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직 알바에서 ‘사장님’ 되기까지

정진구 CJ 식품서비스군 대표도 세븐일레븐 점원생활…알바 성공 다룬 서적 인기

80년대에 개봉돼 흥행 대성공을 이룬 영화 ‘칵테일’. 주인공 브라이언(톰 크루즈 분)은 사회에 나오자마자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이유로 뉴욕의 모든 회사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만다. 좌절감을 맛본 브라이언은 낮에는 대학을 다니며 밤에는 바텐더로 일을 한다.자메이카로 건너가 칵테일 바를 창업할 자금 마련에 분주하던 영화 속 그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과 닮아 있다. 바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업종에서 창업을 원한다는 부분이다.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층이 늘면서 아르바이트 속에서 비전을 찾는 사람 또한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최근 구직자 세 명 가운데 한 명 꼴로 취업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청년실업난이 나날이 심각해지면서 정규직을 얻지 못하자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리는 청년층이 늘어났기 때문이다.구체적으로 지난 7월19일부터 8월6일까지 인터넷 취업포털 잡링크(www.joblink.co.kr)는 3개월 이상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 회원 1,38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현재 취업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 33.5%(463명)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취업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62.4%(289명)가 ‘심각한 취업난을 피하기 위해’라고 답해 청년실업란의 실태를 보여줬다.또 구직자 921명을 대상으로 ‘구직활동이 계속 장기화(1년 이상)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아르바이트를 하겠다’는 답이 35.6%(328명)로 가장 많아 취업 대신 아르바이트를 선택할 구직자들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이 결과를 놓고 “남 얘기가 아니다”며 우울함을 감출 수 없던 아르바이트생들이 많았을 것이다. 대다수의 취업전문가들은 ‘2~3년간의 아르바이트가 계속되면 나이 제한 등으로 취업이 더욱 어렵게 될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내리고 있으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그렇지만 옛말 가운데 틀린 게 없다고 ‘고생 끝에 낙을 찾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최근 들어 부각되고 있다. 는 책을 내 화제의 작가 반열에 오른 조인호씨는 평범한 성공방정식을 뒤집었다.공사판 인부부터 신문배달원, 세차장 세차원, 청소부, 이삿짐센터 도우미, 뷔페음식점 종업원, 동사무소 사무보조원, 실내낚시터 보조원, 학원강사, 전단지 배포원 등 온갖 아르바이트에 20대를 바쳤다. 그 결과 12억원을 모아 청년 자산가가 된 그는 비정규직의 성공신화를 보여줬다.아르바이트로 시작해 CEO까지 오른 사람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스타벅스코리아 대표이사를 거쳐 CJ그룹 식품서비스군 총괄 대표이사에 오른 정진구 대표가 대표적이다. 군대를 갓 제대한 후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간 정대표는 세븐일레븐의 말단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시간이 날 때마다 유통과 외식업에 대해 공부한 그는 세븐일레븐에서 10년간 일하며 지역 매니저에 올랐다. 1985년 배스킨라빈스로부터 전문경영인 제의를 받은 후 9년 동안 배스킨라빈스 한국지사의 전무이자 경영총책을 맡았다.그후 5년간 파파이스 아시아 지사장으로도 근무했고, 99년부터는 스타벅스코리아의 전문경영인으로 일하며 스타벅스 뿌리를 한국에 내리는 공로를 세웠다. 유통업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밑바닥부터 시작했던 그였기에 업계 생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정대표처럼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사장이 된 사람들의 인생 스토리를 통해 우리 시대의 고정관념을 깨보는 건 어떨까.내레이터 모델 인력관리회사를 차린 장지연 SD기획 대표이사는 우연히 내레이터 모델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경우다. 우연이 필연이 돼 내레이터 모델 인력관리 매니저 업무에서 큰 매력을 느꼈고 매니저로 뛰며 창업을 결심했다.