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홍기 휘날리며… 전국 곳곳 중국 바람

와인 애호가인 직장인 임경호씨(34)는 최근 소원을 성취했다. 와인냉장고를 갖고 싶었던 임씨는 그동안 100만~300원대의 가격표를 보며 선뜻 지갑을 열 수 없었다. 그러던 임씨는 50만원대의 와인냉장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즉시 카드를 꺼냈다. 와인냉장고에는 ‘Haier’이라는 로고가 부착돼 있었다.이 브랜드는 ‘하이얼’로 중국 내 가전시장 30%를 점유한 중국 굴지의 가전업체다. 지난해 10조8,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백색가전 부문 세계 5위권에 든 하이얼은 지난 1984년 설립됐다. 전세계 160여개국에 연간 13억달러의 물량을 수출하며 1만3,000여종의 제품을 생산한다. 이 회사는 지난 5월 한국에 공식법인 ‘하이얼코리아’를 출범시키며 한국 비즈니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연락사무소 형태로 유지하며 제품을 수출하던 전략을 바꿔 한국시장에 직접 법인을 내고 한국 소비자 잡기에 본격 나섰다. 일단은 자본금 3억원에 직원수 10여명의 작은 사무실로 한국법인을 시작했지만 의욕은 넘친다. 하이얼코리아 관계자는 “한국 가전유통시장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말했다.오성홍기를 단 중국기업이 한국으로 밀려들고 있다. 한국기업만 중국 대륙에서 비즈니스를 펼치는 시대는 지났다. 중국회사들 역시 한국을 기회의 땅으로 여기며 호시탐탐 진출 시점을 노리고 있다.산업자원부가 지난 7월 발간한 ‘외국인투자기업현황’에 따르면 2004년 3월 말까지 한국에 진출한 중국기업은 총 3,197개다. 이들 기업이 실제로 신고한 투자금액을 합하면 5억1,831만9,000달러에 이른다.한국에 투자한 미국기업(3,068개)보다도 많다. 다만 투자금액은 아직 미미하다. 미국기업(207억3,782만달러)의 41분의 1 수준이다. 국내에서 사업을 펼치는 중국기업의 수는 많지만 규모는 크지 않다는 얘기다.산자부 투자진흥과 통계관리 담당자인 민경미 주무관은 “한국 내 영업 중인 중국기업 가운데는 소규모 무역업체가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3,197개의 중국기업의 산업별 분포를 살펴보면 농ㆍ축ㆍ수산업 및 광업 관련 업체가 19개, 제조업 226개, 서비스산업 2,956개, 전기ㆍ가스ㆍ수도ㆍ건설 26개. 서비스산업군에서도 도소매(유통) 관련 업체가 2,570개다.지난 2001년 설립된 주한 중국상공회의소에 등록된 중국기업들을 살펴봐도 산자부 자료와 유사한 결과를 읽을 수 있다. 주한 중국상공회의소에는 총 50개의 기업ㆍ단체가 등록돼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와 투자금액을 갖춘 기업만이 가입할 수 있어서 아직까지 회원 기업이 많지는 않다. 50개 기업 중 17개가 무역회사다.BOE하이디스 영업이익 1000억원 올려그렇다면 중국기업의 한국 진입은 과연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인가.전문가들은 대부분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주한 중국상공회의소 회원기업인 중국은행(Bank of China)의 황덕 안산 지점장은 “중국상공회의소에 가입한 기업 중 BOE하이디스(BOE-HYDIS)가 가장 큰 규모”라고 말했다. BOE하이디스는 지난해 1월22일 중국 전자제품 제조업체 BOE테크놀로지그룹이 하이닉스반도체의 자회사인 하이디스로부터 TFT-LCD사업부를 3억8,000만달러에 인수하면서 설립됐다. 그후 BOE하이디스는 2003년 영업이익 1,000억원을 기록하며 지난 96년 하이닉스 시절 LCD를 본격 생산한 후 최고의 실적을 거둬 주위를 놀라게 했다.앞서 언급한 하이얼코리아는 일부 백화점과 할인점에 와인냉장고를 공급하며 국내업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장을 공략해 왔다. 하이얼 와인냉장고를 판매하는 딜러 세브도르코리아의 김주옹씨는 “하이얼의 와인냉장고 제품은 반응이 좋다”며 “유럽제품의 5분의 1 가격”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와인냉장고를 내놓으며 시장을 살피던 하이얼코리아는 곧 2~3kg대의 소형세탁기를 내놓을 계획이다. 또 9월 중에는 소형냉장고도 판매할 예정. LG홈쇼핑 등 TV홈쇼핑과 손잡았던 하이얼은 제품 공급선 확대에도 힘쓰고 있다.