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 지켜준 ‘신의’와 ‘합리’

인화와 유교적 가풍도 한몫… 분가를 지배구조 개선에 적극 활용

LG의 역사는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된다. 창업자는 고 구인회 창업회장이다. 구창업회장의 장인인 고 허만식씨와 6촌간이자 만석꾼인 고 허만정씨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신의 셋째아들인 고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의 경영수업을 의뢰하면서 출자를 제의했다. 구창업회장은 두 가지 제안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동업이 시작돼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57년간 동업관계를 이어오면서 양가의 자손들이 대거 경영에 참여하며 방대한 지분관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올해 초 허씨가 분가를 계기로 그 복잡하던 지배구조를 말끔하게 정리했다.그것도 송사 한번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 과정에서 지주회사체제를 도입하며 선진경영체제를 구축한 LG는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기존의 일부 재벌들이 2대, 3대로 내려가면서 경영능력의 부재나 재산싸움으로 무너지는 것과 비교하면 모범적인 가족경영 사례로 꼽을 만하다.비결은 뭘까. 그룹 관계자들은 ‘인화’에서 배경을 찾는다. 사전에 충분한 합의를 거쳐 원칙을 정하고 정해진 원칙을 지키며 결과에 대해서는 투명하고 공정하게 처리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최종태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경영사학회 연구총서에서 LG의 인화정신에 대해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고의적으로 잘못을 해도 정으로 감싸는 어정쩡한 가족주의나 온정주의가 아니라 상호합의한 원칙을 존중하고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한다는 엄정한 책임의식이 전제돼 있다’고 풀이했다.유교적 가풍도 큰 역할을 했다. 양가 모두 자손이 많은 집안이지만 유교적 가풍에 의해 교육을 받았고 그 영향으로 엄격한 위계질서가 자리잡고 있다. 자손이 많다 보니 연상의 조카, 연하의 삼촌이 허다하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조카가 자신을 ‘자네’라고 부르는 젊은 숙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이런 전통이 살아 있기에 양쪽 가문은 많은 동생과 조카들을 일사불란하게 컨트롤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9년 12월31일 구인회 LG 창업회장의 타계 이후 구창업회장의 첫째동생인 고 구철회 당시 락희화학 사장은 바로 이듬해인 70년 1월6일 그룹 신년 시무식 때 “구자경 부사장을 제2대 회장으로 추대하자”며 물러난 것은 집안의 가풍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다.여기다가 양가의 오너 일가라도 경영능력을 철저하게 검증한 뒤 경영자로 육성하는 전통도 도움이 됐다.구자경 LG 명예회장은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18년간 현장에서 실무경험을 쌓으며 경영인으로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이렇게 훈련받은 구명예회장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실무경험을 쌓아서 능력과 자질을 키우지 않으면 승진도 할 수 없고 중책도 맡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하곤 했다.이에 따라 구본무 회장도 과장, 부장, 이사, 상무, 부사장, 부회장 등의 직위를 차례대로 거치면서 LG화학과 LG전자 같은 주력회사의 영업, 심사, 수출, 기획업무 등을 두루 섭렵하는 등 20여년간 풍부한 실무경험을 쌓았다.그룹분리 과정도 합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다는 평가다. 무엇보다 분별없이 나눠 갖기를 하지 않았다. 그룹분리는 철저하게 업종 특성과 시너지를 고려한 구조조정 차원에서 진행됐다.2000년 분리된 LG화재해상보험의 경우 정부가 추진 중인 제2금융권 지배구조 개선 정책에 적극 부응한 조치였다. 당시 구자훈 LG화재 사장은 지난 76년 LG화재에 입사한 이래 보험영업 및 업무담당 등을 두루 역임한 보험분야의 전문경영인이었다.LS그룹의 분리도 같은 원칙이 적용됐다. 전선, 산전 등 상호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기업을 모아서 내보낸 것이다.허씨가의 분가도 마찬가지였다. 상호 사업연관성이 적은 전자ㆍ화학 중심의 사업부문과 에너지ㆍ유통 중심의 사업부문으로 나눴다. 이는 일반적인 국내 그룹의 계열분리 과정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또한 이 과정에서 국내 최초로 지주회사체제를 도입, 복잡한 순환출자로 얽혀 있던 소유ㆍ지배구조를 단순화해 기업경쟁력과 가치를 높였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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