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게, 더 멋지게’ 싸구려 이미지 굿바이

“30평형대 임대아파트가 나오면 적극적으로 입주를 생각해 볼 겁니다. 전셋집 옮겨 다니기 지겨워도 집을 살 형편은 아닌 우리 가족에게 딱 맞는 대안인 것 같은데….”5년 전 결혼해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있는 이순호 A공사 대리(34). 결혼 전 혼자 살 때부터 전세살이를 했던 그는 결혼 후에도 2번의 이사를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 도봉구 창동의 26평 아파트도 1억원짜리 전셋집이다.올 봄 그는 모기지론으로 집 장만 하는 방법을 적극 검토했었다. 하지만 20년간 갚아야 할 이자와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빌린 2,000만원의 상환 문제까지 감안하니 “답이 안나오더라”고. 이후 중형 임대아파트 공급 소식을 접한 후부터는 관련 뉴스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그는 “널찍한 임대아파트에서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굳이 무리해서 집 장만을 할 필요가 있겠냐”면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가 제법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정부가 내놓은 중산층을 위한 중형 임대아파트 건설 계획에 무주택 도시근로자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최소 10년의 임대기간이 지나면 분양으로 전환되는 전용면적 25.7~45평 아파트를 본격 공급한다는 구상이다. 그간 ‘저소득층은 임대, 중산층은 분양’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의 주택정책에 일대 변화가 인 셈이다. 최근 주택가격이 하향 안정되면서 재산증식을 위한 주택 소유 대신 고급형 임대주택이 인기를 끌 것이라는 판단이 입안 배경에 깔려 있다.이에 따라 집을 살 여력은 부족하지만 30평형대 이상 너른 집이 필요한, 집을 살 때까지 안정적으로 임대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실수요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에 ‘굳이 집을 살 필요 없다. 양질의 거주공간이면 임대도 상관없다’는 실속파도 합세, 중형 임대아파트의 출현 여부가 여러모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정부 “30~40평 임대아파트 짓는다” = 정부의 중형 임대아파트 구상이 가시화된 것은 지난 7월 발표된 건설경기 연착륙 방안을 통해서다. 이전에도 이헌재 부총리 등 경제정책 수뇌부 쪽에서 중산ㆍ서민층 주택난 해소를 위한 임대아파트 건설 확대 의견이 간간이 나왔지만 구체화된 계획이 나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중형 임대아파트는 전용면적 85~149㎡(전용면적 25.7~45평)로 분양면적으로 따지면 32~56평형 규모다. 20평형 미만의 저소득층 공급용 임대아파트와는 확연히 다른 종류다.임대기간도 최소 10년으로, 장기거주를 원하는 실수요를 입주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10년이 지나면 건설업체가 분양으로 전환시켜 거주자에게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다. 이런 고급형 중형 임대아파트를 연간 1만~2만가구씩 짓는다는 게 정부 구상이다.공급지역은 공공택지가 중심이 된다. 우선 2005년까지 공공택지에서 85㎡ 초과 분양주택용지 가운데 30%를 중형 임대아파트 사업자에게 우선 배정키로 했다. 내년에 공급될 성남 판교지구나 파주 운정지구 등 청약수요자 관심이 높은 알짜 택지지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린벨트 해제지도 대거 포함된다. 건교부 계획대로라면 판교에서는 689가구, 파주 운정에서는 2,072가구의 중형 임대가 선보일 전망이다.중형 임대아파트를 짓는 주체는 민간건설사다. 그동안 건설사가 직접 아파트를 지어 임대하는 ‘건설임대사업자’(2003년 말 기준 1,400개)는 중소업체가 대부분이었다. 분양 위주 사업에 치중해 왔던 중대형 건설사가 참여해야 시장이 확대되는 만큼, 정부는 이를 위한 각종 지원책도 내놓았다. 지난 11월12일 발표된 지원방안 중 핵심은 종합부동산세, 재산세, 양도세, 취득ㆍ등록세 등에 대한 감면혜택이다. 자체 확보한 택지에 임대주택을 건설할 경우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기로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임대주택을 짓는 만큼 전체 용적률의 30% 가량이 더 늘어나면서 그만큼 주택을 많이 지을 수 있다.또 연기금이나 리츠 등이 택지를 공급받아 중형 임대주택을 건설, 임대사업을 펴는 것도 가능토록 했다.△업계 “수지타산 맞을까?” = 정부가 건설경기 연착륙 대책으로 중형 임대아파트 공급 카드를 내놓은 후 주택건설업계는 고심 중이다. 지난해 이후 눈에 띄게 사업환경이 악화돼 하루빨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하지만, 선뜻 공을 받아 물지 못하는 상황이다. 분양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해 온 대형업체는 더욱 그렇다.