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비투자 96년 66%… 생산기반 붕괴우려

국내기업들의 고정자산이 크게 감소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생산능력과 직결되는 기계장치자산의 감소폭이 두드러진다. 한국산업은행에 따르면 2003년 국내 제조업체들의 매출액은 99년 505조원에서 2003년 604조원으로 100조원 가량 증가한 반면, 고정자산은 392조원에서 344조원으로 48조원이나 줄었다. 특히 기계장치자산은 17.4%나 감소해 제조업 생산력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사고 있다.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설비투자 규모가 줄어든 것이 고정자산 하락의 주요인으로 분석된다. 2003년 제조업 전체의 설비투자 규모는 26조원으로 외환위기 전인 96년의 39조원에 비해 66%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연평균 설비투자 규모는 96년의 절반 수준인 20조원 내외인 것으로 조사돼 충격을 주고 있다.상위 5개 기업의 기계장치자산은 전년에 비해 증가했지만 6위 이하의 기업은 감소세로 돌아섰다. 6~30위 기업은 2002년 19조5,000억원에서 17조3,000억원으로 2조2,000억원, 30위 이하는 20조원에서 18조9,000억원으로 1조1,000억원 줄었다.지난 7월 한국은행이 발표한 ‘최근의 설비투자 동향과 특징’이라는 보고서에서도 기업의 투자위축을 읽을 수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기업의 설비투자는 2002년 7.5% 증가해 회복세를 보였으나 2003년 2분기 이후 감소하고 있다. 특히 설비투자액을 국내총생산액으로 나눈 설비투자율은 2000년 이후 4년 연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12.8%로 정점에 이른 후 2001년 11.0%, 2002년 10.4%, 2003년 9.5% 등 매년 1% 가량 줄어들고 있는 것.이와 관련, 한국은행측은 “노사관계 불안, 지정학적 위험 상존, 내수부진 장기화 등 여러 불확실성으로 인한 기업의 투자심리 회복이 지연된 데 따른 결과”라고 풀이했다. 실제로 설비투자에 대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2003년 9월에 89에서 지난 4월 95로 꾸준히 회복세를 보이다가 5월 94, 6월 93으로 다시 하락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중소기업의 투자부진이 특히 심각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임경묵 연구원은 “외환위기 이후 크게 침체됐던 상장사의 설비투자는 2003년 이후 증가세로 반전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상대적으로 중소기업의 비중이 높은 비상장 기업의 설비투자가 지극히 부진하다”고 분석했다.중소기업의 설비투자가 부진한 이유로 임연구원은 중소기업의 수익성 악화를 들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대기업을 상회하기도 한 중소기업의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돼 설비투자를 줄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는 것. 특히 벤처기업의 비중이 높은 코스닥 등록기업의 경우 설비투자 증가율은 99년 48.5%, 2000년 88.1%를 기록하는 등 높은 신장세를 보였지만 ‘벤처거품’이 빠지면서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99~2000년 당시 과도한 투자를 한 벤처기업들의 투자조정이 아직까지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뜻한다고 임연구원은 지적했다.중소기업의 투자부진은 기업은행의 조사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2,064개의 중소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3분기 중소제조업 경기 전망’에서 기업은행은 올 3분기 중소 제조업체의 설비투자 예정업체는 2분기 17.9%보다 3.3%포인트 감소한 14.6%에 그쳤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1분기에 18.1%를 기록한 이후 2분기 연속 하락한 수치다.내수시장의 침체가 중소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대상의 64.3%가 내수부진을 경영상의 애로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 중소기업의 경우 수출보다 내수 비중이 높아 내수부진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기업은행측은 분석했다.기업의 투자가 위축된 반면, 현금성 자산은 크게 늘었다. 산업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제조업체의 현금성 자산은 65조1,000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13.6% 증가했다. 특히 5대 기업의 현금성 자산 증가율이 눈에 띄게 늘었다. 6~30위 기업이 13.4% 늘어난 데 비해 5대 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45.9%나 증가한 것이다.기업들이 현금성 자산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은 외환위기 이후 외형적 성장보다 수익성을 중시하는 쪽으로 경영 스타일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산업은행측은 분석했다. 수익을 신규투자보다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국내기업의 재무구조는 몰라보게 개선됐다. 지난해 부채비율이 전년에 비해 8.5%포인트 줄어 116.1%에 불과하다. 이는 미국 154.8%, 일본 156.2%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설비투자가 줄어들고 있는 반면, 해외투자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기업의 해외 직접투자는 35억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5.9%나 증가해 200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중국에 대한 투자가 급증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업들의 대중국 투자 건수는 98년 이후 계속 늘고 있다. 98년 262건에서 99년 457건으로 2배 가량 늘어난 데 이어 2001년에는 1,000건을 돌파했고 지난해에는 1,637건에 이르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투자금액도 늘었다. 99년 3억5,100만달러이던 것이 지난해에는 13억6,500만달러로 4년 사이 4배 가까이 불어났다.기업의 설비투자가 관심의 초점이 되는 이유는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 7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올해 15대 민간그룹이 전년에 비해 34.2% 증가한 46조원을 투자할 계획인 것으로 조사됐으며 이에 따라 53만 6,0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분석했다. 또 26조1,000억원의 부가가치 유발 효과와 73조8,000억원의 생산 유발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기업의 투자위축이 장기적으로는 경쟁력 약화로 귀결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가운데 대기업들의 경우 설비투자가 증가세로 돌아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고무적이다.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상위 200대 기업의 상반기 설비투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5.9% 늘었다. 또한 하반기에도 25.5% 가량 설비투자를 늘릴 계획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제조업의 증가율이 높았는데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상반기 56.2% 증가한 데 이어 하반기에는 26.2% 늘릴 예정이어서 전체 평균을 앞질렀다.하지만 기업의 투자 계획이 곧바로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란 점에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와 관련,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민간기업의 투자계획이 실제로 집행될 수 있도록 투자를 저해하는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며 “투자를 뒷받침하는 국내 수요 기반의 확충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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