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이라고요? 엄연한 패션이죠

고객 인터넷 투표로 디자인 선택…원조 메이커는 ‘골머리’

1980년대 10대들에게 나이키는 꿈이었다. 그리고 이 브랜드 운동화에 대한 열망은 ‘나이스’라는 소위 ‘짝퉁’ 브랜드를 낳았다. 그들에게 나이키는 꿈이지만 나이스는 수치심이었다. 80년대를 그린 한국영화에서 나이스운동화는 종종 이 같은 상징적 의미로 등장한다.2004년의 10대들에게 나이스는 즐거움이지만 나이키는 평범함이다. 모방이 아닌 의도적 연출로서 나이스는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다. 누구나 입을 수 있는 브랜드 대신 그 브랜드를 한번 비틀어본 ‘패러디’를 기꺼이 몸에 걸친다.최근 10~20대 젊은층 소비자를 중심으로 패러디티셔츠가 인기를 얻고 있다. 올해 초 등장한 이 상품은 반 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젊은층에 꾸준히 사랑받는 아이템이 되고 있다.패러디는 지금 우리사회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중요한 사회코드다. 정치권을 뒤흔들던 패러디가 이제 비즈니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패러디티셔츠 유행현상을 통해 네티즌으로 대표되는 젊은 소비자들의 새로운 소비패턴을 짚어봤다.푸마? No! 파마? Yes!패러디티셔츠의 대표적 사례는 파마(PAMA)라는 로고가 새겨진 제품이다. 가장 많이 패러디되고 있는 독일 스포츠브랜드 푸마(PUMA)를 살짝 바꾼 것이다. 푸마 티셔츠 제품은 가슴 전면에 브랜드명이 크게 씌어져 있다. 여기에 푸마 한 마리가 글씨 위를 뛰어넘는 모습을 갖춘 게 이 회사 제품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파마티셔츠는 이 푸마의 머리를 파마머리, 즉 곱슬머리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이 네티즌이 패러디티셔츠를 유희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오리지널 제품을 살짝 비튼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냄으로써 희열을 느낀다.푸마가 당구치는 모습이 담겨 있으면 다마(DAMA),머리를 삐죽삐죽 세웠으면 펑크(PUNK), 푸마 대신 참치가 뛰는 그림이면 튜나(TUNA)가 각각 이들 제품의 새로운 브랜드가 된다. 쿠마(KUMA)는 일본어로 곰을 뜻한다. 푸마 대신 곰이 뛰는 모습이 들어 있다.또 다른 사례는 제일모직의 빈폴(BEAN-POLE)브랜드를 패러디한 빈곤(BEAN-GONE)티셔츠다. 빈폴은 한때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는 카피를 광고에 활용했다. 자전거가 브랜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빈곤은 이 자전거를 타고 있는 형상을 정말로 ‘빈곤하게’ 만들었다. 이 제품을 판매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적혀 있는 설명은 ‘그의 구루마가 내 가슴 속에 들어왔다’. 자전거 대신 손수레를 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이탈리아의 스포츠브랜드 카파(KAPPA)도 패러디의 대상. 패러디티셔츠를 판매하는 티공구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오빠나빠(OPPA NAPPA)는 남녀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그림에다 남자의 입에 담배를 물려놓았다.이밖에도 프라다(PRADA)는 구라다(9RADA)로, 아디다스(adidas)는 디디바오(didibao)로 변형된 제품이 나와 있다.이 같은 제품들은 주로 인터넷을 통해 팔린다. 티공구를 비롯한 10여개의 패러디티셔츠 판매사이트가 있다. 인터넷 경매사이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대문, 남대문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의류상가에서도 판매된다. 단순히 유행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이미 유통경로가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돼 있다. 특히 전문적으로 패러디의류를 판매하는 인터넷상점들은 디자인 전공자들이 직접 디자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패러디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것이 디지털패러디라는 형식을 타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 즉 전문예술가집단이 나서면서 틈새시장을 공략해 가고 있는 것이다.