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 없이 매출 없다’… 손님 언제 오나요

경제활동 현장에서 느끼는 소비불황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백화점과 재래시장을 직접 찾아가봤다. 또 택시운전자를 밀착취재. 최근 경기 회복의 청신호가 나타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지만 현장에서 느낀 소비심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냉랭했다.바닥 헤매는 백화점지난 8월3일.평일 중 백화점에 손님이 가장 많이 들기 시작한다는 오후 2시에 서울 을지로입구 롯데백화점 본점을 찾았다.이미 7월 중순에 여름 정기세일이 끝났지만 불경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백화점 입구가 북적거렸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이는 물건을 구입하기 위한 인파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섭씨 30도가 넘는 찜통더위를 피해 약속장소를 백화점으로 잡은 사람들이 백화점 입구를 막고 있었던 것. 족히 40명은 돼 보였다.화장품과 잡화류를 판매하는 백화점 1층은 역시 예상대로 썰렁한 분위기였다. 손님이 한 사람도 없는 매장도 상당수. 다만 일정 구매금액 이상 고객에게 기념품을 주거나 기획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일부 수입화장품 브랜드 매장에는 평균 3~4명의 고객을 발견할 수 있었다.프랑스계 화장품 랑콤 매장에서 근무하는 최지연씨는 “경기가 좋을 때는 세일기간의 경우 손님이 매장 전체를 둘러쌀 정도로 많아서 손님이 직원을 기다려야 했다”면서 “하지만 지금은 직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라고 최근의 분위기를 묘사했다.실제 백화점에서 나타나는 소비불황은 수치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주요 백화점들이 지난 7월 초에 벌인 여름정기세일의 경우 기대만큼의 매출이 나오지 않았다.현대백화점은 지난해(-5.1%)에 이어 올해 여름정기세일에서도 일평균 세일 매출이 지난해에 비해 1.6% 줄어 2년 연속 마이너스 실적을 기록했다. 롯데백화점도 7월1~18일 일평균 세일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7월4~20일)과 비교해 일평균 0.6% 늘어나는 데 그쳤다.이런 분위기는 백화점 전체 매출의 30%를 차지한다는 여성복 매장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캐주얼 매장이 밀집돼 있는 2층에서 고객이 모여 있는 곳은 ‘브랜드 고별전’을 하는 매장이나 특별행사를 하는 매장뿐이었다. 특히 2층에서 가장 붐빈 곳은 ‘YK038’이라는 브랜드의 행사장. 행사 첫날에 평일 낮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30여명의 고객이 물건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같은 시간, 같은 층에 있는 이 브랜드 본매장에 손님이 전혀 없었던 것과 는 정반대였다.여성정장과 구두를 판매하는 3층 역시 특별행사가 있는 곳에만 손님이 몰려 있었다. 최근 불황이 길어지면서 노세일 브랜드들도 세일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3층에서 행사를 가진 까르뜨블랑슈의 경우 전에 없는 파격행사를 열고 있었다. 이 매장 판매직원 박옥순씨는 “4만9,000원짜리 티셔츠를 1만9,000원 균일가로 판매한다”면서 “일주일째 하고 있는 이 행사 덕분에 매출이 다소 좋아졌다”고 말했다.전반적으로 최근 백화점 매출이 호전됐다는 보도는 파격적인 가격의 세일행사가 늘어나서 생긴 일시적 현상일 뿐이라는 게 백화점 매장 직원들의 공통된 얘기다. 중년여성을 타깃으로 한 마담브랜드 매장에는 단 한명의 손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냉기가 가득했다. 물론 이런 현상의 원인을 소비불황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소위 가치소비 성향의 소비자가 늘어난 것도 이런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즉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많은 돈을 쓰지만 필수소비재 같은 것에는 최대한 아끼는 게 가치소비다. 결국 이런 성향의 소비자가 늘면서 디자인에서 차별화를 두지 못한 브랜드는 퇴출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지난해 말 수많은 여성정장 브랜드가 문을 닫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자영 신세계백화점 대리는 “해외여행 인파가 늘고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대중의 욕구는 한층 세련돼지고 트렌드 변화도 빨라졌다”면서 “이런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브랜드일수록 불황의 여파가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백화점에서 신사복은 최근 매출이 다소 호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세일기간은 지났지만 가격인하 행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각 브랜드별로 특정 품목에 한해 50%까지 가격이 낮아진 경우도 많았다.8층의 특설매장에서는 구두와 여성복 할인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2, 3층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이 역시 예년에 비해 못한 수준이라는 게 직원들의 얘기다. 