주춤하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우선 각종 지원방안에도 불구하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 소비자로부터 분양대금을 받아 공사를 진행하는 선분양 후시공에 길들여진 상황에서 “뭉칫돈(시공비) 들여 아파트를 지어놓고 푼돈(임대료)이나 받을 순 없다”는 이야기다. 임대아파트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지을 수도 없어, 마감재나 인테리어 등을 평형 수준에 맞게 맞춰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다. A사 관계자는 “다른 대형업체 행보를 보면서 시간을 두고 검토할 것”이라며 “손해 볼 것 같은데 남보다 먼저 뛰어들 업체가 어디 있겠냐”며 반문했다.주공이나 토공이 민간업체에 공급하는 주택용지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목소리도 높다. B사 관계자는 “전용면적 25.7평 이하 임대아파트 용지는 조성원가의 85%선에 공급가격이 매겨지지만 중대형 임대아파트는 감정가가 기준이 된다”며 “화성 동탄신도시에 공급된 25.7평 이하 임대용 택지는 평당 250만원선이었지만 남아있는 임대용 부지는 평당 500만원선에 가격이 매겨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중형 임대아파트 사업에 나서려 해도 두 배의 비용을 들여 부지를 매입해야 하기 때문에 엄두조차 내기 힘들다는 이야기다.반면 그간 임대아파트를 지어온 중견업체는 비교적 밀도 깊게 사안을 검토하는 모습이다. 수원 등지에 임대아파트를 건설한 바 있는 우림건설은 사업확대를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임대사업의 비율을 높이는 방안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엽 부실장은 “임대주택 활성화 방안이 나온 후 내부적으로 사업방향을 검토 중”이라고 밝히고 “결국 자금운용과 임대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공자금 조달과 완공 후 임대관리, 세금감면 혜택의 실효성 등에 대해 면밀하게 따지고 있다는 설명이다.대표적인 임대아파트 전문업체인 부영 관계자도 “중형 임대아파트 사업 진출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정부방침대로 종합부동산세 합산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고 재산세 감면과 양도세 중과 및 법인세 특별부가세 면제범위가 넓어지는 등 각종 혜택이 사업 수지와 어떻게 연결될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그러나 중형 임대아파트의 수요를 확인한 후 사업에 뛰어들 업체도 적잖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공공택지의 공급 형태가 △분양용지 △서민용 임대용지 △민간 중형 임대용지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지게 되는 만큼 언제까지나 ‘검토’만 하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사업 용지가 부족한 마당에 새로 개발되는 공공택지의 중형 임대용지를 마냥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라며 “어느 업체가 먼저, 어떤 컨셉을 적용해 사업을 할지 귀추가 주목된다”고 밝혔다.한편 저소득층 주거안정을 위한 임대아파트 건설에 초점을 맞춰왔던 주공과 지자체 개발공사의 행보도 관심거리다. 특히 주공은 중형 임대아파트 건설에 나설 가능성이 높게 매겨진다. 지난 11월1일 취임한 한행수 주공 사장은 “주택을 소유 목적이 아닌 거주 개념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중류층 이상도 살 수 있도록 고품질 임대아파트를 공급하는 게 중요하다”며 “대도시 주변 좋은 땅에 중산층용 중형 임대주택 건설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SH공사도 지난 11월12일 착공한 왕십리 뉴타운지구 내에 지하 4층, 지상 25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을 임대용으로 공급하기로 하면서 임대아파트 고정관념 탈피에 나섰다. 전용면적 27.3평, 37.6평 아파트 69가구, 11.7평, 14.4평 오피스텔 28호를 건립해 고급화된 중대형 임대주택을 선보인다는 계획이다. 이 주상복합은 우선 타워형 2개동으로 분리, 시각적 개방감을 확보하고 건물외관은 첨단미래형 도시공간을 나타내는 디자인으로 꾸며진다. SH공사는 향후 임대아파트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으로 크게 기대하고 있다.△‘수요ㆍ수익성’ 유무가 관건 = 지난해 7월 주거환경연구원은 정책 세미나를 열고 민간 임대주택 활성화를 위한 몇가지 제언을 내놓았다. 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2002년 말 전국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서는 등 주택공급량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지만 임대비율은 크게 줄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전세가구를 줄이기 위해 주택을 무한정 공급하는 발상이 바람직한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었다.