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이민제도 ‘매력’

“퇴직을 하면 남아공에 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2남1녀인 자녀들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관심이 많아요. 여건이 허락한다면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고 싶습니다.”모 중견기업 이사로 재직 중인 김경탁씨(53)는 3개월여 전부터 남아공 이민을 검토하고 있다. 영국 런던에서 유학한 장남이 최근 비즈니스 때문에 남아공에 다녀온 뒤 ‘강력 추천’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언제 일선에서 물러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 후 이민을 계획하다 최근 남아공을 제1순위에 올려놓게 됐다”고 말했다.당초 김씨는 피지, 몰타같이 기후와 자연 풍광이 좋은, 그러면서도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은 나라를 이민 후보지로 올려놓았었다. ‘노후를 편안하고 풍요롭게 보내자’는 자신의 이민 슬로건을 충족시키는 한편 관광객을 상대로 작은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나라를 골랐던 것. 하지만 장남의 제안 이후 남아공으로 후보지를 변경했다. 김씨는 “흑백갈등이 종식돼 사회가 안정돼 있고 한국인이 시장을 개척할 만한 여지가 풍부해 편안한 노후와 사업적 성공을 동시에 노릴 만하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김씨처럼 남아공으로 이민을 계획하는 이가 늘고 있다. 지난 2001년 전후해 캐나다, 뉴질랜드로의 이민이 붐을 이루었듯 최근에는 남아공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이민알선업체들은 지난해 가을 이후 남아공 이민을 문의하는 상담전화가 크게 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장동훈 필아프리카 사장은 “세계 최고라 할 만한 자연환경, 다른 선진국에 비해 까다롭지 않은 이민 조건 등이 장점으로 작용해 이민 수요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전했다. 장사장은 또 “지난해 말, 외교부 고위직 출신 은퇴자 가족의 남아공 이민을 알선했다”고 말하고 “연금생활자의 경우 자연을 즐기며 노후를 만끽하기에 남아공만큼 좋은 나라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현재 남아공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은 줄잡아 3,000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는 어학연수, 조기유학 등 교육 목적으로 체류 중인 인원까지 합산한 수치. 이 가운데 영주권, 시민권을 취득한 한국 교민의 수는 2,000명선이다. 지중해성 기후로 세계적인 관광지인 케이프타운에 40% 정도가, 나머지는 산업중심지인 요하네스버그와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에 거주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요하네스버그에 한인회가 발족, 교민사회가 조직적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한국인 이민이 시작된 것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이민자들은 무역 등 중소 규모 비즈니스에 종사하면서 백인사회와 동등한 지위를 확보했다. 92년 수교 후 이민이 점차 늘어나면서부터는 관광객과 비즈니스맨을 겨냥한 게스트 하우스 사업에 뛰어드는 이가 늘기 시작했다. 현재도 교민의 50% 이상이 게스트 하우스 사업을 할 정도다.최근 1~2년 사이에는 어학연수, 조기유학 등 한국인 학생 수요가 늘어나면서 교민들은 게스트 하우스와 함께 후견인(가디언ㆍGuardian) 사업 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추세다.조기유학의 경우 반드시 현지인 후견인이 있어야 입학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정 수수료를 받고 후견인으로 나서는 이가 상당수라는 것이다. 더불어 PC방, 한식당, 슈퍼마켓 등을 창업하거나 준비하는 이가 늘어나는 중이다. 전윤복 라우월드 팀장은 “1~2년 전까지만 해도 게스트 하우스 사업이 대다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지난해부터 이민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올 하반기쯤에는 다양한 사업들이 새로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최근 이뤄지고 있는 한국인 이민은 정식 이민 비자를 발급받는 대신 유학 비자로 출국, 현지에서 자영업 비자를 받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김범수 남아공유학원 대표는 “남아공에서는 영어를 못하면 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학업이든 이민이든 영어회화 능력이 필수”라고 말했다. 영어연수를 받으면서 사업계획서를 작성 제출해 사업 비자를 신청 발급받으면 자연스럽게 정착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특히 투자금액과 직업 등을 꼼꼼하게 따지는 여타 선진국과 달리 비교적 융통성 있게 이민을 받아들여 정착하기가 수월한 편이다. 지난해 4월 변경된 남아공 이민법에 따르면 △250만랜드(약 4억원 정도)의 잔고를 증명해야 하며 △시민권자 5명 이상을 고용해야 정착이 가능하다. 이대로라면 제한요건이 상당한 편이지만, 이보다 낮은 규모의 사업계획서를 제출해도 사업허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알선업계의 전언이다. 