왜 패러디인가패러디티셔츠가 인기를 얻고 있는 데는 여러가지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개성을 중시하는 신세대 소비자들의 다양한 기호를 기존의 브랜드 제품들이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얼마 전 ‘빈곤’과 ‘솔로’(네티즌 사이에 유행한 솔로부대, 즉 싱글족을 형상화한 디자인으로 커플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문구가 들어있다) 제품을 구입했다는 고등학생 김석하군(18)은 “브랜드 제품은 누구나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차별화된 맛이 없다”면서 “티셔츠 한 벌에 10만원을 호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또 “함께 어울리는 무리 중 한 친구가 빈곤티셔츠를 입은 것을 보고 구매하기로 했다”면서 “재미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김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세대 또래집단의 문화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도 패러디티셔츠의 인기 배경이 된다. 이 제품을 판매하는 대부분의 인터넷상점은 고객이 디자인을 게시판에 올리면 이를 투표에 부쳐 제품화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내가 만든 디자인을 같이 입자’는 의미가 담긴 셈이다. 이들 중 한 업체에 따르면 패러디티셔츠가 가장 많이 팔린 시기는 지난 5월과 6월이다. 이때는 각 학교에서 체육대회, 축제 등 과외활동 행사가 집중적으로 벌어지는 시기로 ‘반티셔츠’로 구매한 소비자가 많았다는 설명이다. 20대의 경우 역시 커플티셔츠나 학과티셔츠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얼마 전 패러디티셔츠 구매를 심각하게 고려했다는 직장인 이화수씨(28)는 “커플티셔츠로 입으려고 파마 제품을 사려고 했는데 남자친구가 반대해서 그만뒀다”면서 “디자인이 나름대로 투표를 거친 검증된 것이라는 점에서 재미있으면서도 예쁜 것 같다”고 말했다.각 티셔츠의 디자인은 인기투표에 들어가기에 앞서 ‘리플’ 과정을 거친다. 게시판에 올라온 디자인 아이디어 중 ‘리플’ 또는 ‘댓글’이라고 하는 다른 네티즌 의견이 많이 붙는 아이템이 투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의견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슈가 된다는 의미다. 리플은 네티즌의 또 하나의 문화로서 최근 기업의 마케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네티즌 고유의 활동이다. 인터넷쇼핑몰에서 판매되는 상품의 경우 다른 소비자들의 의견은 구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따라서 리플이나 댓글을 마케팅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케이스가 나타나기도 한다. LG홈쇼핑의 인터넷쇼핑몰 LG이숍의 경우 지식프렌즈라는 이름의 프로모션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해당 상품을 구매한 고객이 동일 상품을 사려고 하는 신규고객의 질문에 답변을 달아주면 이를 포인트로 적립해 주는 방식이다. 신진호 LG홈쇼핑 과장은 “이슈가 되는 상품에 리플이 많이 달리게 마련”이라면서 “인터넷쇼핑몰은 제품수가 많다 보니 소비자들이 정보가 많은 제품을 발견했을 때 구매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따라서 쇼핑몰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정보까지 기존 소비자들이 해결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디카족’도 패러디티셔츠 유행에 빼놓을 수 없는 일등공신이다. 디지털카메라 보급이 확산되면서 네티즌 한사람 한사람이 기자와 다름없는 역할을 하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일명 디카족의 활동으로 인해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시시각각 인터넷을 통해 중계되고 있다. 패러디티셔츠 역시 인터넷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오리지널 메이커 고민패러디 자체는 최근의 일이 아니다. 패러디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시인 히포낙스가 제임스 조이스의 를 풍자한 것을 패러디의 시초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어원적 뿌리를 보면 ‘대조적인 노래’(Counter-song)를 의미하는 희랍어 ‘Paradia’에서 비롯됐다. ‘para’에는 ‘~에 반대하여’ 또는 ‘~이외에’, ‘~에 빗대어’라는 뜻이 들어 있다.따라서 원작을 풍자하는 문학과 음악 분야의 하나의 표현기법으로서 꾸준히 활용돼 왔다. 이것이 현재의 디지털패러디로까지 발전된 것이다. 결국 패러디는 노골적으로 비꼬는 일종의 ‘공인된 일탈’로서 특정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투영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여기에 풍자 대상이 되고 있는 오리지널 메이커들의 고민이 있다. 