특히 연구원은 주택마련을 위한 부담에 시달리기보다 주택을 거주 개념으로 인식,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만 있다면 임대주택에 입주하겠다’는 의견이 높게 나타났다고 밝혔다.지난 96년 주택산업연구원이 조사할 당시 임대주택 입주 의사는 51%였지만, 지난해 주거환경연구원 조사 때는 55.5%로 증가했다는 것. 결국 서민층 위주의 임대 시스템이 중산층으로 확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이야기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내놓은 중형 임대아파트 공급계획이 이 조사 결과를 상당부분 참고해 입안된 것으로 보고 있다.하지만 실제 임대아파트 입주수요와 별개로 공급주체인 건설업체의 신통치 않은 반응이 문제다. 일반 청약 수요자가 아닌 건설사 등 정작 투자를 해야 할 수요가 눈치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지난 11월3~4일 토공이 남양주 진접택지지구에서 내놓은 중형 임대주택 용지에는 단 한 곳의 건설업체도 신청하지 않아 “출발부터 삐걱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다. 연기금, 보험사, 리츠 역시 신청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시흥 능곡, 용인 구성지구 등에서도 중형 임대주택 용지가 공급되지만 전망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다. C사 관계자는 “도입 초기인데다 경기가 좋지 않아 업체들이 선뜻 나서지 않는 것”이라며 “하지만 많은 건설업체가 관심을 갖고 있거나 적극 검토 중이어서 비관하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한편 중형 임대아파트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청약통장 가입이 필수다. 보통 아파트 공급규모와 형태에 따라 청약저축과 부금ㆍ예금이 나눠지지만 중형 임대아파트는 모든 청약저축 가입자가 신청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무주택세대주에게는 청약우선권을 부여해 원래 취지를 살린다는 계획이다.임대수요층이 가장 궁금해 하는 임대료 수준은 아직 정해진 바 없다. 다만 주변지역 전세금보다 낮은 선에서 정해지며 월세 비중이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하지만 임대료를 낮출 경우 건설업체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낮아지게 돼 기존 지원방안보다 획기적인 ‘조치’가 나와야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른다는 의견이다. 고종완 RE멤버스 대표는 “중형 임대아파트의 성패는 수요확보와 수익성 유무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며 “서울 수도권의 경우 수요가 분명 존재하지만 수요층이 원하는 임대료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는 택지공급비용 등 원가를 낮춰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INTERVIEW / 서수정 주공 주택도시연구원 책임연구원“임대아파트 패러다임 바뀐다”“임대아파트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부정적인 쪽에 치우쳐있습니다. ‘임대아파트 = 소형 = 싸구려 집 = 가난한 동네’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지요. 하지만 한편에서는 공공임대주택의 품질이 높아지고, 중형 임대아파트가 나오는 등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어요. 임대아파트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는 겁니다.”주공 주택도시연구원에서 임대주택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서수정 박사는 “소유에서 거주로 주택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고 강조했다. ‘저소득층 주거안정’이라는 하나의 기조로 진행돼 온 임대주택 정책이 다양성을 갖추면서 주택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고 있다는 것.서박사는 “일본과 서구 선진국에서는 집을 장만할 때까지, 혹은 안정적인 주거를 위해 임대주택을 선택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다”면서 “국내에서도 무리한 집 장만에 회의적인 젊은층이 늘고 있는 만큼 임대주택 시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특히 그는 임대주택의 사회통합 기능에 관심을 두고 연구 중이다. “프랑스 등 유럽에서 임대와 분양을 한 단지에 섞는 등 경계를 없애 위화감이나 계층의식을 크게 줄이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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