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꺾인 ‘멘토’…버팀목 돼야

지식 부족하고 남은 건 잔소리뿐, 자녀에 관심갖고 손발 되도록 해야

프로이드는 자녀가 아버지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어머니를 놓고 서로 싸우는 연적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다. 그러나 점차 성숙해짐에 따라 아버지를 존중하고 아버지의 태도, 가치관을 내면화한다. 즉 아버지를, 동일시한다. 프로이드가 주장한 오이디푸스적 아버지 이미지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필자는 프로이드가 한국적 아버지상을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했지만 존경했기 때문이다.많은 자녀들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연민, 사랑,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에 대해서는 공포, 불안, 미움을 연상한다. 아버지는 잔소리꾼이고 겁을 주며 늘 질책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프로이드는 아버지의 위상을 어머니보다 더 높이 세워놓았다. 왜냐하면 자식이 결국 아버지를 받아들여 그의 초자아를 형성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는 자식의 정신적 지주인 멘토(Mentor)다.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아버지는 자식에게 멘토 역할을 해왔다. 아버지는 세상을 꿰뚫어 보고 못하는 일이 없으며 늘 당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아버지는 머리털이 깎인 삼손, 태양의 강렬한 빛에 날개가 녹아내린 이카루스가 돼버렸다. 아버지는 컴퓨터, 사이워드, 게놈, 나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식에게 전달할 지식이 없고 그래서 당당하지 못하다. 자식이 두려워하며 존경해야 할 카리스마도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잔소리뿐이다. 그래서 자녀는 아버지를 동일시하지 못하고 세간의 팝스타, TV, 영화 속의 주인공을 아버지 대신 내면화한다.무라카미 류가 쓴 이라는 소설에는 히키고모리라는 새로운 젊은층이 등장한다. 인생의 목적을 상실해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신종 히피족이다. 그런 아들을 둔 소설 속의 아버지는 자식을 질타하는데 자식이 아버지에게 대들며 폭행까지 한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난 후 두 주인공은 서로 겸연쩍어 한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명예퇴직당할 일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이고 자식은 아버지가 평소 자신에게 무관심한 것에 반발해 폭행한 것에 크게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독자의 상상을 깨는 식으로 사건이 종말된다. 아버지가 일시적이나마 가출하는 것이다. 명예퇴직당한 것을 가족에게 숨길 수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자식과의 갈등을 일으킨 것을 반성하기 위해서다. 자의 반 타의 반 아버지가 가정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이 이 됐다.필자는 우리 사회에도 소설 속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꽤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늘 바빴고 자식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멘토가 될 역량도 없으면서 자식에게 잔소리를 해왔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대량해고, 대량감원 때문에 우리 사회에 실직 가장이 많이 늘어나서다.이런 절박한 시점에서 아버지는 어떤 이미지를 자식에게 줘야 하는가? 최근 동남아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킨 TV드라마 속의 아버지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자녀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손과 발이 되고자 노력하는 아버지상 말이다.우리가 놀라고, 괴롭고, 슬플 때 늘 우리는 “아이고 어머니”라고 울부짖는다. 엄마 대신 아버지를 찾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늘 자식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자식을 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도 꼭 어머니처럼 행동하라는 말은 아니다.‘엄부자모’(嚴父慈母)는 2005년에도 통용되는 가정규범이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자식을 감싸고 반대로 아버지는 좀 엄해야 한다. 그러나 엄부 속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짙게 배어 있어야 한다. 멘토는 목에 힘만 줘서 되는 것이 아니다. 급속한 사회ㆍ기술ㆍ문화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래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자녀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신적 지주! 그것이 바로 2005년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 자녀에게 각인시켜야 할 아버지상이다.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