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고 올곧게 사셨던 ‘참스승’

우리 회사 사원 면접시 빠지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좌우명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좌우명이란 개인적 수양과 다짐의 준칙을 표현하고 삶에 작용해 그 사람의 일생과 리더십을 축약해서 말해주는 가장 적합한 단어나 문장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10년 전에 좌우명을 ‘우보’(又步)라고 정했다. 말 그대로 ‘걷고 또 걷는다’는 이 우보라는 단어는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이 쉼 없이 걸으며 일하면 권태와 정체가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좌우명은 내 작품이 아니다. 아버지 고 장왕록 박사의 아호를 그대로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아버지의 영민함과 민첩한 행동, 그리고 걷고 걸으면서 사람을 만나고 부지런히 일하시던 삶을 일생의 ‘롤 모델’(Role Model)로 삼겠다는 큰 다짐에서 비롯된 표현이다.10년 전 청년과 같은 몸과 에너지를 자랑하셨던 아버지는 휴가 중 바다에서 수영하시다가 심장마비로 사고를 당하셨다. 아버지가 별세한 후 다음날 일간신문에는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 영문학의 거목, 번역문학의 태두 장왕록 박사가 타계했다’는 꽤나 화려하고 인상적인 타이틀로 기사가 실렸다. 아직까지 내 마음속에는 ‘아버지’라는 단어 석자만큼 화려하고 자랑스러운 타이틀은 없을 것이다.평안남도가 고향이신 부모님은 필자가 1살 때 연년생인 누나와 함께 월남하셔서 우리 6남매를 키우셨다. 그 어려웠던 시절, 어머니가 콩나물을 세어서 국을 끓일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에도 자식들은 월사금(등록금)이나 책 값 때문에 학교에서 야단 맞은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공부를 잘하라고 꾸중을 하시거나 특별한 교육을 하시지도 않으셨다. 다만 촌시(寸時)를 아껴 책을 읽고 원고를 쓰며 제자를 가르치고 친구를 만나는 등 매일매일 바쁘고 즐겁게 생활하셨다.몸소 행동으로 부지런함과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자식들에게 교육을 시키신 것이다.지난해 아버지 10주기 추도식에서 동료교수였던 친구 한분이 “장교수는 큰 제스처나 이상한 몸짓을 취하는 자들의 그 구역질나는 위선을 모르는, 자신에게 매우 정직한 학자였습니다”고 회고했다.이를 뒷받침하는 에피소드가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하루는 대학 제자 두 사람이 아버지를 찾아왔는데 평소와 달리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두 제자가 서로 시험지에 이름을 바꿔 쓰기로 약속하고는 그중 한 사람이 자기 이름을 그대로 쓰는 바람에 들통이 나서 고백하러 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병우야, 걸레 가지고 와서 이 녀석들 앉았던 걸상을 깨끗이 닦아라” 하시며 매우 언짢아하셨다.“자신에게 정직하고 남에게 정직하라.” 요즈음도 내가 두 아들과 회사 직원들에게 자주 인용하는 대목이다.아버지는 행동인이셨다. 명상과 고뇌에 가라앉거나 주저와 좌절의 안개에 덮이는 일이 없이 又步(우보)라는 아버지의 자화상의 뜻에 걸맞게 일과 새로운 것을 찾아서 부지런히 뛰시던 아버지는 바쁘고 올곧게 살아가는 전형적인 현대인이셨다.교사자격증을 따고 교생실습까지 마친 1972년 말, 지금의 LG화학인 (주)럭키에서 수출요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 합격했다. 학교 부임 전에 ‘경험’ 삼아 몇개월 회사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입사를 했다. 이듬해 봄학기 시작을 며칠 앞두고 상의를 드렸는데 학교로 진출하리라 기대하고 계시던 아버지의 반응은 의외였다. “한우물을 파거라. 회사생활 열심히 해서 최고가 돼라.”올해로 나는 회사생활 32년째를 맞는다. 그리고 회사 대표자리에도 올랐다.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진정한 기대는 영문학자가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하는 일에 열심히 몰두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 주신 셈이다. 환갑이 다 된 나이인 이제야 철이 난 것이다.아버님의 영향으로 자식들 중 네 명이 영문학을 전공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니 무척이나 자랑스럽게도 바로 밑 여동생 장영희(서강대 교수)가 아버지에 이어 영문학자로서 같은 길을 가고 있다.지난해 아버지 10주기 추모식 때 장왕록 지음, 장영희 엮음으로 발간한 책 서문에서 여동생이 아버지께 쓴 글을 인용하면서 아버지 회고를 마친다.“…사랑은 남는 것, 추억 속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는 아버지는 우리들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 영혼도 아주 큰소리로 말하면 듣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생전에 못한 말을 나는 이제야 목청껏 외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 세상에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너무나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