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공단에서 디지털산업 요람으로

넓고 저렴한 아파트형 공장 매력 … 벤처업체 무더기 입주

‘꿈ㆍ기술ㆍ미래 신산업의 터전.’ 서울 구로동의 한국산업단지공단(KICOX) 사옥 앞에 세워진 기념비에 새겨진 글귀다. 2000년 12월 키콕스가 구로공단의 이름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선포하며 새겨넣었다. 70-8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일군 굴뚝산업의 상징인 이곳을 첨단산업의 요람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선언이었다.변신을 선언한 지 4년이 지난 현재, 구로공단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 낮고 허름한 재래식 공장 대신 수십개의 멋장이 고층빌딩이 들어섰고 푸른색 작업복 대신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특히 벤처업체들이 몰려 있는 1단지의 경우 옛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난해 강남구 논현동에서 이곳으로 이전한 필링크의 김동섭 상무는 “강남지역의 벤처업체들이 무더기로 이전해 오고 있다”며 “명실상부하게 벤처단지로 전환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고 분위기를 전했다.지난 7월 말 현재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입주해 있는 업체는 2,915개로 97년 442개에 비해 6.5배 가량 늘었다. 업체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은 아파트형 공장이 대거 건설됐기 때문이다. 2001년 5개에 불과하던 아파트형 공장은 26곳으로 불어났고 22개가 건설 중이며 18개가 공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년에는 입주업체가 2,000개 이상 더 늘어날 전망이다.외양만 변한 게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굴뚝공단에서 첨단산업단지로 단지의 성격이 180도 달라졌다는 점이다. 예전의 대표업종이던 인쇄, 섬유, 봉제업체들은 거의 떠났고 정보통신기업, 제조 벤처업체, 첨단 기계업체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키콕스의 박상봉 과장은 “현재 첨단산업업체가 전체의 79.7%를 차지한다”며 “당초 계획보다 첨단화율을 2년 이상 앞당겼다”고 말했다.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단기간에 자리를 잡은 데는 공단 재개발에 대한 키콕스의 강력한 의지가 큰 역할을 했다. 키콕스는 97년 ‘산업단지 구조고도화’라는 이름하에 공단의 10개년 재개발 계획을 수립했다. 한때 전국 제조업 수출의 10%를 차지하는 등 ‘한국의 공장’으로 명성을 날리던 구로공단이 90년대 들어 급격히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3D업종에 대한 기피현상, 공장의 해외이주, IMF 외환위기로 인한 경기침체 탓이었다.공단의 부활을 위해 변화는 불가피했다. 선택은 첨단산업단지로의 전환이었다. 마침 산업의 중심이 전통 제조업에서 지식기반산업으로 대이동하면서 벤처붐이 일고 있었던데다 서울에서 유일한 공단이고 지하철 접근이 용이해 재개발사업은 순조로울 듯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벤처기업들이 강남 테헤란밸리로 몰려들 뿐 구로공단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던 것.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번듯한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개발이 본격화된 것은 2000년 키콕스가 구로공단에 키콕스벤처센터를 짓고 벤체업체들을 육성하면서였다. 이 업체들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입주를 희망하는 벤처들이 줄을 이었고 이에 따라 민간 건설업체들이 아파트형 공장들을 하나둘 세우기 시작했다. 분양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무엇보다 평당 300만~400만원선의 저렴한 분양가가 매력적이었다. 이 정도면 테헤란밸리의 사무실을 임대하는 것보다 싸게 ‘내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입주시 취득세, 등록세가 면제되고 분양가의 70%까지 장기 융자해 주는 등 세제 혜택도 다양했다.필링크의 김동섭 상무는 “벤처거품이 빠지면서 높은 임대료가 강남지역 벤처업체들의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며 “새로 들어선 아파트형 공장은 테헤란밸리의 건물보다 깨끗하고 쾌적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하고 관리비도 강남에 비해 10% 정도에 불과해 기업의 비용절감 측면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고 말한다.