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 완화 바람 타고 ‘우후죽순’

서울 강남에서 러브호텔을 운영하는 김모씨(45)는 소위 말하는 ‘끝물’ 때 투자에 뛰어든 케이스다. 김씨는 지난 2002년 40억원을 투자해 이 호텔을 인수했다. 1년 이상 영업을 잘해왔지만 올 들어 실적이 주춤하자 매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만한 사업이 없는데…’라며 미련이 남아있다. 지난 7월까지도 80억원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팔지 않았다. 그게 화근이었다.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이제는 아예 사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는 것이다.98년 이전만 해도 여관, 모텔 등 숙박업종은 은행권에 ‘그림의 떡’이었다. 대표적인 현금 장사로 1~2년이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장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출을 할 수가 없었다. 점잖은 은행이 향락산업에 돈을 빌려준다는 부정적인 사회분위기도 문제였지만 결정적으로 여신금지업종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대출수요는 금고나 신용협동조합 등 제2금융권이 도맡았다. 그나마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이 있어 다행이었지만 투자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실탄이 부족했다.‘그림의 떡’에서 ‘황금알 낳는 거위’로러브호텔이 ‘그림의 떡’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한 것은 98년부터. 그해 2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극복이라는 숙제를 안고 출발한 김대중 정부는 자유와 개방 분위기 속에 98년 4월 숙박업 등 서비스산업을 여신금지업종에서 풀었다. 게다가 인터넷 보급이 확산되면서 성에 대한 인식도 빠른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스와핑’ ‘원조교제’ 등이 인터넷상의 각종 기사로, 또는 생생한 동영상으로 우리 주변을 파고들었다. 감추기 급급했던 성이 즐김의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경제파탄으로 무너지는 가정이 속출하면서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생계형 매춘’은 역 주변, 집창촌에서 교외, 심지어 주택가로 영역을 넓혀갔다. 정부의 여신관리 완화, 성에 대한 수요와 공급 등 러브호텔은 이 같은 확실한 ‘삼위일체’ 속에서 성장했다.숙박업체에 대한 여신제한이 풀리자 은행들은 앞다퉈 ‘러브호텔 모시기’에 나섰다. 지난 98년 숙박업이 여신금지업종에서 풀리면서 은행들이 9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숙박업에 빌려준 돈만 무려 10조원. 한국은행과 은행권에 따르면 숙박과 음식업에 대한 대출은 지난 98년 말 1조9,227억원에서 지난해 말 14조9,051억원으로 12조9,824억원이 늘었다. 대출증가분 중 70~80%는 숙박업, 속칭 ‘러브호텔’이 차지한다. 숙박업에 대한 대출금이 99년부터 5년 동안 매년 2조원씩 증가한 셈이다.2001년부터 부동산가격이 급등하면서 러브호텔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은행들이 담보대출에 치중하면서 러브호텔에 대한 선호도는 더욱 커졌다. 러브호텔의 담보인정비율을 60%에서 70%로 늘리고 영업점장 전결까지 포함하면 최대 80~90%까지 담보대출을 해줬다. 예를 들어 50억원짜리 러브호텔을 지을 때 10억원 정도만 투자하고 나머지 40억원은 은행에서 빌릴 수 있었다.시중은행 관계자는 “지난 2001년과 2002년 경기가 좋을 때 러브호텔은 객실 회전율이 하루 평균 2~3회에 이르는 등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간주됐다”며 “은행들이 너도나도 대출에 나서면서 담보인정비율이 이전의 60%에서 최대 80~90%까지 높아졌고, 심지어 러브호텔 객실 하나에 1억원을 평가해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내수경기가 좋다 보니 영업도 호조세를 이어갔다. 2002년 6월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한ㆍ일월드컵도 러브호텔의 활황을 거들었다. 정부가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숙박업체에 대한 관리 수위를 완화했기 때문이다.