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역군에서 퇴출 대상으로

가정 내 역할도 경제구조 따라 변화 … ‘가부장’은 전설로 남아

최근 여론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하나 있다. 열네살 여중생의 아버지 살해 사건.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둘러 온 아버지를 어린 딸이 목 졸라 살해한 이 사건은 정당방위 여부를 놓고 한창 논쟁 중이다.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충격적인 존속살인사건이 또 있다. 지난 2000년 한 명문대생이 친부모를 토막살해해 유기한 후 “아버지가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도 줄곧 무시해 죽이기로 마음먹었다”고 해 온 사회를 경악하게 했다.일련의 패륜사건을 접하는 이 시대 아버지들은 마음이 착잡하다. 사건이 벌어진 가정이 특별한 케이스가 아닌 보통의 가정인데다 그 책임이 전적으로 살인 당사자인 자식에게 있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운 까닭이다. 더구나 자식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가 ‘무조건 옹호’를 받지도 못하는 시대다.사실 이런 사건과 정황은 과거 아버지가 절대적 권위를 누리던 시절에는 감히 상상 못할 일이다. 윤택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뼈빠지게 뛰었던 아버지들 입장에선 가슴이 타들어가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사회도, 경제구조도, 가정도 변했다. 변화에 따라 아버지의 위상과 역할, 이미지 또한 확연하게 변하고 있다. 강학중 가정경영연구소장은 “해방 이후 산업구조가 급변하고 가정의 가치관 또한 숨가쁘게 바뀌면서 온갖 병리현상이 생겨나고 있다”면서 “가족공동체 붕괴의 가장 극단적 사례인 패륜사건은 과도기의 혼돈상”이라고 말했다.굳이 존속살인과 같은 끔직한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아버지상의 변화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부장제도로 대표되는 유교문화가 배척당하고 가정에서의 성역할 구분이 모호해지는 등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물론 부정적인 변화만은 아니다. 권위에서 탈피해 가족 속으로 스며드는 신인류 아버지들이 확산되고 올바른 가족관계 정립에 관심을 쏟는 초로의 아버지도 적잖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변화가 서구 선진국보다 몇 배 빠른 속도로 내달린 한국경제 60년의 산물 가운데 하나라는 분석을 내놓는다.실제로 아버지의 역할, 가족 가치관의 변화는 산업구조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농경사회 - 산업사회 - 정보화 사회로 진척하면서 사회 기본 단위인 가정에도 변화의 물결이 소용돌이친 것이다. 한국경제 60년사에는 아버지들의 피눈물과 함께 가정, 아버지의 변화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전쟁이 휩쓴 척박한 국토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던 50년대, 아버지는 ‘가족부양’의 사명을 한 몸에 진 존재였다. 조상을 모시며 가문을 잇고 자녀 훈육의 책임까지 한 어깨에 짊어졌다. 밭 갈고 고기 잡고 숯쟁이에 물장수가 고작인 보잘 것 없는 직업이지만 가정 내에서 아버지는 ‘절대 권위’를 누렸다.지난해 초 30년 공직생활을 마감한 정현식씨(62)는 “물지게를 지며 생계를 꾸리던 아버지는 집안에서 하늘 같은 존재였다”고 회고하면서 “중학교 입학 후 아버지가 타지에 돈 벌러 간 후 갑작스레 돌아가셨는데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고를 몇 년간이나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아버지의 자리가 컸고, 빈자리가 의미하는 타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용혜원 시인도 라는 시에서 “8ㆍ15 후 목탄차 운전하던 아버지/오남매 일곱 가족 키우시며/저녁이면 막걸리 한 사발에 목축이며/온 삶에 한을 모아 허공을 향하여/‘이것이 인생이다!’ 외치시던 아버지”라고 회상했다. 힘겨운 하루하루지만 가족을 위해 헌신한 그 시절 아버지가 그대로 살아 있다.이 시기 아버지들은 쪼들리는 삶이건만 존재감만은 거대했기에 일정 정도의 ‘탈선’도 용납받을 수 있었다. 외도나 가정폭력은 좀처럼 담을 넘지 않았고, 설사 넘는다 하더라도 큰 흉이 되지 않았다.60년대 들어서면서 아버지들은 해외로 돈 벌러 나가기 시작했다.