장동훈 사장은 “1억~2억원선의 투자규모로 사업계획서를 작성, 제출해도 사업 비자를 받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밝히고 “6개월에서 1년 정도 온 가족이 영어연수를 하면서 현지에 알맞은 사업아이템을 물색해 보는 게 유리하다”고 말했다. 또 자영업 비자 신청과 함께 영주권 신청을 할 수 있어 창업아이템을 잘 선택하면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정착이 가능하다.이주자가 늘어나면서 보다 빠른 정착을 위한 지원 서비스도 생겨났다. 라우월드 윤창수 남아공 지사장은 이민자의 공항 마중부터 주택 구입, 차량 구입, 명의이전, 교민사회 인사 등에 이르는 정착 지원 서비스로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보통 15~30일 동안 동행하며 현지 적응을 도와주며, 수수료는 월 200만원선이다.이민 희망자라면 알선업체들이 내놓은 답사 프로그램을 이용해 볼 만하다. 필아프리카는 남아공의 교육문화시설과 한인사회 등을 방문해 구체적인 이민계획을 세우도록 도와주는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남아공유학원도 곧 답사 프로그램과 여행상품을 내놓을 계획이다.한편 남아공을 이민지로 선택하는 이들은 탁월한 자연환경을 첫 번째 매력으로 꼽는다. 프리토리아에 거주하다 학업을 위해 서울에 체류 중인 김소희씨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꼽히는 자연환경과 넓은 국토, 맑은 공기, 선량한 국민들 등 장점이 많다”고 말하고 “중상류층을 차지하는 백인과 대등한 지위를 갖고 있고 아시아와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 사는 데 별 불편함이 없다”고 전했다. 라라 스와르트 주한 남아공대사관 일등서기관도 “자유화 10년이 지나면서 정치적 불안이 해소된데다 쾌적한 환경과 이민자 지원 제도가 살기 좋은 여건을 제공할 것”이라고 자랑했다.초기 이민의 위험성 염두에 둬야실제로 남아공은 케이프타운이 쾌적한 지중해성 기후, 요하네스버그와 프리토리아가 아열대성 기후인데다 사파리와 유럽풍 현대 도시의 면모를 함께 갖춰 세계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또 수영장과 정원을 갖춘 저택이 1억원 정도면 매입할 수 있을 정도로 부동산 값이 낮은 편. 골프와 승마 같은 ‘고급’ 스포츠가 대중화돼 있어 비용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수준 높은 유럽식 교육시스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대학 진학 후 세계 명문대학으로의 유학도 용이한 편이어서 조기유학을 겸한 이민을 염두에 두는 이가 많다.다만 세계 수위를 기록하는 범죄 발생률이 최대 문제점. 김소희씨는 “밤거리나 후미진 곳을 다니는 것은 피해야 한다”며 “크고 작은 범죄에 노출돼 있는 게 사실이지만 주의만 기울이면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다”고 밝혔다.또 한인사회가 태동단계이고 한국인의 사업기반이 다져진 상태가 아니라서 초기 진입에 따르는 ‘위험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는 지적이다.INTERVIEW | 시드니 바파나 쿠베카 주한 남아공 대사“문의전화 감당 못할 정도”“남아공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낍니다. 최근에는 대사관 직원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문의가 쏟아지고 있어요. 남아공은 분명 한국인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될 것입니다.”유쾌한 표정과 말투가 인상적인 시드니 바파나 쿠베카 주한 남아공 대사(52)는 최근 남아공에 쏠린 한국인의 관심이 무척 반가운 모습이다. 그는 “더 이상 인종갈등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은 없다고 봐도 좋다”며 사회적 안정과 경제 전반의 활기를 강조했다.지난 2001년 8월 한국에 취임한 그는 지난 76년부터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이끈 흑인 저항세력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외교부에서 일하며 전세계를 무대로 뛰어왔다. 94년 남아공 민주화 이후 정식 외교관이 돼 인도네시아에 이어 한국에 부임했다.“남아공은 비즈니스 환경이 아주 좋은 나라입니다. ‘아프리카의 성장과 기회를 위한 행동지침(AGOA)’을 활용해 무관세 수출을 할 수 있고, 이중과세를 금지해 기업 이윤의 회수가 자유로워 자본이동이 용이합니다. 시장 개방에 적극적인데다 경제정책이 안정돼 있어 내국인과 동등한 조건으로 사업을 펼 수 있어요.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100% 허용된다는 점도 장점이지요.”요즘 쿠베카 대사는 오는 4월27일 열릴 남아공 자유화 10주년 이벤트 준비에 여념이 없다. 패션을 문화적 관점에서 해석한 ‘컬처 투 쿠튀르(Culture to Couture)’ 쇼와 남아공 푸드 & 와인 축제가 계획돼 있다. ‘더 나은 남아공과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화합’을 주제로 남아공에 대한 인식을 한 단계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이다.“남아공은 환상적인 자연환경을 가졌습니다. 훌륭한 교육시스템을 갖춰 저렴한 비용으로 영어연수 등 공부를 마음껏 할 수도 있어요. 많은 한국인들이 남아공의 매력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그는 최근 열린 2004 서울국제마라톤에서 남아공의 베테랑 마라토너 거트 타이스가 올 시즌 세계 최고기록으로 우승, 대회 2연패에 성공한 것을 크게 기뻐하며 “한국과 남아공이 문화, 스포츠 등을 통해 좀더 친숙해지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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