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 바뀐 지배구조… 위기 넘어 초일류로

99년 말 구본무 회장 결심… 투명성 자신감으로 사업실적도 ‘날개’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로 온 국민이 불안에 떨던 1998년 1월13일 오전 8시10분 국회 귀빈식당에 정몽구 현대 회장이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이건희 삼성 회장과 구본무 LG 회장, 최종현 선경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도착했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와 조찬면담을 갖기 위해서였다. 과도한 차입경영과 무분별한 사업확장 등으로 경제위기에 한몫을 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던 터라 기업 구조조정의 칼을 뽑아든 새 정권 앞에 총수들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예상대로 김당선자는 이날 재벌총수의 개인재산 출연을 비롯해 선단식 경영 해체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요구했고 부실기업 퇴출을 선언했다. 당시 재계에서는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을 수용하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대안으로 지주회사 설립을 정부가 허용해야 한다는 건의를 내놓은 상태였다. 이날 면담을 전후해 대통령인수위원회와 정부 주변에서 구조조정 실적이 우수한 기업에 우선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하겠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소수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억제한다는 이유로 87년 금지됐던 지주회사제도가 IMF 위기를 계기로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시민단체와 노동계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99년 4월 기업 구조조정 활성화를 위해 지주회사 설립이 공식 허용됐다.이 시기에 LG 내부에서는 새로운 지배구조에 대한 공감대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구본무 회장은 99년 신년사에서 “LG도 그룹의 의미를 경영이념과 브랜드를 공유하는 ‘독립기업의 협력체’로 정의했다”며 새로운 형태의 지배구조로 나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지주회사 전환 문제가 본격적으로 검토된 것은 99년 하반기부터였다. 당시 강유식 사장의 지휘 아래 한계사업 매각과 합작사업을 통한 외자유치 등 다각적인 구조조정 노력을 펼치고 있던 구조조정본부에서 ‘지주회사’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해 12월 구본무 회장의 결심이 굳어지자 구조본 재경팀이 사전 정지작업에 착수했다.“IMF를 겪으면서 과거의 방식으로는 안된다는 위기감이 높아져 있었습니다. 당시 사회분위기를 봐도 그렇고, 순환출자를 통한 계열사 지배는 더 이상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이 확고했기 때문에 구조조정본부에서 기본방향을 정하고, 최고위층의 재가를 받아 준비에 들어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죠.”구조본 고위관계자의 회고다. 오너는 지주회사의 경영권을 갖고 자회사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겠다는 구회장의 의지도 확고했다는 전언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순환출자를 해결하지 않고는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공정성 시비는 물론이고, 과거처럼 대주주가 불과 몇 %의 소수지분으로 회사를 운영하다간 M&A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방향설정이 확고했던 반면, 제도상의 문제로 인해 외부 공표에 앞서 먼저 해결할 과제가 있었다. 일단 걸림돌은 계열사 지분 확보였다. 상장 계열사는 30%, 비상장 계열사는 50% 이상의 지분을 대주주가 소유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구씨 일가와 허씨 일가의 오랜 동업관계가 유지되고 있던 당시 LG의 지분구조는 주요 계열사 지분을 수십명의 양가 친인척이 나눠 갖고 있는 등 매우 복잡했다. 무엇보다 구회장 일가가 지주회사 설립을 위해 필요한 지분매입에 들여야 할 돈이 상당한 규모였다. 결국 지주회사 전환이라는 밑그림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두 집안간의 관계까지도 손을 봐야 할 상태였다.몇 개월간의 도상작업과 준비를 거쳐 2000년 봄부터 본격적인 지분정리가 시작됐다. 그해 5월 구회장 일가는 3,000여억원을 들여 LG전자와 LG화학의 주식을 집중 매집했고, LG전자의 경우 구회장 일가의 지분율이 12.5%로 올라갔다. 대주주들간에 활발한 지분거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LG가 전자와 화학을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개편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정설로 굳어졌다. 