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아빠’는 모든 아버지 모습

소외·자괴감 시달려 … 희생 통한 대리만족도 공통점

기러기아빠 연구를 위해 짧게는 1년, 길게는 11년 동안 기러기아빠 생활을 한 이들을 여럿 만났다. 이들을 대하면서 몇가지 공통적인 면을 발견하게 됐다.그것은 자녀에 대한 깊은 책임의식, 가족 내에서의 소외감,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와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자녀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책임의식은 무척 복합적인 구조를 갖는다.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홀로 외로운 생활을 하며 가족에게 상당한 돈을 보내는 행동은 극히 희생적이다.이는 확고한 책임의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인지 기러기아빠들은 자기희생을 통해 자녀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 상당한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그러나 속을 좀더 들여다보면 자녀를 자신과 동일체로 여기는 불건강한 나르시시즘, 즉 깊은 자기중심적 동기도 발견된다. 자신의 성(姓)을 물려받는 자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명문대학 진학을 지상목표로 삼는 반면, 자녀의 진정한 의사에는 무관심하다. 그래서인지 딸의 성공만을 위한 기러기아빠의 사례는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이런 복합적 의식에는 오랜 가부장적 전통과 ‘체면’의식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반면 이들은 엄청난 소외감에 시달리고 있다. 아버지의 소외는 우선 유학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겉으로는 아버지가 최종결정을 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머니가 먼저 주장해 아버지를 설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평소 자녀교육의 결정과정을 주로 어머니가 맡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유학이 결정되는 것이다.이러한 소외는 기러기생활이 계속될수록 더 심화된다. e메일이나 전화로 자녀들과 소통하지만 결정적인 스킨십이 빠져 있다. 따라서 1년에 몇차례 맞는 재회기간에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집약적으로 수행하려 하지만 자녀들은 이를 간섭으로 여기고 피한다.심지어 아버지가 없는 생활방식이 굳어져 아버지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경우도 보인다.하지만 정작 기러기아빠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자신과 가정에 대한 깊은 회의인 듯하다. 벼르고 별렀던 재회를 했으나 자녀나 아내로부터 기대만큼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경우 ‘내가 돈만 버는 기계인가’라는 자괴감이 든다고 한다. 귀국해 다시 혼자가 되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내가 과연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건가’라는 회의에 시달린다.더구나 중년에 찾아오는 심리ㆍ정서적 위기,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자신의 생활과 가정, 경제를 자녀의 유학에 ‘올인’한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 번민이 없을 수 없다.그렇다면 기러기아빠의 문제의식이 이들에게만 특별히 나타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 보통 아버지들의 공통적 문제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기러기아빠는 그 극단의 형태일 뿐이다.보통의 가정에서도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껴 과외비 지출을 아끼지 않지만, 자녀의 속내에는 관심이 없고 가정 내부 일에도 ‘국외자’로 남는다. 형식적으로는 경제권을 가진 가장으로서 군림하고 있지만, 올바른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아버지란 자녀에게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확언해주며 자녀에게 신뢰감, 안정감, 확신을 심어주고 경청과 이해를 통해 자녀의 정서적 필요를 채워줘야 하는 존재다. 그러나 오늘의 아버지는 자녀와 무엇을 나눠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약하다. 우리 가정에서 실질적인 아버지의 부재현상은 보편적인 것이 아닌지 걱정될 정도다.결국 기러기아빠 현상은 오늘날 우리 가정에 진정한 아버지 역할(Fathering)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시간과 마음을 쏟는 아버지들이 많아져야만 한다.아버지 또한 자신의 짐을 혼자 지고 고통받기보다 변화된 사회의 모습에 맞춰 역할분담에 나서야 한다. 아내, 자녀와 함께 마음을 나누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아버지는 남성이지만 남성도 세상의 연약한 존재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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