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 시스템 개혁 더 미뤄선 안돼’

통폐합·구조조정 당면과제… ‘총장은 기부금 유치 앞장서는 CEO’

“제 업무의 80%는 기부금 유치입니다.”어윤대 고려대 총장(60)은 올해 100주년을 맞은 고려대에 대변혁의 바람을 몰고 왔다. 2003년 2월 어총장 취임 후 고려대는 하루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모교를 방문하지 않았던 고려대 동문은 최근 혁명에 가까울 정도로 달라진 학교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을 정도. 학생복지시설인 ‘타이거플라자’ 안에는 스타벅스와 던킨도너츠 등 해외 브랜드가 들어섰다. 또 올해만 해도 노벨상 수상자 강연, 세계대학 총장포럼 등 국제행사로 가득하다.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인 어총장은 미국 미시간대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은 뒤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해 왔다. 일본 아시아경제연구소와 도쿄대 경제학부 객원연구원, 미국 하와이대 초빙교수 등을 역임하며 글로벌 교수로 자리매김했다.비즈니스 마인드와 국제감각으로 무장한 어총장은 취임사에서부터 ‘세계의 대학’으로 탈바꿈하겠다고 선언했다. 취임 직후부터 국제화를 추구하는 ‘글로벌 KU’(Korea Universityㆍ고려대) 프로젝트’가 시작, 막걸리 이미지의 고려대를 최첨단ㆍ글로벌 선두주자로 이끌고 있다. 변화와 개혁에는 자금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어총장은 “예전에는 덕망과 학식이 높은 총장을 요구했지만 이제는 달라졌다”며 “펀드레이징(Fund Raising : 기부금유치)이 총장의 중요한 업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어총장은 100주년 행사가 열리는 5월까지 2,000억원의 기금을 유치할 생각이다.세계 100대 대학 진입을 위한 국제경쟁력 강화 방안은 무엇입니까.먼저 인문교육의 질적ㆍ양적 강화로 미국의 아이비리그, 영국의 캠브리지ㆍ옥스퍼드대 등의 학생을 따라잡을 겁니다. 1학년 학생이 수강하는 100여개의 교양과목을 강사가 아닌 전임교수가 강의하도록 했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졸자의 가치관이 붕괴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인생관과 도덕관, 세계관을 교양교육으로 바로잡아 주고 싶습니다. 또한 인문교육을 강화하며 1~2학년부터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줘 ‘1학년 때부터 쉬지 않고 공부하는 대학’으로 만들 겁니다. 아울러 2004학년도 입학생 가운데 공대생과 법대생을 제외한 모든 학생의 이중전공을 필수화한 것도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예를 들면 독문학을 전공하면서 신문방송학을 같은 비중으로 전공하는 겁니다. 사회는 급속히 변하지만 평균수명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인생 전반에 걸쳐 한가지 직업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인생 ‘이모작’ ‘삼모작’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학문을 공부해야 합니다.영어강의도 늘었다고 들었습니다.서구권 대학에 못지않은 학교로 발전하기 위해 영어는 필수입니다. 영어를 통해 학생의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타 문화 이해능력을 길러 글로벌 리더로 만들 계획입니다. 2005년 1학기 기준으로 영어강의는 전체 강좌의 23%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2010년까지 50%로 늘릴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신임교원은 원어강의가 가능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아울러 영어와 독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 등을 가르치는 고려대 문과대학 국제어문학부를 ‘7+1’ 제도로 바꿨습니다. 2004년 입학생부터는 재학 중 1학기를 자신의 전공언어 사용 국가에 필수적으로 다녀와야 합니다.실용강좌 확대와 산학협력 현황은 어떻습니까.사회가 요구하는 학과와 과목을 기업과 함께 개설했습니다. 서창캠퍼스 물리학과의 경우 2004년부터 ‘디스플레이ㆍ반도체 물리학과’로 아예 이름을 바꿨습니다. 삼성전자와 손을 잡고 실질적 지식과 기술을 지닌 반도체 디스플레이 전문인력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또 안암캠퍼스의 화학공학과는 2004년부터 LG화학과 제휴해 실무위주로 강의합니다. 또 2005년 1학기부터 산학협력의 일환으로 기업체 연구소 중역을 거친 인력을 교수로 초빙할 계획도 있습니다. 이들의 경륜을 활용해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노하우를 전달하겠습니다.경쟁력 강화를 위해 재정도 중요한데요, 기부금 유치는 어떻게 하시는지요.