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단 하이트 천하통일 ‘눈앞’

1992년 초. 서울시 영등포 조선맥주 본사. 사내 분위기가 흉흉했다. 경영진은 불면에 시달렸다. 직원들도 적잖이 술렁이고 있었다. 창립 60주년을 1년 앞둔 시점에서 회사가 ‘총체적 난국’에 빠졌기 때문이다.30%선을 근근이 유지하던 시장점유율은 20%대로 뚝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소주 강자인 진로가 맥주시장에까지 눈길을 돌린 것도 이 무렵. 이러다간 회사가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고심하던 박문덕 사장(현 회장)은 ‘이대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방어가 아닌 공격으로 위기를 돌파하기로 했다. 신제품 개발로 정면승부를 걸었다. 즉시 신제품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했다. 이들은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안되면 죽을 각오로 새 맥주를 만들었다. 결실은 1년 후에 찾아왔다. 93년 5월이었다. 천연암반수로 빚은 하이트맥주를 세상에 내놓을 수가 있었다.하이트맥주는 ‘신기록제조기’라는 별칭을 얻었다. 기존의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울 정도로 거침없이 내달았다. 역전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하이트가 나온 지 3년 만인 지난 96년 7월이었다. 오비맥주의 50년 아성을 무너뜨리고 시장점유율 1위에 오른 것이다. 이후 하이트의 위상은 돌처럼 단단해졌다.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시련를 겪었으나 순간이었다. 어느새 시장점유율 50%를 훌쩍 넘어 60%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하이트 파워 어디까지2005년 4월1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하이트맥주 본사 사옥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진로인수와 관련, 우선협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이날 주류업계는 깜짝 놀랐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예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뚜껑을 열기 전만 해도 하이트는 뒷전이었다. CJ, 롯데 등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것도 하이트가 적정가격대로 추정했던 2조5,000억원을 훌쩍 뛰어넘어 3조1,600억원을 써낼 줄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진로인수가 마무리되면 하이트의 파워는 시쳇말로 ‘가공할 만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단순히 시장점유율만 따져도 그렇다.하이트는 맥주 및 소주 시장(하이트 주조 포함)을 각각 58%씩 장악하게 된다. 맥주와 소주시장은 전체 주류시장에서 약 80%를 차지한다. 이로써 주류업계에서 절대권력을 구축한 셈이다.먼저 소주시장. 소주시장의 2위 그룹은 금복주(9.9%), 보해(6.8%), 두산(4.3%) 등이다. 진로와의 차이가 워낙 벌어져 있다. 맥주시장도 사정은 별반 차이가 없다. 오비맥주가 하이트와 10% 정도의 차이로 2위를 달리고 있지만 격차는 점점 벌어지는 형편이다. 더군다나 이번 하이트의 진로인수로 가장 타격을 받는 곳이 오비맥주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시간이 갈수록 하이트의 파워는 점점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 영업망을 공유함으로써 생기는 이점이 엄청나다. 예를 하나 들자. 소주시장만 놓고 보더라도 하이트는 계열사인 하이트주조를 통해 전북지역 소주시장의 4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진로와 결합하면 단번에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맥주와 소주를 함께 보면 시너지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가령 하이트는 수도권에 약점이 있다. 시장점유율이 40%대에 불과하다. 반면 진로는 수도권에서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하이트가 진로와의 유통망을 공동 활용해 수도권에서 오비맥주를 압박한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이뿐이 아니다. 방어를 위한 공격이라고 할까. 이번 인수가 성공하면 미래의 불안감을 미리 씻을 수가 있다. 가정이지만 경쟁자가 진로를 인수했을 경우 경쟁은 격화될 수밖에 없다. 소주와 양주시장을 동시에 석권, 이를 미리 막은 셈이다. 하이트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방침대로라면 오는 2007년까지 15~50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이 성사될 것으로 보인다”며 “이렇게 되면 물밀 듯이 밀려드는 외국 주류업체와 맞설 수 있는 강력한 국내기업이 필요하다”며 진로인수의 효과를 설명했다.인수전의 승리요인하이트가 진로인수에 성공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중 최고경영진의 승부사적 기질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우선 눈에 띈다. 업계에서는 하이트가 진로인수전 참여를 선언했을 때만 하더라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자금력에서 롯데나 CJ를 당할 수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증권가 주류 담당 애널리스트들이 대부분 적정가격으로 2조5,000억원으로 봤지만 7,000억원이나 더 많은 금액을 써낸 것이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하이트 내부에서는 어떻게든 인수하겠다는 각오였다. 박회장이 올 초 “사활을 걸고 인수하라”는 지침을 내렸기 때문이다.업계의 예상을 뒤엎은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박회장은 대표이사로 취임한 91년 이후 두 번의 큰 결단을 내렸다. 두 번 다 회사의 명운이 걸린 일이었다. 92년 시장점유율이 20%대로 떨어지자 ‘신제품 개발’이라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은 것이 첫 번째다.박회장은 회사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여관 한 채를 통째로 빌려 1년 동안 합숙했다. 당시 자신의 운전사도 모르게 했던 비밀 프로젝트였다. 