조건이 좋다고 아무 업체나 입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키콕스는 공단의 첨단화를 위해 입주 기업의 자격을 첨단 지식사업체로 제한했다. 기존 전통산업 기업은 업종 전환을 유도하거나 이전을 권유했다. 공장을 이전하거나 매각하는 기업은 양도소득세를 감면해 주었다.첨단산업체가 밀집하면서 공단의 매력은 더욱 높아졌다. 관련업체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연구개발, 아웃소싱 등 업무협력이 손쉬워졌기 때문이다. 디지털영상저장장치(DVR) 전문업체인 코디콤의 원재홍 과장은 “이 지역에 국내 대표적인 DVR업체 7곳이 몰려있다”며 “제조 형태가 유사해 시너지 효과가 높다”고 말했다.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입주업체들은 공단의 환경이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수준이지만 단기간의 급격한 변화를 거친 탓인지 개선해야 할 부분이 적잖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교통문제가 심각하다는 불평이 높다. 입주업체와 종사자수가 과거에 비해 몇 배나 늘었지만 길은 옛날 그대로라는 것.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교통체증이 엄청나다. 평상시 신호 한 번에 통과할 교차로에서 20~30분 대기하는 것이 보통일 정도다.식당, 병원, 문화공간 등 편의시설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공단지역이어서 상가건물이 허가되지 않기 때문이다. 건물 전체의 3분의 1 이하를 편의시설로 이용할 수 있지만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는 것. 회식을 위해서 인근 광명시로 넘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코디콤의 원재홍 과장은 “병원에 가려면 차를 타고 영등포나 광명시까지 가야 한다”며 “식당도 적어 입맛에 맞지 않아도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키콕스도 입주업체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공단이 한창 변화과정에 있으며 개발이 완료되면 사정이 한층 개선될 것이란 설명이다.키콕스의 박상봉 과장은 “아파트형 공장의 경우 주변 5m를 공단에 기증하는 것이 허가조건이어서 양쪽에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서면 왕복 4차선의 도로가 생기는 효과가 있다”며 “아파트형 공장건설의 증가에 따라 편의시설도 확충될 것”이라고 말했다.INTERVIEW 이기돈 야호커뮤니케이션 사장‘새 술은 새 부대에’… 제2창업 선언야호커뮤니케이션의 이기돈 사장의 출근시간이 부쩍 일러졌다. 지난 2월 청담동에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회사를 이전했기 때문이다. 청담동 시절에는 15분이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1시간 정도 소요된다. 하지만 이사장은 전혀 불만이 없다. 오히려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만족스럽다.“무엇보다 싸잖아요. 청담동 시절보다 공간이 2배 이상 넓어졌지만 비용은 오히려 줄었습니다. 여유공간에 당구장, 수면실, 카페테리아를 만들었습니다.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습니다.”‘남의집살이’의 설움도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다. 보증금 7억원, 월세 700만원의 임대생활에서 430평의 ‘내집’을 분양받았기 때문이다.“청담동 시절엔 여름이 무서웠어요. 오후 6시면 관리실에서 에어컨을 껐거든요. 이제는 이런 불편이 전혀 없습니다. 입주하면서 중앙냉난방 공사를 한 덕분이지요.”회사 이전과 함께 이사장의 업무스타일도 바뀌었다. 전에는 약속을 띄엄띄엄 잡았지만 요즘에는 오전이나 오후로 몰아서 잡는다. 강남에 비해 외져 들고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하철이 잘 발달돼 있어 직원들의 업무에는 지장이 없다고 이사장은 덧붙였다. 지하철 1, 2, 7호선이 근방에 있어 SK텔레콤, KTF 등 주 거래업체로 이동하는 데 불편이 전혀 없다는 설명이다.“이 지역에 대한 문의를 많이 받는데 적극 추천하는 편입니다. 다만 지하철 이외의 교통인프라는 낙후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역에서 근접한 건물에 입주해야 유리하다고 조언하지요. 도보로 2~3분 정도 거리면 무난하다고 봅니다.”구로동 시대를 맞아 야호커뮤니케이션은 대변신을 꿈꾸고 있다. 무선인터넷 콘텐츠업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정보통신 장비와 솔루션 개발 등 사업다각화에 나선 것이다. 9월 초에 이미 스토리지 등 관련제품을 내놓았다.“이제 시작이지만 조짐이 좋습니다. 주위의 평가가 긍정적이거든요.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만큼 새로운 각오로 열심히 뛸 각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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