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자전’ 엘리트 CEO 맹활약

아버지 우산 벗어나거나 아예 다른 길 걷는 자녀들도 늘어나는 추세

‘자녀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지론이다. 재계에서는 아버지의 경영능력을 쏙 빼닮은 2세 경영인들이 적잖다. 물려받은 사업을 10배, 20배 키워 국내 대표기업으로 성장시킨 경우도 흔하다.아버지의 품을 떠나 독자적으로 사업전선에 뛰어들어 성공한 2~3세들도 가끔 눈에 띈다. 여기에는 ‘부전자전’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전여전’도 만만치 않다. 반면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전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기업인 자녀들도 찾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걷는 길이 같거나 혹은 달라도 ‘아버지’는 여전히 등대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재계에는 아버지의 우수한 경영 DNA를 그대로 물려받은 최고경영자들이 적지 않다.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자동차 등이 대표적이다.이건희 삼성 회장은 1987년 이병철 선대회장으로부터 그룹을 물려받아 세전이익을 17년 만에 100배 이상 늘렸다. 매출규모에서도 87년 13조5,000억원에서 지난해 135조원으로 10배 커졌다. 삼성을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초일류 기업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삼성의 인재중용, 철저한 관리, 무노조 등의 기업문화는 선대회장이 뿌린 씨앗들이다.여기에다 이회장의 선견지명과 발군의 사업감각이 보태지면서 가공할 만한 시너지가 발생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찰떡궁합을 자랑한 셈이다.LG나 현대자동차도 마찬가지다. 구본무 LG 회장은 95년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취임 직전인 94년 말 그룹은 48개 계열사에 매출은 30조원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계열사수는 37개로 줄었지만 매출은 2004년 말 기준으로 약 82조원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LG전자는 국내 전자산업의 초석을 다진 구자경 명예회장의 뒤를 이은 구본무 회장대에 이르러 세계 전자산업의 슈퍼자이언트로 우뚝 선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현대자동차도 놀라운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이 취임한 99년 이후 경영실적이 해마다 가파른 상승곡선을 긋고 있다. 판대대수가 2000년 150만대에서 지난해에는 210만대로 크게 늘었다. 품질도 좋아져 세계 자동차시장의 주무대인 미국시장에서도 호평을 받을 정도로 업그레이드됐다. 현대자동차의 급성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뚝심경영에다 정몽구 회장의 품질경영이 절묘하게 결합됐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처럼 아버지의 경영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의 창의성을 발휘한 2세들은 대성공을 거두며 ‘그 아버지의 그 아들’임을 똑똑히 보여줬다.국내 대기업들의 경우 대다수가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한다. 두산그룹은 이미 4세들이 사장까지 올랐을 정도다. 반면 부모의 품을 떠나 고생을 자청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사업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박경원 전신전자 부회장은 박용오 두산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두산그룹에서 상무까지 지내다가 2001년 전자업체인 전신전자를 인수하며 분가했다. 박부회장은 이에 대해 “부모님 슬하에서 대기업을 승계하는 것보다 그룹이나 가족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창업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보는 것이 평소 꿈”이었다고 말했다.하지만 아버지의 정신과 스타일만은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항시 강조하시는 ‘근자성공’으로 성실과 근면을 기반으로 하고, 무차입경영의 실현으로 규모보다는 내실을 최우선시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김성주 성주인터내셔널 사장도 ‘공주의 삶’을 거부하고 ‘자수성가’의 길을 택한 경영인이다. 대성산업 고 김수근 전 회장의 7남매 중 막내딸인 김사장은 자신이 창업한 배경에 대해 “살찐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 탈출했다”고 표현한다. 물론 고생은 당연히 따라붙었다. 그녀는 “상품기획에서부터 마케팅, 구매, 회계, 영업은 물론 배달, 창고정리까지 안해 본 일이 없다”고 회고할 정도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뛰어난 사업수완을 보이며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부전여전’ 경영인도 환상궁합최근에는 재벌가 2세들이 외식업계에도 속속 진출하고 있다. 회전초밥전문점 ‘사까나야’를 운영하는 홍명식 사장은 남양유업 창업주 홍두영 명예회장의 둘째아들이다. 홍사장은 처음부터 자기 길을 걸은 사람이다. 미국 미시간대 MBA 출신으로 체이스맨하탄은행,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서 외환딜러로 일했다. 