내려갔다.며칠 후 그중의 한 아이 어머니가 수표를 발견하고 출처를 추궁해 아들로부터 범행일체를 자백받았다. 그래서 이 어머니가 아들을 신고했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면 아들을 훈계하고 수표는 찢어버렸을까? 그것도 아니다. 이 어머니는 아들을 혼내고 수표를 빼앗은 뒤 마음이 흔들려 그만 딸의 혼수 장만에 이 수표를 사용하고 말았다. 당연히 도난신고가 돼 있을 텐데 그만한 생각도 못한 못난 어머니였다.시장상인들의 손에 붙잡힌 어머니는 경찰에 인계됐고, 어머니의 뒤를 이어 아들과 아들의 친구들까지 줄줄이 수갑을 차고 말았다. 이 별난 사건은 해당 지역신문 사회면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됐다.얼마 후 이 철없는 10대들의 부모님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부모님들이 공동으로 합의금을 마련해 자식들 대신 사과하고 재판부에 선처를 요망하는 합의서에 서명을 받기 위해 단체 상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분들은 합의에 필요한 액수를 준비하지 못했다. 즉 우리 아버지의 입원치료비와 정신적 충격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금에 훨씬 못미치는, 정확히 말하자면 치료비에도 훨씬 못미치는 액수밖에 준비하지 못했다.이유는 형편이 어려워서인 것 같았다. 그래도 자식을 걱정하고 대신 사과하는 그 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 돈을 그 자리에서 정중히 되돌려주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빨리 나올 수 있도록 변호사 비용에 보태 쓰라고 돈을 얹어주셨다. 그 덕분인지, 어찌된 영문인지 아이들은 이례적으로 전원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온 것으로 기억한다.남의 자식들 때문에 고생하셨던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 때문에 더 큰 고생을 하셨다. 필자가 ‘데모’하느라 징역살이를 3차례나 하게 되면서 경찰서를 밥 먹듯 드나들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재판정으로 교도소 면회실로 쫓아다니느라 10년간 분주하셨다. 그러나 이때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원망의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오로지 나를 걱정하고 돕고자 하셨을 뿐이다.중고교 시절에도 아버지는 주위에 어려운 친구들을 찾아서 등록금을 대신 내주라고 돈을 주시곤 했다. 고등학교 때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불고 다닐 때는 공부에 방해되니 당장 밴드부를 그만두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귀한 트럼펫을 직접 악기점에서 구해 선물해주셨다.우리 아버지는 말수도 적고 사랑의 표현도 없는 전통적인 우리나라 아버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아버지를 통해 사랑을 배운다.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사랑. 나도 그런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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