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마비 계절…재미·지식 한꺼번에

혼자서 즐겨도 좋고 다른 사람과 나누면 더욱 좋아

해마다 추석연휴가 시작되면 빠뜨리지 않고 꼭 챙겨두는 것. 다름 아닌 연휴 기간 TV 프로그램이 빼곡히 안내된 신문 지면. 이미 본 영화와 아직 못본 영화, 보고 싶었던 영화와 어쩔 수 없이 또 봐야 하는 영화 따위를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구분하고 적절한 시간 안배와 계획을 통해 빠짐없이 통달하겠다는 유치하고 한심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경제적이기까지 한 이유 때문이다.TV를 벗 삼아 휴일과 연휴를 보내는 풍속도가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특별한 취미와 계획을 갖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하루 종일 지치지 않고 온갖 볼거리를 제공하는 TV야말로 최상의 오락도구이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제 아무리 TV가 바보상자니 뭐니 하며 떠들어봐야 공염불이다. 누군들 몰라서 그럴까?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이런 TV를 향한 맹목적이며 반복적인 중독 행위에도 이유는 있다. 모모한 이유와 변명들이 무수히 쏟아지겠지만 장담하건대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일상에서 즐길 만한 놀이문화가 이 땅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4,500만의 국민들이 가장 손쉽게 즐긴다는 ‘화투’는 도박이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남들에게 보여주기 썩 유쾌하지 못한 놀이다. 술 역시 그렇다. 함께 있어 좋은 사람, 술 마시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단히 힘겨운 놀이문화가 바로 음주가무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이기를 십분 활용한다고 인터넷 채팅이나 게임을 떠올려 보지만 썰렁한 모니터 앞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처량하기 그지없고, 게임에 몰두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내 지루하고 무덤덤해지기 십상이다. 영화나 연극, 쇼핑도 같이 즐겨줄 사람이 없다면 오히려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다.해마다 반복되며 찾아오는 이 괴로운 운명. 이 괴로운 운명에서 벗어날 근본적 대책에 대한 절박한 요구는 극에 달한다.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름 아닌 책 읽기다. 너무 구태의연하다고? 항상 그렇다. 진짜 괜찮고 좋은 것들은 그 일상성에 가려져 제대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고 묻히는 법이다.책만큼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뿐만 아니라 재미와 지식, 감동을 한꺼번에 전해줄 수 있는 것도 드물다.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반복해서 즐기는 것도 가능하고, 특정한 부분만 계속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소리내어 읽으며 즐길 수도 있고, 조용히 눈으로만 읽으며 즐길 수도 있다. 가끔은 다른 사람이 읽어주는 것을 들으며 즐겨보는 것도 괜찮다.이런 즐거움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해봐야 1만원 안팎의 책 한 권과 차분히 앉아서 만끽할 만한 시간이 전부다. 여기에 좀더 욕심을 부리자면 향기로운 차 한 잔과 잔잔한 음악 정도.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문화적 놀이가 바로 책인 셈이다.취향에 맞게…선택 폭 넓어이제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 구체적으로 선택하는 일만 남았다. 진지하고 무게 있는 인문서도 좋고, 즐거운 소설이나 에세이도 좋다. 아주 실용적인 책도 좋고, 감동적인 책도 좋다. 이제부터 소개할 10권의 책들은 올 추석연휴를 빛내줄 색다른 놀이의 도구들이다. 혼자서 즐겨도 좋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더욱 좋다.명절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 가족이란 참으로 묘한 관계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관계.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면서도 사람의 힘으로는 끊어낼 수 없는 관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실체를 800명이 넘는 사람들과의 직접 인터뷰를 통해 들여다본다. 사랑하다 미워하고 다시 사랑하게 되는 엄마와 딸의 관계,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타인처럼 살아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하나인 듯 둘인 듯 긴장과 이해의 강을 넘나드는 부부간의 관계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이 이 책 (북하우스)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위적인 편집 없이 있는 그대로의 고백을 담았기에 더욱 감동적이다.가족이라는 이름의 관계 속에서 유난히 가슴 저리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미움과 고마움, 사랑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지점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 방송작가 고혜숙이 쓴 (함께)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아직 친정엄마라는 존재가 실감이 나지 않는 젊은 엄마,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나른하고 지겨운 일상 속에서 어느덧 30대 후반에 들어선 엄마, 이미 친정엄마의 처지가 되어버린 중년의 엄마,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단 한 사람뿐인 존재인 친정엄마의 유쾌하고도 눈물겨운 활약상이 책 안에서 펼쳐진다.아내와 장모님의 비밀스러운 관계, 사위가 왜 장모에게 백년손님일 수밖에 없는지 모르는 철부지 사위들도 읽으면 더욱 좋다. 킥킥거리며 읽기 시작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발견하게 되는 책이다.