한때 인터넷서점 Yes24 설립과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레스토랑을 창업한 것은 평생의 취미를 업으로 바꾸자는 생각에서였다. “직접 김치를 담가 먹을 정도로 음식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음식예찬론자다운 길을 선택한 셈이다.가업을 잇는 것은 보통 장남들의 몫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차남이나 삼남이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딸에게 사업을 물려주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공기청정기업체 청풍의 최윤정 사장은 72년생으로 창업주인 최진순 회장의 4녀 중 셋째딸. 지난해 1월 최회장으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았다. 최사장은 대학에 다니던 95년부터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일을 시작했다.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경리, 영업에서 생산부에 이르기까지 안해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최사장은 혼자 힘으로 떠났던 캐나다 어학연수 시절을 떠올렸다. “공항에 배웅을 나온 아버지가 ‘이제부터 생활을 하려면 돈이 필요할 테니 공기청정기를 팔아서 그것으로 우선 비용을 마련하라’고 하시더군요. 당시에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2003년 초 ‘청풍무구’라는 브랜드를 개발하면서 아버지의 신임을 얻었다. 그녀는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사람에 투자한다’는 아버지의 금언을 회사를 운영하면서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중견문구업체인 바른손카드의 박영춘 회장과 박소연 사장도 남부럽지 않은 ‘부전여전’ 경영인이다. 부녀는 얼굴만 맞대면 회사 이야기만 할 정도라고. 2003년 1녀2남 중 장녀인 그녀가 사장직에 오르면서부터다. 박사장은 원래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97년 외환위기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수습과정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99년 설립한 캐릭터 전문기업 위즈엔터테인먼트가 성공하면서 박사장은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박사장은 “사업을 같이 하다 보니 서로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며 국내 팬시시장 개척자로서의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말했다.가업을 물려받기 위해 자신의 뜻을 접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강승모 유성물산교역 사장은 재정경제부 최연소 과장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을 만큼 잘나가던 공직생활을 접고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중소기업 사장으로 변신했다. 병세가 악화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강사장은 “품질제일주의를 신조로 삼고 있는 아버지의 경영철학을 깊이 새기고 있다”며 “공무원 시절보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자랑했다.돋보기 기업인 vs 연예인‘길은 달라도 마음 통해’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자녀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연예계나 스포츠계에 입문, 스타로 부상한 인물들이 많다. 대표적인 부자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탤런트 윤태영이다. 아버지는 세계적 경영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고 아들도 ‘스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윤태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일리노이주 웨슬리대학에서 경영학까지 전공했지만 끝내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한때 윤부회장이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싫어했지만 요즘은 지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얘기할 정도로 태도가 바뀌었다고 한다.탤런트 차인표의 아버지는 차수웅 우성해운 회장이다. 차회장은 74년 우성해운을 창업한 오너이다. 89년부터 96년까지 선박대리점협회 회장을 지냈을 정도로 해운업계의 터줏대감이다. 차인표 또한 미국 뉴저지주립대 경제학과를 나와 한진해운 뉴욕지점에 근무하기도 했지만 결국 어릴 적 꿈인 영화배우의 길을 선택했다. 차회장은 아들이 나온 영화표를 직접 직원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측면 지원하고 있다.이외에도 영화배우 이성재는 전 삼성종합건설 이강태 사장의 아들이며 영화배우 한재석은 한승준 전 기아자동차 부회장의 아들이다. 스포츠스타 중에도 기업인을 아버지로 둔 이들이 많다. 프로골퍼 박지은 선수의 아버지는 박수남 삼호물산 사장이다. 역시 프로골퍼인 한희원 선수는 한영관 삼화수지 사장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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