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년?” 한국은 일본과 달라요

‘일본식 장기불황’으로 대표되는 ‘자산 디플레이션’ 우려가 제기될 때마다 정부는 단호하게 ‘가능성이 희박한 견해’라고 반박하고 있다. 한국의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이 내리막길을 걷곤 있지만 장기불황을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는 진단이다. 특히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비교하는 논리에는 ‘주변 여건이 판이하다’며 평면적인 단순비교를 경계하고 있다.“한국경제가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꼬집은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조차도 자산 디플레이션에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부총리는 지난 7월28일 제주도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로 열린 ‘제18회 제주서머 포럼’ 기조연설에서도 “유가불안 등으로 경제회복 정도가 당초 예상에 못미치고 있지만 일본식 장기불황이나 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없다”고 못박았다.박승 한국은행 총재도 ‘갈지자(之)행보’를 보이긴 했지만 원론적으로는 이부총리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박총재는 7월20일 국회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우리 경제가 지난 90년대 일본의 장기침체 때와 닮아가고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해 책임 있는 정부측의 인사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식 장기불황 가능성을 언급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발언이 예상보다 큰 파장을 일으키자 일주일 뒤에는 “일본의 불황은 자산 거품의 붕괴과정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우리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한국경제의 상황이 일본식 장기불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을 바꿨다. 한은 관계자는 “박총재의 국회 발언은 일부에서 자산 디플레를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히 전달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했다.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한국이 일본의 90년대 초와 비교되는 이유는 첫째, ‘부동산 가격거품’에 있다. 일본은 지난 80년대 기록적인 호황기를 지나면서 부동산가격이 전례 없는 폭등세를 보였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정부의 부동산 투기억제책과 경기침체기가 맞물리면서 ‘소비ㆍ투자심리 위축 → 은행 부실채권 증가 → 기업부도 증가 → 내수위축 및 금융부실…’이라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잇단 부동산 투기억제책으로 건설경기가 급랭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불황 초기’가 서로 유사한 셈이다. 그러나 정부는 한국에서 부동산 버블이 갑자기 붕괴될 가능성은 매우 낮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은 84년부터 91년까지 8년간 부동산가격이 평균 3.3배나 상승한 반면, 한국은 93년부터 2003년까지 11년 동안 상승률이 평균 1.9배(서울 아파트 기준)에 그쳤다는 설명이다.주택담보비율도 부동산버블 붕괴 당시 일본(120%)에 비해 현저히 낮은 40~70%를 유지하고 있다. 집값이 푹 꺼지더라도 가계가 빚을 못 갚을 정도는 아닌 셈이다. 물론 가계부실로 은행이 휘청거릴 우려도 적다. 특히 지난해 이후 전 국민의 절반 가량을 투기지역에 살게 할 정도로 정부가 부동산 투기 때려잡기에 열을 올린 것도 일본과 한국의 다른 점이라고 정부는 주장한다. 거품이 지나치게 커지기 전에 미리 손을 썼기 때문에 터지더라도 충격은 적을 것이라는 전망이다.정부는 또 자산가격 급락으로 인한 피해 범위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설명한다. 90년대 초 일본은 주식과 부동산가격이 갑자기 곤두박질치면서 기업과 가계가 동시에 부실의 늪에 깊이 빠졌지만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는 얘기다. 정은보 재경부 경제분석과장은 “국내기업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부채비율을 낮추는 등 부실요인을 상당부분을 털어냈고 가계 부실규모도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고 말했다. 단지 신용카드 등으로 미래소득을 너무 앞당겨 쓰는 바람에 탈이 났을 뿐이라는 지적이다.성장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점은 비슷하지만 그 폭은 완연히 다르다는 것도 장기불황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정부와 국책연구소가 들고 나오는 단골메뉴다. 윤우진 산업연구원 동향분석실장은 “일본은 90년대 중반부터 성장률이 장기 추세선에서 완전히 이탈한 반면, 한국은 올해 성장률이 5%대에 이르는 등 여전히 잠재성장률에 근접하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결정적으로 ‘디플레이션’을 우려하기에는 국내 물가 수준이 너무 높다는 것도 정부가 내세우는 차이점. 사실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물가불안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7월 중 소비자물가는 1년 전에 비해 4.4% 상승, 1년4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특히 서민들의 ‘장바구니’ 물가인 ‘생활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5.8%나 뛰었다. 이는 지난 2001년 8월(6.0%) 이후 2년11개월 만의 최고치다. 이제는 디플레이션보다 저성장 속에 물가만 뛰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불황의 원인도 다르다정부는 불황을 촉발한 원인도 한ㆍ일 양국이 서로 다르다고 본다. 일본이 왜 ‘10년’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금융ㆍ실물 연계 가설’. 자산 버블로 인한 금융경색이 투자와 소비에 연쇄반응을 일으켜 장기불황을 초래했다는 분석이다. 이에 대해 한은 관계자는 “한국 부동산시장에도 일부 거품이 있지만 단기간에 형성된 소규모 거품이라는 점에서 일본과 다르다”고 설명했다.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학 교수는 ‘유동성 함정 가설’이라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 미래소득이나 물가상승에 대한 기대가 낮아지면서 ‘제로금리’하에서도 국민들이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 기업의 활력을 떨어뜨렸다는 설명이다.통화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해도 아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물가상승에 대한 불안이 남아 있어 일본처럼 ‘유동성 함정’에 빠질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게 정부의 분석이다.일본의 장기불황이 자산 버블로 인한 신용경색보다는 총요소생산성 저하로 발생했다는 해석도 있다. 부실기업과 사양산업에 대한 지원이 생산성 저하를 초래했고 생산성 향상이 뒷받침되지 않는 투자가 과잉설비로 이어져 경제 전반이 몸살을 앓았다는 설명이다.실제로 지난 80년대 2.4% 수준이던 일본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90년대 들어 0.2%로 급락했다. 반면 한국개발연구원은 91~2000년 연평균 1.9%였던 한국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2003~2012년에는 평균 2.6%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경기 바닥 쳤는데 장기불황이라고?경제 관련 수석부서인 재경부에서는 장기불황 논의는 이미 물건너간 것 아니냐는 반응이 주류다. 무엇보다 국내경기가 이미 저점을 지났고 최근에는 회복되는 징후마저 하나둘 늘어가고 있는데 “웬 뒷북”이냐는 소리다. 아예 “국내경기가 입춘을 지나 봄기운이 완연하다”(이승우 재경부 경제정책국장)는 말까지 서슴지 않는다.“증거를 대보라”고 하면 우선 7월 말 발표된 산업활동동향을 들고 나온다. 이국장은 “6월 산업활동동향을 볼 때 내수가 2/4분기에 바닥을 벗어났고 특히 소비는 앞으로 계속 좋아질 것으로 본다”며 “수출중심의 경제성장이 수출과 내수의 ‘쌍끌이’ 형태로 전환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6월 도소매판매 증가는 기술적 반등보다 실질적인 증가로 판단된다”면서 “도소매판매는 하반기에도 산업용 중간재를 중심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덧붙였다.6월 도매판매가 지난해 같은 달보다 1.5% 증가했으며 소매판매도 6월에 0.4% 증가한 데 이어 자체 조사결과 7월 들어서도 증가폭이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설비투자 역시 기업들의 사정에 따라 약간의 등락은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상승세를 보일 것으로 재경부는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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