박정희 전 대통령의 말대로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하여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일구기 위해서”였다. 63년 고졸 이상의 파독(派獨) 광부를 500명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자 무려 4만6,000명이 몰려들었다. 총인구 대비 실업률이 10%에 육박하던 때, 매월 600마르크(약 160달러)를 주는 직장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이들은 서독 루르탄광 지하 1,000m와 3,000m 사이 막장에서 일했다. 1m 들어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다. 당시 현지 언론들은 “어쩌면 이리도 억척스럽게 일하냐”며 이들을 칭송했다. 66년 12월, 3년의 고용기간을 채우고 귀국한 광부 제1진은 전원이 1회 이상의 골절상 병력을 안고 있었다. 눈이 멀거나 만리타향에서 사망해 유골로 돌아온 이도 있었다.63년부터 78년까지 서독으로 건너간 광부는 7,800명을 헤아린다. 1만명의 간호사와 함께 이들이 벌어들인 돈은 연간 5,000만달러로 한때 GNP의 2%대에 달했다.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아버지들은 제 몸을 바쳐 먹여 살린 것이다.70년대 산업사회가 시동을 걸자 아버지들은 더욱 바빠졌다. 안으로는 국토개발을 위한 건설노동자로, 밖으로는 중동 건설현장으로 흩어졌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도로, 댐, 항만 건설현장으로 아버지들을 이끌었고 중동건설 바람은 ‘한몫 잡아오라’며 아버지들을 손짓했다.특히 중동특수는 ‘농군’이던 아버지의 직업을 ‘회사원’으로 바꿔놓은 계기가 됐다. 73년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국제경제가 침체됐지만 중동 산유국들은 이를 사회간접자본 확충 기회로 삼았다. 현대건설을 비롯한 국내 건설업체들이 발빠르게 이 시장을 파고들어 75년 8억3,000만달러, 79년에는 65억달러를 중동에서 거둬들였다. 열사의 뜨거운 바람 속에서 땀 흘려 모은 오일달러와 건설 노하우가 ‘한강의 기적’으로 연결돼 우리 경제를 일으킨 바탕이 됐음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임홍재 시인은 이 시기 중동으로 떠나는 농군 출신 아버지들을 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뼈빠지게 농사만 지으면 무엇하나/이것저것 다 잊고/중동이나 가는거야… 사막의 열기가 뜨거우면/얼마나 뜨거우랴/일이년 꾹 참고 일하는 거야/골백번 흙만 파먹어온 우리들인데/그 무슨 일인들 못하랴….”아버지가 ‘산업역군’으로 변신한 이때, 가정에서도 아버지의 존재는 ‘역군’에 다름 아니었다. 고된 노동으로 집을 돌볼 틈이 없었지만 덕분에 자녀들은 ‘공부’를 지상과제로 삼을 수 있었다. 서서히 가정교육의 구심점도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넘어가기 시작했다.80~90년대는 산업사회가 뿌리를 내리면서 화이트칼라가 본격적으로 계층을 형성하기 시작한 때다. 이 시기 한국경제는 매년 7~8%대의 높은 성장을 실현하면서 ‘박정희 모델’이라 불리는 성장 우선 정책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수출주도 공업화 전략으로 1차산업에 의존한 저소득 구조를 탈출한 것도 이때다. 당연히 기업들이 성장하고 재벌구도가 짜임새를 갖춰가면서 고용도 늘어났다. 대학을 졸업하면 대기업에 입사하는 게 일반적인 수순이 됐다.가장들의 생활패턴이 직장 중심으로 바뀐 것도 이 시기다. ‘생존을 위한 직장생활’은 가정 일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점점 축소시켰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아이에게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면서 과잉보호를 낳았다. 중산층의 탄생과 더불어 모든 가정사가 어머니 중심으로 재편되고 아버지는 ‘돈 버는 기계’가 되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때의 아버지들은 별 불편함이 없었다.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엔화에 대한 낮은 달러 환율)의 이른바 3저 호황과 반도체 특수에 힘입어 90년대 중반까지 한국경제가 ‘실력’이상의 성과를 내자 일하는 맛이 났기 때문이다. 청춘을 바친 직장이 쑥쑥 성장하는 것에 삶의 기쁨이 있었다.그러나 좌절은 예정된 것이었다. 자신감은 과잉되고 위기감은 결여된, 그래서 경제시스템 개혁이 지연된 결과는 97년 말 참담한 IMF 외환위기를 불러왔다. 