전략적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신촌에 ‘리틀 캘리포니아’라는 롤 전문점을 차린 김형준 대표는 창업 전 ‘돈보다 일을 배우겠다’는 신념으로 롤 음식점에서 일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에 롤 음식점 사장에게 본인의 의사를 떳떳하게 밝혔을 정도.칵테일이 좋아 학원을 다니며 바텐더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박재우 ‘파티를 만드는 사람들’ 대표이사는 인내와 열정을 기반으로 한 단계씩 밟고 올라선 케이스다. 칵테일은 오로지 3종류, 메뉴에 있는 칵테일조차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 변두리 레스토랑부터 시작해 호텔 칵테일바의 바텐더를 거쳤다.그후 TGI프라이데이스 바텐더로 일하며 칵테일 전문체인 창업을 마음속 깊이 품어온 그는 오래전 꿈을 이뤄내고 만다. 97년 ‘더 플레어’를 만들어 중국까지 진출했다.김갑태 한솔창업컨설팅 소장은 “창업 전에는 철저한 준비와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며 “창업강좌 혹은 창업서적을 두루 섭렵하는 노력과 함께 본사 방문과 시장조사 또한 중요하다”고 말해다. 그는 이어 “시장조사 방법 중 아르바이트만큼 직접 체험해 보는 기회도 드물다”며 “아르바이트로 해당 업종을 접한 사람은 업무 노하우뿐만 아니라 고용한 직원의 심리까지도 잘 파악한다”고 덧붙였다.아르바이트로 사장이 된 사람들은 처음부터 창업 성공 지름길에 서 있던 셈이다.이효정 기자 jenny@kbizweek.com박재우 ‘파티를 만드는 사람들’ 대표이사다방 알바서 100억 매출 사장 변신15년 전 바텐더가 되고 싶어 대학진학도 외면했던 한 19살 청년이 칵테일학원에서 소개해 준 레스토랑으로 첫 출근을 했다. ‘멋진 칵테일 쇼를 보여주는 인기 바텐더가 되리라’며 포부가 대단했지만 정작 그가 한 일은 물 끓여 커피나 칡차를 타는 일이 전부였다. 간판만 레스토랑이었지 사실은 변두리 다방이나 다름없었던 것. 그래도 첫 월급 18만원은 더없이 소중했다.그때 그 청년은 지금 칵테일 전문 바(Bar)를 운영하며 연간 1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사장님이 됐다. 박재우 파티를 만드는 사람들 사장(34)은 ‘더 플레어’라는 브랜드로 서울 수도권에 19개 바를 운영하면서 130여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직원 가운데 90%가 바텐더일 정도로 탁월한 전문성을 자랑한다. 2년 전에는 프랑스 주류회사 페르노리카와 합작으로 중국 베이징 중심가에 매장을 내기도 했다. 술집 체인점이 해외로 진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룬 이 같은 성취는 박사장도 예상치 못한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 나오는 기품 있는 바텐더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을 뿐이었는데, 그 목표에 열정을 집중시키다 보니 사업적 성공이 뒤 따르더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보잘것없는 다방 아르바이트를 견뎌내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박사장이 정식 바텐더로 본격적인 나래를 편 것은 92년 패밀리레스토랑 TGI프라이데이스에 입사하면서부터다. 94년 아시아 대표로 뽑혀 런던 세계 바텐더 챔피언십에 출전, 3위를 차지했고 97년에는 1위를 거머쥐었다. 바텐더로서 최고 명성을 차지한 것은 물론 지금의 더 플레어를 일구는 바탕이 됐다. 이를 계기로 ‘바텐더 킹’이 된 건 말할 것도 없다.97년엔 동료 바텐더 10명과 함께 T칵테일전문점 영업권을 6,000만원에 인수, 더 플레어로 상호를 바꾸고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매장을 확대하는 한편 2000년에는 바텐더 양성학원까지 만들었다. 이제 더 플레어를 운영하는 파티를 만드는 사람들은 자본금 14억원 규모의 어엿한 기업의 모습을 갖췄다. 더불어 초봉 18만원짜리 아르바이트생은 억대 연봉 사장으로 지위가 확 바뀌었다.사업 도중 어려운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알콜 칵테일전문점을 런칭하려다 시기를 놓쳐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박사장은 “실패를 통해 사업의 시기와 의사결정 중요성에 대해 알게 됐다”면서 “경험이 약”이라며 활짝 웃는다.최근 박사장은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서울 이대 앞에 라면전문점을 열었다. 반응이 좋아 단계적으로 매장수를 늘릴 계획이다. 그러나 매달 더 플레어 매장을 돌면서 여전히 현역 바텐더로도 뛰고 있다.“앞으로는 사업적으로 성공한 경영자라는 평을 받고 싶습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경영의 맥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거든요. 그래도 변하지 않는 제 꿈은 평생 칵테일과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장지연 SD기획 대표이사내레이터 모델에서 인력관리 사장으로“우연히 시작한 내레이터 모델 아르바이트가 인생을 바꿨습니다.”