패러디티셔츠의 대상이 되고 있는 브랜드 중 푸마와 빈폴은 가장 흔하게 디자인 변형의 소재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 업체들은 이것이 모방이 아닌 패러디인 이상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하지는 못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게 이들의 반응이다. 다만 이런 제품들이 자사 브랜드의 명예를 실추시켰을 경우 문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푸마코리아측은 “현재 본사와 패러디티셔츠 유행 현상을 놓고 대책을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또 빈폴 관계자는 “패러디니까 그냥 웃어넘길 뿐”이라면서도 “이런 일에 대해 논란이 이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혀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패러디를 활용한 제품이 오래전부터 등장했던 해외에서도 오리지널 브랜드의 명예실추 문제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독일, 일본이 대표적 사례로 꼽히며 미국은 이미 하나의 브랜드 비즈니스로 발전한 대학브랜드 티셔츠를 패러디한 제품이 인기다. 예컨대 다른 대학 스포츠팀을 조롱하는 문구를 담은 티셔츠를 제작해 판매하기도 한다. 이 제품에 대해서도 역시 상표권 위반 논쟁이 분분하다.이처럼 ‘짝퉁’과의 모호한 경계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 패러디티셔츠다. 따라서 이러한 상품들이 성공적인 비즈니스모델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는 미지수다. 다만 패러디티셔츠가 젊은 소비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얻으며 대중적 상품으로 자리를 잡은 데 대해 그 배경만은 확실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에서는 네티즌이 아이디어를 올리면 이를 기업에서 보고 제품화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유행한 적이 있다”면서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카레컵라면 제품 ‘인도면’은 히트상품 대열에 오르기도 했다”고 예를 들었다. 그는 “따라서 국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패러디티셔츠 역시 네티즌의 의견과 문화를 결합해 오프라인으로 형상화시키는 새로운 틈새시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했다.INTERVIEW 김인욱 티공구 사장‘대박 기대한 건 아니나 화제상품돼 기뻐’패러디티셔츠 열풍의 원조격인 티공구(www.t09.co.kr)는 티셔츠디자인을 투표로 결정해 제작ㆍ판매하는 사이트다. 여러 사람이 함께 티셔츠를 제작해 같이 입는다는 의미에서 티공구(공동구매의 줄임말)가 사명이 됐다. 인터넷폐인 문화를 낳은 ‘ 닷컴’의 부운영자로 활동하던 김인욱 사장(28) 등 3명의 지인이 모여 이 사이트를 열었다.“본래 인터넷문화를 온라인으로 나타내보자는 의미에서 티셔츠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그래서 ‘아?행 ’, ‘?障? ‘즐’ 같은 디자인으로 시작했죠. 패러디도 하나의 네티즌 문화라는 의미에서 패러디티셔츠를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지난해 11월 뜻이 맞는 친구들과 처음 의견을 통일해 올해 초 웹사이트를 열었다. 반 년 만에 티셔츠 1만장을 팔았다는 김사장은 “패션산업은 잘 모르지만 의류에서 1만장이라는 숫자는 웬만한 히트상품 수준이라고 들었다”며 자랑을 덧붙였다.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자신이 판매한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발견할 때 가장 기쁘다는 김사장은 의미 있는 티셔츠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한번은 TV에서 우리 티셔츠 중 ‘즐’디자인을 입고 있는 방청객이 보였습니다. 즐은 네티즌이 상대방에게 조소를 보낼 때 쓰는 경우가 많아서 웃음이 났습니다.”“굶어죽지만 않을 정도로 팔리면 된다”는 김사장은 “지나치게 패러디 쪽으로 각인된 것 같아 앞으로는 패러디보다 새로운 디자인에 관심을 가질 생각”이라고 밝혔다.“디자인에 대한 보상을 강화하는 등 조만간 사이트 개편작업을 벌일 예정입니다. 대박을 기대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화제가 됐습니다. 앞으로 좀더 많은 네티즌문화를 오프라인으로 보여줄 수 있게 힘쓸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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