중국의 유수 TV 생산업체인 TCL의 제품 또한 올해 초 한국시장에 상륙했다. 지난 2월부터 한국까르푸를 통해 ‘유니크로’(UNIKRO) 브랜드의 29인치 평면TV를 선보이고 있다. TCL은 중국 내수시장에서 약 800만대, 해외시장에서 350만∼400만대를 생산하며 중국 내수시장에서 22%의 점유율을 보이는 업체다. 소니, 삼성전자와 함께 최대 TV 생산업체로 부상하며 지난해 11월에는 프랑스 톰슨사의 TV사업부를 인수하기도 했다.쌍용차의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중국 상하이자동차(SAIC)의 행보도 주목된다. 상하이자동차는 지난 7월27일 채권단과 매각협상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매각대금은 총 5억달러(주당 1만원) 수준일 것으로 알려졌으며 오는 9월 말까지 본계약을 체결하고 10월 말까지 매각절차를 완료할 예정이다.중국 내수시장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해도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아직 낯선 중국 기업이 많다. 박영렬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중국기업이 한국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한국 소비자의 중국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조언했다.INTERVIEW 왕리쥔 주한 중국상공회의소 회장·중국은행 서울 지점장한국투자 중국기업 증가 추세지난해 8월부터 중국은행(Bank of China) 서울지점을 총괄해 온 왕리쥔 지점장은 주한 중국상공회의소 회장직도 맡고 있다. 지난 5월 주한 중국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선발된 그는 “한국에 투자하는 중국기업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2001년 설립된 주한 중국상공회의소에 가입된 기업과 단체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50개. 2~3명 직원을 지닌 소형업체부터 2,000~3,000명의 직원을 보유한 대기업까지 다양하다. 한국 소비자에게 알려진 기업은 주로 항공사와 은행 등 금융기관이다. 왕회장은 “중국국제항공(Air China)과 중국남방항공, 중국동방항공 등 항공사는 중국으로 건너가는 한국인이 탑승하는 경우가 많아 한국 소비자에게 알려진 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 들어온 중국은행은 총 3개. 이중 중국은행은 유동인구가 풍부한 서울 종로 영풍빌딩 1층에 자리잡아 한국인의 눈에 로고가 낯설지 않다. 이외에 중국공상은행과 중국건설은행이 한국에 둥지를 틀고 있다.중국은행의 경우 기업금융과 소비자금융 두 부문을 모두 중시한다. 기업금융 고객으로는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한 LG화학, LG전자,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GM대우자동차 등이다.소비자금융 부문은 중국인 학생과 주재원, 노동자 등을 상대로 영업한다. 중국은행 본사에서도 한국지사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왕회장은 “중국은행은 전세계 지사를 4급으로 나눴다”며 “1급은 런던, 뉴욕, 도쿄 지사이며 2급은 파리, 프랑크푸르트 지사 등인데 서울은 2급에 포함된다”고 말하며 중국은행 내 서울지사의 비중을 강조했다. 왕회장은 이어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탈바꿈해 가는 중국보다 시장경제의 길을 탄탄히 걸어온 한국의 비즈니스 환경이 우수하다”며 “한국은행, 우리은행, 외환은행, 하나은행 등 한국의 대다수 은행은 모두 벤치마킹 대상이 된다”고 덧붙였다. 현재 국영기업인 중국은행은 오는 9월 민영화 작업을 거쳐 상장될 예정이다. 왕회장은 “국영기업 특성상 시장경제 체제에서 유연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며 “그러나 중국의 성장력을 감안하면 앞으로 다른 국가의 은행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고 본다”고 자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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