하지만 일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LG정보통신의 LG전자로의 합병을 계기로 온갖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고, 특히 대주주의 지분정리 과정에서 비상장 계열사의 지분을 다른 계열사들이 매입한 데 대해서도 주가 산정기준 등을 놓고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더 이상 물밑작업으로 끌고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이 같은 상황을 진화하기 위해 6월8일 강유식 사장이 증권거래소 기자실을 방문했다. 강사장은 “1년 안에 LG전자와 LG화학의 대주주 지분을 25%까지 늘릴 것”이라고 밝히면서 지주회사 전환계획을 사실상 공개했다. 그리고 7월4일 LG그룹은 공식발표를 통해 “2003년까지 지주회사 전환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국내 대기업으로는 최초의 지주회사 설립 계획이었다.“대기업도 선단식 경영과 순환출자, 상호출자 등의 고리를 끊고 투명경영을 실현해야만 21세기에 생존이 가능합니다. 지주회사체제를 통해서 한계사업의 퇴출과 신규사업의 진출입을 자유롭게 해 지속적인 성장체제를 갖추도록 할 계획입니다.”이제는 부회장으로 승진한 강유식 사장의 당시 발언이다. 그리고 계획대로 2001년 4월과 2002년 4월에 LG화학과 LG전자가 차례로 회사분할 등을 통해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했고, 2003년 3월 통합지주회사인 (주)LG가 설립됐다.“제도적 미비와 불확실성이 가장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정부에서 법제화 논의를 한 것은 수년이 됐지만, 정작 법령이 제정된 뒤에도 지주회사 설립요건과 배당정책, 과세 문제 등과 관련해 각종 제약이 적지 않았습니다. 지주회사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죠.”LG의 한 관계자는 한국에서 지주회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실험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지주회사 전환 이후 LG에 대한 안팎의 시선이 크게 바뀐 것만은 틀림이 없다. LG전자의 한 간부는 지주회사 전환 이후의 사내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지배구조나 소유구조와 관련해서 경영투명성에 자신감이 생겼죠. 소유구조나 경영승계 문제로 외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까 회사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 일에 대한 집중도가 크게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또 과거처럼 사업 자회사가 다른 곳에 투자할 필요가 없이 자기 사업분야에만 전념하면 되니까 성과 달성도 역시 높아졌습니다.”무엇보다 큰 성과는 시장의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LG전자의 권영수 재무담당 부사장은 과거와 같이 사업 외적인 요인 때문에 투자자들이 주식 매입을 기피하는 일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는 시장에서 선호하는 주식이 됐다고 설명했다.“LG전자의 경우 과거에는 경영권 확보 차원에서 순환출자를 통해 사업과는 무관한 백화점, 건설 계열사 등의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계열사들의 경영상황이 나빠지면 출자를 해야 하는 등 사업 외적인 요인 때문에 회사실적이 나빠지는 경우가 많았죠. 이런 어려움이 아예 없어졌으니까 사업실적만으로 평가를 받는 기반이 생긴 겁니다.”한국증권연구원의 빈기범 연구위원은 “한국 사정에 맞는 바람직한 지주회사제도나 지배구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다”고 전제한 뒤 “LG가 도입한 것처럼 지주회사와 자회사가 수직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은 기업의 소유권과 지배간의 괴리를 좁혀 대주주와 소액주주간의 이해상충을 해소하는 데는 바람직한 변화로 본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영미식 지배구조를 따를 것인지, 아시아적 상황을 수용할 것인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LG가 좋은 연구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돋보기 주가로 나타난 성과시가총액 3배 이상 증가 ‘고공행진’지주회사 전환에 따른 가장 큰 성과는 기업가치 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영투명성과 사업실적의 예측가능성이 크게 높아짐에 따라 외국인을 비롯한 투자자들이 LG 주식의 가치를 높게 봐주기 시작한 것이다.일례로 지주회사 전환을 위한 회사분할이 이뤄지기 직전인 2001년 3월28일 기준으로 LG화학의 주가는 1만2,700원이었지만 2월15일 현재 4만700원으로 3.2배나 올랐다. 함께 분할된 LG생활건강은 3만1,000원, LG생명과학은 3만9,000원으로 각각 2.44배, 3.07배 높아졌다.이들 3개 회사의 시가총액은 LG화학이 2조6,221억원, LG생활건강은 4,842억원, LG생명과학은 6,465억원으로 총 3조7,528억원에 이른다. 분할 전 LG화학 시가총액이 1조2,397억원이었던 데 비해 3배 이상 늘었다.같은 기간에 종합주가지수를 비교하면 523.2포인트에서 968.88포인트로 85%가 늘어난 것에 비하면 LG화학 계열사의 주가는 2배 이상의 수익률을 올린 셈이다.2002년 4월1일자로 LGEI와 LG전자로 분할된 LG전자의 경우도 분할 전 주가는 4만5,000원, 시가총액은 6조9,803억원이었으나 2월15일 현재 주가는 7만4,300원, 시가총액은 10조3,727억원을 기록했다. 주가는 65%, 시가총액은 49%가 늘어나 같은 기간에 종합주가지수는 895.20에서 968.88로 8% 높아진 것에 비해 월등하게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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