장지연 SD기획 사장은 애당초 내레이터 모델 업계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장사장의 삶을 바꿔버린 사건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수년전 어느 날 내레이터 모델 에이전시를 경영하던 지인이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당일 나오기로 돼 있던 내레이터 모델이 펑크를 내자 하루만 ‘대타’로 일해 줄 수 있느냐고 제의했던 것. 영업이라곤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던 장사장은 대타로 일한 이날 지역 판매 1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천성이 활달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던 장사장은 학창시절부터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긴 했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 소질을 발휘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그후 내레이터 모델 아르바이트를 몇 달 더 하게 됐습니다. 일을 하다 보니 오히려 인력을 관리하는 ‘매니저’ 업무에 끌리더군요.”변화를 즐기는 장사장의 적성과 내레이터 모델 관리업무는 맞춤옷처럼 딱 맞았다. 이동통신사와 할인점, 화장품업계, 명동과 동대문의 쇼핑몰, 자동차 생산업체 등 내레이터 모델을 필요로 하는 업체는 무궁무진하다. 각 업계별 고객 특성도 모두 달라서 다채로운 색깔의 사람을 대하는 게 큰 매력이다.처음부터 장사장은 에이전시에 소속된 매니저가 아닌 ‘프리 매니저’(Free Manager)로 일했다. 창업이라는 비전을 세워놓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기로 머릿속에 그렸던 것. 사업자등록을 한 상태에서 1인 기업가로 시작한 장사장은 고객들로부터 ‘꼼꼼하고 일 잘하는 매니저’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내레이터 모델 파견 비즈니스는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업계의 특성과 사람들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인적 네트워크와 노하우가 없으면 시작할 수 없는 일이지요.”결국 지난 2000년 장사장은 내레이터 모델 파견 에이전시인 SD(Say Doumi)기획을 세웠다. 아르바이트와 매니저 일을 하며 모은 돈을 자본금으로 삼았다. 서울 신림동에 사무실을 두고 10여명의 직원과 사세를 키워나간 장사장은 보광 훼미리마트를 비롯해 다양한 프랜차이즈와 제휴를 맺기에 이르렀다. 회사 창립 당시부터 업계에서는 드물었던 온라인 인력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SD기획의 홈페이지에 들어온 고객은 4,000명의 내레이터 모델을 조건에 맞게 검색해 고용할 수 있어요. 내레이터 모델의 키와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는 물론 내레이션, 댄스, 진행 및 MC, 판매 등 주특기 위주로 검색할 수도 있습니다.”인력파견 업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벤트 공연팀 또한 고용하고 있다. 내레이터 모델 중 춤실력과 외모를 두루 갖춘 전천후 팔방미인은 찾기 쉽지 않다는 점에 착안, 이들을 스스로 길러내기로 결심했다. “행사장 앞에서 춤추는 내레이터 모델이 생겨날 즈음이었죠. 보다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행사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봤어요.”일단 비주얼이 뛰어난 내레이터 모델들을 뽑아 재즈학원에 보내 스트레칭부터 가르쳤다. 이른바 ‘몸치’였던 이들은 1년여의 준비과정을 통해 화려한 공연단 ‘맥스’로 변했다. 장사장이 키워낸 댄스 내레이터 모델들은 명동 밀리오레와 동대문 AMPM 등에서 공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다음 카페에 1만명의 팬까지 거느릴 정도.“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최고의 시너지를 내게 한 것이죠. 인력을 하나의 상품인 공연단으로 만들어내는 1년여의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 공개하기도 했습니다.”6개월 전에는 아예 서울예전 출신의 뮤지컬 퍼포먼스팀 ‘테르프’를 창단했다. 댄스에 극적 요소를 넣어 기승전결로 이뤄진 춤과 연기로 각종 이벤트 현장을 압도한다.“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게 매니지먼트의 핵심입니다. 공연기획도 연장선상이에요. 앞으로 인력관리뿐만 아니라 이벤트 공연기획 비중을 늘릴 계획입니다.”대표이사 직함을 달았지만 홈페이지 관리부터 인력파견, 공연단 교육 등 모든 실무를 직접 도맡은 장사장. 행사가 끝난 밤늦게 퇴근하고 주말도 없이 일할 때도 많지만 전혀 힘들어 하지 않는다.“일하는 것을 워낙 즐겨요. 사람 만나는 게 좋으니 영업에 대한 중압감도 특별히 없습니다. 이 세계에 발 들여놓은 게 큰 행운이에요.”이효정 기자 jenny@kbizweek.com김형준 리틀캘리포니아 대표바닥 경험 밑천삼아 외식업체 차려김형준씨. 올해 28세로 외식업체 공동대표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명함에는 기획실장으로 표기했다. 