자연스럽게 은행들의 ‘쏠림현상’이 나타났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목좋은 곳이면 서로 대출을 해주겠다고 줄을 서고, 특정은행 특정지점만 대출을 해준 게 아니기 때문에 사후부실 책임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며 “약보합은 있어도 약세는 없다는 ‘여관불패’ 신화가 맹위를 떨쳤다”고 말했다.시중은행 부행장은 “정부에서 숙박업소 설립을 권장하는 분위기였고 실제 지방에서 열리는 경기장 근처에 숙소를 늘릴 필요가 있었다”며 “숙박업종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까지 가세하면서 부동산 브로커까지 활개를 쳤다”고 전했다.3억 투자해 9억 벌기도서울 성동구 응봉동에서 러브호텔을 운영해 큰돈을 번 이모씨(57ㆍ여자)는 러브호텔의 황금기를 만끽한 대표적인 경우다. 이씨는 지난 99년에 급매로 나온 대지 40평에 4층짜리 소형 러브호텔을 4억원에 샀다. 4억원 중 1억원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러브호텔을 인수한 후 경기가 살아나면서 장사가 잘됐고 때마침 부동산가격이 급등해 이씨는 2002년에 11억원을 받고 러브호텔을 팔았다. 투자수익률은 200%. 매매차익으로 7억원을 벌었고 3년 동안 영업이익으로 2억원을 벌었다.그러나 2002년 말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이 나타났다. 지방에서부터 매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서울 근교만 해도 휘발유가격이 오르면 사람들이 줄어들 정도로 지방 러브호텔은 경기에 민감하다. 잘된다고 하던 러브호텔의 주인들이 매물을 내놓기 시작했고, 대출금을 연체하는 곳도 하나둘씩 늘어났다.지난해 10월 부동산가격 안정화 대책 이후 부동산가격까지 급락하자 모텔업종은 급기야 은행권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올 1~8월 전국 모텔의 평균 경락률(주택가격 대비 경매가격)은 56%까지 떨어졌다. 아파트의 전국 평균 경락률 79%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연체율이 급등하기 시작, 올 들어 숙박업은 개인고객 연체율의 1.5배 수준에 이른다.펜션, 찜질방 등 대체재까지 등장했다. 2002년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했던 펜션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모텔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찜질방 등 저렴한 숙소들은 주머니가 가벼워진 사람들의 발길을 돌려세웠다. 모텔비용조차 아쉬운 젊은층은 비디오방 등을 찾았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돈 있는 사람들은 호텔이나 펜션 등 시설좋고 멋있는 곳을 찾고, 돈없는 사람들은 비디오방이나 다른 수단을 이용하게 됐다”며 “러브호텔의 주고객층이 공동화되고 있다”고 말했다.이제 은행들은 숙박업종을 대부분 여신제한업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은행권의 자금공급이 끊기면서 매물로 나온 러브호텔조차 소화하기 힘든 상황이다. 악순환의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여신담당자들은 아예 러브호텔로 출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대출해준 러브호텔이 영업이 잘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러브호텔은 기본적으로 장부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사후관리를 위해서도 상당한 발품을 팔아야 한다.가장 쉽게 영업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해당 러브호텔에서 말리는 수건의 수를 세어보는 것이다. 고객수와 말리는 수건수가 비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하루에 3번씩 수건을 말리던 러브호텔이 하루 1번으로 줄었다면 당장 영업에 비상이 걸렸다고 보면 된다. 유사한 방식으로 러브호텔에 들어가는 요구르트나 음료를 세어보는 방법도 있다. 호텔 주차장에 서 있는 자동차의 수와 차종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주차장에 차량이 많고 외제차와 고급차의 비중이 높으면 수익성이 있는 러브호텔이다.시중은행의 모텔업 여신전문가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러브호텔의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지만 이미 상당부분 초과공급됐기 때문에 ‘불패시대’를 재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성매매특별법’ 시행으로 시장전망은 더욱 불투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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