분위기 쇄신을 위해 색다르게 사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맛보는 것도 좋겠다. 번잡하고 반생명적인 도시의 삶이 싫어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떠나버린 사람들. 학교도 숙제도 없지만 아이들은 자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자연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으며 쑥쑥 자란다. (샨티)는 버리고 사는 일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버리면 버릴수록 오히려 채워지는 삶들. 돈과 소유가 사라진 자리에 가족간의 신뢰와 사랑이 채워지고, 여유와 생명이 들어찬다. 유행처럼 몰아치는 ‘웰빙’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선이골의 일곱 식구들은 분명하게 보여준다.때가 때인 만큼 옛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책 즐기기의 좋은 주제가 될 것.(사계절)는 이제까지 우리가 잘 몰랐던 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상생활을 고스란히 복원해낸다. 벼슬을 하며 얼마의 월급을 받았는지 그 내역은 어떻게 되는지, 그것들은 어떻게 썼으며 부부 또는 가족간의 관계는 어떠했는지에 대해 소상한 기록들을 펼쳐놓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아들과 딸, 친가와 외가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호주제와 가부장제를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자못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내밀한 일상사를 살폈으니 이번에는 특별한 마니아들을 만나볼 차례다. 조선시대에 무슨 마니아가 있었을까 의아해하겠지만 (푸른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왜 그들을 마니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 궁금증이 한꺼번에 해소된다. 동시에 무엇엔가 미친다는 것,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위대한가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다. 교양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깊이가 실종된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고 싶은 일에 몰두했던 조선시대 인물들의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다.시간을 좀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여기는 치열한 영토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삼국시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라 가야와 그 안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동시에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악사 우륵과 대장장이 야로의 이야기가 우리 시대 미문가 김훈의 손을 거쳐 (생각의나무)로 새롭게 태어났다. 누구도 소유할 수 없으나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을 소유하려는 인간과 욕망은 유한하지만 언제까지나 무한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것. 정치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김훈이 그려놓은 이 가상의 세계는 진정한 소설 읽기의 맛과 재미를 담뿍 느끼게 해준다.시간 여행의 묘미도 ‘듬뿍’다시 시간을 거슬러 1980년대로 돌아온다. 그 시절 꿈과 희망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시작된 이 땅의 프로야구 시대와 함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기록. 프로야구가 시작된 이래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최악의 팀으로 기록된 ‘삼미 슈퍼스타즈’가 이야기의 중심에 선다. 그 알싸한 추억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그들의 마지막 팬클럽 또한 살포시 등장한다. 경쾌하고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무장한 (한겨레신문사)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혹 나도 모르는 사이 남들이 원하는 대로 휩쓸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반문하도록 만드는 매력을 가졌다.무엇인가 기존의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의심하고 돌아보는 눈을 이번에는 유럽으로 돌려본다. 그곳에 예수가 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다. 의문의 죽음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끝은 대단히 놀랍다. 또한 의문의 해소가 아닌 증폭으로 확장된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를 둘러싼 비밀, 기존 기독교 교단의 숨겨진 의도와 음모, 그것을 그림 속에 담아낸 예술가들에 대한 추적이 두 권 분량의 책 (베텔스만)를 순식간에 읽어내려 가도록 만든다.책으로 만끽하는 새로운 연휴 놀이문화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지금부터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 사람들, 오히려 역귀성을 통해 서울에 입성한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 단돈 1,000원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 이상의 것들을 돌아볼 수 있도록 안내한 (황금부엉이)이라면 낯선 외국도시를 여행하는 것 이상의 만족을 맛보고도 남는다.마지막으로 모처럼의 명절 연휴, 고향과 가족 대신 연인끼리 오붓한 시간을 계획한 사람들을 위해 추천하는 책 (랜덤하우스중앙). 명절에 맛보는 낭만적 일탈. 귀성과 귀향으로 막히는 길만 요령껏 피해갈 수 있다면 은밀하면서도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채우는 데 최고의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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