냉전종식, 경제 개방화 등 대외여건 변화에 둔감한 결과 타율적인 개혁을 강요당하게 된 것이다.외환위기는 그간 쌓였던 아버지의 위상을 무너뜨렸다.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직장에서 버림받은 아버지들은 한순간에 공황 상태에 놓였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니 그곳엔 어머니 중심으로 잘 짜여진 가족시스템이 기다리고 있었다. “돈 못버는 아버지는 필요없다”는 의사표현은 이혼율 급증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아버지는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설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무능력한 아버지’는 감싸안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존재가 돼 버렸다.타격은 오래갔다.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다. 여성부가 지난해 9~12월 혼인 중이거나 이혼 경력이 있는 성인남녀 6,156명을 조사한 결과 남성 10명 중 3명(31.2%)은 부인으로부터 정신적 폭력을 당했다고 응답했다. 또 3.6%의 남편은 부인에게서 일방적으로 신체적 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아버지들은 시련을 거치면서 새로운 아버지상을 세우기 시작했다. 육아에 참여하고 가사를 분담하며 자녀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아버지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강학중 소장은 “집안일에 신경 쓰는 아버지가 응원을 받는 시대”라고 말하고 “직장에서의 성공을 맹목적으로 좇는 아버지가 줄어든 수치만큼 가정은 윤기를 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돋보기 IMF 위기 속 ‘아버지’‘아버지도 약한 존재’ 인식한 계기IMF 외환위기는 ‘가정’이라는 사회 기본 단위에 강펀치를 날렸다. 가장의 실직과 가족의 분열ㆍ해체는 고약한 전염병처럼 겉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연일 신문ㆍ방송이 실업을 화두로 잡았고 의기소침한 아버지, 초라한 아버지의 뒷모습이 유난히 부각됐다.사람들은 인정하기 시작했다. ‘가정의 버팀목’으로 언제나 쩌렁쩌렁 울릴 것 같던 아버지의 목소리도 풀 죽을 수 있고, 엄한 얼굴에도 눈물이 어릴 수 있다는 것을.때마침 아버지의 내면을 조명한 책들이 나오자 폭발적인 반응이 일었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중년남자가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눈물겨운 사랑을 그린 김정현의 (1997)의 경우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순식간에 300만부를 돌파했다. 이 책을 읽고 아버지에게 난생 처음 ‘사랑한다’고 말했다는 이도 여럿있었다.조창인의 (2000)는 아버지 돌풍을 이어갔다. 아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큰 사랑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 작품 또한 못지않은 판매부수를 올리며 베스트셀러 역사를 바꿨다.98년 직장인들을 동병상련의 눈물바다로 이끈 일명 ‘눈물의 비디오’도 빼놓을 수 없다. 2,300명 명예퇴직이라는 현실 앞에서 제일은행 행원들이 만든 ‘내일을 준비하며’라는 비디오테이프는 이 시절 가장들의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이 영상물은 구조조정으로 문을 닫은 서울 테헤란로지점 이삼억 차장의 하루를 통해 ‘철밥통 직업’으로 통하던 은행원도 ‘잘리는’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중간 중간 퇴직하는 직원이 나와 “남은 사람들이 잘해 달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누구랄 것 없이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해서 ‘눈물의 비디오’라는 별명이 붙었다.한편 주인공 이차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췌장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 결국 숨져 또 한번 슬픔의 주인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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