좌우명은 원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는 것. 실제로 대학도 그만두고, 미국유학도 포기했다. 유명 레스토랑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위장취업(?)해 실전경험을 익히기도 했다.꿈도 거창하다. 세계적 외식업체 사장이 목표다. 지난 6월 첫걸음을 내디뎠다.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역 맞은편에 ‘리틀 캘리포니아’라는 롤 전문점을 연 것이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통해 국내에 300개의 매장을 여는 것이 목표니, 이제 300분의 1을 달성한 셈이다.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성공전략이 깨알처럼 빼곡히 들어 있다. 의욕도 충천하다. 기자의 물음에 답할 때마다 사과씨처럼 작고 까만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그렇다.그가 미국유학을 떠난 것은 2000년 3월. 당시 유학은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성격이 짙었다. 군을 갓 제대했으니 대학에 돌아가는 것이 순리였으나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적성에도 맞지 않은 학과(전기공학)를 계속 다닌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막상 학교를 그만두자니 부모님의 실망스러운 얼굴이 어른거렸다. 이에 그저 영어공부나 하고 세상물정이나 더 배워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오른 유학길이었다.평소에 사람 만나기를 즐기는 그는 미국에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사귀었을뿐더러 직접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비를 마련하면서 다양한 레스토랑의 음식과 서비스를 경험하게 된다. 이때 한국인 프랜차이즈 사업가를 만나 함께 ‘코리아카페’라는 한국음식점을 준비하며, 레스토랑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매장까지 임대해 놓은 상황에서 투자자와 관계가 뒤틀려 무산이 돼 버렸다. 그의 말대로라면 5개월간 거의 폐인생활을 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프랜차이즈 사업이야말로 바로 내가 할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3년 3월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서 발판을 마련,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자는 생각이었다. 먼저 식당에서 밑바닥 일부터 하기로 했다.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의 한 한식 퓨전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전 10시에서 오후 10시까지 12시간을 꼬박 일했다. 주말에는 음식연구에 매달렸다. 우리 음식과 궁합이 맞는 외국 소스를 찾는 작업이었다. 3개월간 아르바이트를 한 그는 인근의 롤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면접 자리에서 그는 “난 돈을 벌려 온 게 아니라 프랜차이즈 사업을 배우려 왔다”며 즉석에서 “테이크아웃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레스토랑 사장은 실제로 테이크아웃을 시작했고 매출은 곱절로 뛰었다.사장의 신임을 전적으로 얻었지만 그는 석달 만에 ‘오너에게 더 배울 게 없다’는 생각에 다시 뛰쳐나왔다. 그리고 지금 함께 사업을 하는 박성호 본부장을 만나 직접 창업에 나섰다. 박본부장은 미국에서 스시아카데미를 다녔을 정도로 음식에 일가견이 있었다.어려움도 적잖게 겪었다. 올 초에는 인천시 극장가에서 5평을 분양받았으나 알고 보니 사기였다. 체격이 왜소한데다 나이가 어려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과정도 남들보다 힘들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를 통해 만났던,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아르바이트 당시의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르바이트 생활이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이외에 그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서비스와 시스템 관리를 배웠다고 한다. 가령 서비스의 경우 손님들의 취향에 따라 원하는 게 뭔지 분명하게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롤뿐만 아니라 여러 프랜차이즈 아이템을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켜봐주세요. 롤이 김밥만큼이나 대중적인 음식으로 바뀔 겁니다. 그 다음에 세계로 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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