오는 5월 개교 100주년 행사를 앞두고 재단은 600억원을 들여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을 설립했습니다. 또 졸업생들의 기부금으로 외국인기숙사 ‘아이하우스’(I-house)를 3월에 완공할 예정입니다. 국내에는 아직까지 기부문화가 발달하지 않아서 대학의 ‘펀드 레이징’을 다소 생소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대학의 총장도 미국처럼 기부금 모금에 적극적인 경우가 늘었습니다. 기부금을 유치할 때는 단순히 애교심에만 의존해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기부금이 왜 필요한지 정교한 계획을 만들어 소개해야 합니다. 쓰일 명분이 분명한 ‘목적성 기금’으로 호소해야 자금유치 성공확률이 높아집니다.대학 자금 재테크도 궁금합니다.미국 하버드대학의 경우 ‘하버드 매니지먼트 컴퍼니’라는 투자신탁회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40여명의 펀드매니저가 소속돼 20조원의 기금을 운용하며 주식과 채권, 부동산, 산림 등에 투자합니다. 반면 국내의 보수적 대학 사회에서는 주식 등은 통념상 위험자산으로 여겨져서 대학 자금으로 활발한 주식투자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또 미국 대학의 총장임기는 10년인 곳이 많은 데 비해 한국 대학 총장 임기는 3~4년입니다. 총장 재임기간에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추가수익을 낼 만큼 긴 임기가 아닌 겁니다. 국내에서는 대학 자금의 공격적 관리에 아직까지 한계가 있습니다.단과대학간의 구조개혁도 추진 중인데요.생명과학(Life Science) 분야의 역량을 높이기 위해 생명환경과학대학과 생명과학대학의 통합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또 2년제인 병설 보건대학의 4년제 대학 전환 승인을 위한 본교와의 통합도 추진 중입니다.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이 합쳐져 시너지를 내는 구조입니다. 대학원 유사 학문분야의 연합도 생각 중입니다. 대학원 입학학생이 급감하면서 한 과에 1~2명만 입학하는 사례까지 있습니다. 이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의 4~5배를 들여야 대학원 과정을 운영할 수 있어서 경제적 문제가 거론됐습니다. 학과 자체를 없애는 것보다는 유사 학문끼리 합치면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면 역사교육과와 사학과가 대학원 과정을 공유하는 방식입니다.U21 프로젝트라는 원격교육을 추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U21은 유니버시타스21(Universitas 21)의 약자입니다. 고려대를 포함한 17개의 전세계 대학들이 연합해 원격교육, 즉 ‘e-러닝’(e-learning)을 계획 중입니다. 외국대학들은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중국의 베이징대, 홍콩의 홍콩대 등 모두 세계 200대 대학으로 구성됐습니다. 각 대학에 소속된 학생을 합치면 총 50만명입니다. 이 학생들의 교류가 현재 진행되고 있습니다. 향후 e-러닝이 정착되면 학생들은 각기 다른 대학의 교육과정을 인터넷으로 학습할 수 있습니다.KAIST의 외국인 총장 선임 등 다른 대학의 개혁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로버트 러플린 KAIST 총장 선임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러플린 총장은 카리스마 또한 갖추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아울러 다른 대학 총장 월급의 5배 정도를 더 받는 러플린 총장은 총장 월급도 시장경제 원리로 결정될 수 있다고 보여준 사례가 됐습니다.정부의 대학 구조조정은 어떻게 보시는지요.대학의 통폐합, 구조조정은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번 정부정책은 오히려 대학을 살려나가는 데 기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육개방이 되면서 고교생 유학이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등으로 우수학생을 뺏기고 있습니다. 국내 대학의 개혁으로 인재유출을 막아야 합니다.최근 ‘대학의 위기’와 ‘생존방안’에 관한 해법이 자주 거론됩니다.한국의 우수학생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외국유학을 택합니다. 외국대학의 교육질이 한국보다 높을 것이라는 기대와 외국에서 익힐 어학능력이 외국유학의 장점으로 작용한 겁니다. 사실 국내 대학 교수와 학생의 자질은 외국보다 뛰어났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드웨어의 문제가 아닌 소프트웨어의 문제, 즉 대학 교육시스템의 문제로 국내 인재를 외국대학에 뺏기고 있는 겁니다. 앞서 언급한 고려대의 경쟁력 제고방안 모두 이런 시스템 개혁을 위한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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