경쟁사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신제품은 결국 맥주시장을 석권한 원동력이 됐다.두 번째 결단은 97년 외환위기로 회사의 안위가 위태로웠던 시절이었다. 당시 4,000억원을 투자해 홍천 공장을 지은 것이 화근이 됐다. 금리가 연 30%까지 치솟아 연간 이자만 800억원이 넘었다. 금융권은 워크아웃이나 구조조정을 요구할 정도로 위기에 몰렸다. 박회장은 외자유치에 사활을 걸었다. 그리고 3,000만달러(98년 미국 캐피털그룹), 1억달러(99년 칼스버그그룹)를 잇달아 유치하며 위기를 벗어났다.이번 진로인수 건은 박회장의 세 번째 결단이다. 다만 지난 두 번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과거에는 위기극복의 일환이었다. 이번에는 미래시장을 읽은 냉철한 통찰 속에서 나왔다.또 하나 소비자의 요구를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내는 하이트의 장점도 이번 인수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요인으로 꼽힌다. 지하에서 퍼 올린 천연암반수로 맥주를 만든 것도 소비자들이 깨끗한 물을 원하고 있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순수보리를 100% 주원료로 사용한 보리맥주, 마개를 돌려 따는 맥주 엑스필, 250ml 소형캔 등은 소비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내놓은 제품들이다. 이번 인수전에서 군인공제회, 교원공제회, 산업은행 등 순수 토종자본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한 것도 소비자의 요구를 정확하게 읽은 것으로 풀이된다. 진로소주가 M&A 물건으로 나오면서 국민들이 즐겨 마시는 소주를 외국자본에 넘길 수 없다는 여론이 크게 일었다. 한때 시민단체에서 국민기업을 추진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더군다나 공정거래위원회의 독과점 벽을 넘어야 하는 상황에서 토종자본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한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수전에 뛰어든 다른 기업들이 대거 외국자본을 끌어들인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하이트는 아직까지 인수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인수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오는 2007년까지 진로의 국내외 동시상장을 추진한다는 것이 공개된 유일한 계획이다.일부에서는 인수금액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시비 걸고 있지만 하이트측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사실 하이트는 어느 기업보다 내실을 중시하는 기업문화를 갖고 있다. ‘왕소금’ 소리까지 들을 정도다. 이제까지 주류사업 한우물만 판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회사가 창립된 지 70주년이 넘었지만 아직 사사조차 발간하지 않았다. 70주년 행사도 지나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간소하게 치렀다. 하이트의 한 관계자는 “(3조1,600억원은) 충분히 계산기를 두드려서 나온 숫자”라고 귀띔했다.하이트가 넘어야 할 산은 적지 않다. 공정위 심사도 통과해야 하고, 실사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인수하더라도 계획대로 시너지를 내야 한다. 하지만 하이트가 주류시장의 최강자로 올라서는 과정은 두고두고 한국재계에서 기업경영의 참고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돋보기 장수경영진20년 이상 손발 맞춰 ‘찰떡궁합 자랑’하이트맥주의 경영진은 찰떡호흡을 자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다수 경영진이 하이트맥주에 입사해 한우물만 판 사람들이다. 박문덕 회장을 비롯해 윤종웅 사장, 하진홍 사장, 김명규 전무, 윤기로 전무, 이영진 전무, 윤상훈 전무, 김지현 전무 등 전무급 이상 핵심 경영진이 모두 70년대에 하이트맥주에 입사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재무, 영업, 생산, 관리 등 각 분야에서 25년 이상 일한 베테랑들로 오늘의 하이트를 일군 주인공들이다.박문덕 회장(55)은 박경복 명예회장의 차남으로 76년 입사해 91년 대표이사 사장을 맡을 때까지 영업전선에서만 15년을 보낸 영업통이다. 89년 부사장으로 승진할 때까지는 아예 본사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만큼 철저한 현장수업을 받았다. 사장에 취임할 당시 시장점유율은 20%대로 추락하고, 부채비율은 1,600%에 달할 정도로 회사가 어려웠다. 하지만 신제품 개발에 총력을 쏟아 맥주시장 최고의 히트작인 하이트맥주를 내놓았다. 추진력이 뛰어나고 미술에 조예가 깊다.윤종웅 사장(55)은 국민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75년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이후 줄곧 영업현장을 누비다가 사장에 오른 인물. 신입사원 시절 맥주 24병이 들어가는 나무 궤짝을 어깨에 둘러메고 산이건, 강이건 고객이 모여 노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갈 정도로 투지가 넘쳤다. 영업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윤사장은 90년 이사, 92년 상무, 96년 전무, 99년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승장구했다.하진홍 사장(56)은 경상대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72년 입사한 이래 서울 영등포공장 생산부 부장, 이사, 전무이사 등을 역임한 공장생산 분야 전문가다. 2003년 생산담당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외에도 5명의 전무이사도 모두 70년 말부터 손발을 맞춰온 임원들이다. 김명규 영업담당 전무(56)는 서울 방송통신대 출신으로 77년 입사해 영업, 마케팅, 기획 등을 두루 거쳤다. 이번 진로 인수의 실무부서인 기획부서를 맡고 있는 김지현 전무(52)는 경기상고를 나와 77년 입사한 이래 감사와 경리담당 임원을 거친 재무통. 총무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이영진 전무(50)는 서울대 식품공학과를 나와 79년 입사, 관리분야를 주로 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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