피에르가르뎅 구두 행사매장의 강기철씨는 “지난해 같으면 여기 서서 물건을 고르지도 못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면서 “예전에는 이런 특가매장의 하루 매출이 최고 1,000만원까지 나왔는데 요즘은 잘해야 400만원이 상위 성적“이라고 말했다.백화점을 빠져 나오는 길에 1층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있어 가봤다. 양산을 파는 특별행사장이었다. 오후 5시가 넘었지만 햇볕이 여전히 뜨거웠다. 여름 무더위로 백화점이 침체기 속 반짝 특수를 누리고 있다는 보도들은 과장이 아니었다.고사 직전 재래시장같은 날 오후 10시.재래시장의 대명사 동대문시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시간은 오후 9시께다. 이때가 되면 전국에서 소매상인들이 모여들어 동대문 일대가 교통마비를 빚을 정도로 혼잡해진다. 따라서 재래시장의 경기변화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는 밤시간대를 골라 동대문시장을 찾았다.우선 가장 유행하는 옷을 많이 판다는 제일평화시장 2층에 가봤다.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여름상품을 세일하고 있는 곳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곳에서도 세일하는 곳에만 고객이 몰리는 현상이 반복됐다. 특이한 것은 이웃한 점포주끼리 잡담을 나누는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점이다. 그만큼 손님이 적다는 방증. 각 점포당 평균 2~3명 정도의 손님을 볼 수 있었다. 상인들에게 말붙이기가 어려울 정도로 썰렁함 그 자체였다. 서울 강남지역에서 왔다는 소매상인 김모씨는 장사가 잘되느냐는 질문에 “안 좋다”는 짤막한 대답만 쌀쌀맞게 남기고 바로 방향을 바꿔 점포를 빠져나갔다. 2층을 한바퀴 더 돌아본 뒤 ‘파니&핑크’라는 매장에서 큰 봉지를 들고 있는 한 남자고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터넷쇼핑몰 기네스를 운영한다는 하영진씨는 “바쁜 시간인데다 장사가 안돼서 말붙이기 힘들 것”이라며 인터뷰에 응해줬다. 하씨의 말에 따르면 제일평화시장에서 평일 오후 10시는 통로를 통과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아야 정상인 시간대다. 좁은 길에서 사람들에게 밀려다니며 쇼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인들이 각각 2~3명의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장사가 안된다는 뜻인지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지방에서 올라오는 소매상인은 지난해 가을 이후 기존의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설명이다.하씨를 만날 수 있었던 파니&핑크 매장의 나다은씨도 같은 이야기로 거들었다. 동대문시장에서 8년째 일하고 있다는 나씨는 “지난해에 가게문을 닫고 중국으로 도망간 사람도 많다”면서 “지방에서 매일 오다시피 하던 단골상인들이 7월 이후 아예 안 오는 경우도 늘었다”고 말했다. “‘시장이 돈 번다’는 건 잘못된 얘기”라며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 못한 나씨는 “망한 사례는 ‘쉬쉬’하고 잘된 케이스만 이야기하니까 그렇게 오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오후 11시쯤 거래를 마친 하씨와 함께 제일평화시장을 빠져나와 이웃한 디자이너클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디자이너클럽 앞에는 이미 구매를 마치고 지방으로 가는 차를 기다리는 소매상인들이 30여명 모여 있었다. 하씨는 “지난해만 같았어도 저 사람들이 도로를 완전히 점령했을 정도였다”며 불황의 골이 깊게 파여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그 맞은편에는 도매상인들의 짐을 맡아주는 서비스업자들이 20여명이 대기 중이었다. 대구지역 상인을 상대한다는 이달수씨는 “심부름하고 서비스요금을 받는 우리로서는 혼자 소화 가능한 물량에 한계가 있어 경기 변화로 인한 수입 차이를 크게 느끼지는 않는다”면서도 “하지만 지방에서 오는 상인의 수가 줄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했다.밤 12시 무렵 디자이너클럽에 들어서자 제일평화시장보다는 훨씬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디자이너클럽은 중저가 제품을 주로 취급하는 곳이다. 시간의 차이도 있었지만 “싼 거만 팔린다”는 상인들의 얘기를 증명한 셈이다. 상인들에 따르면 불경기로 동대문에 새로 나타난 특징 중 하나가 이직현상이다. ‘싸구려’ 시장으로 인력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저가 제품을 주로 취급하는 청평화시장의 경우 제품 품귀현상을 빚는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난다는 게 상인들의 말이다.밤 12시를 넘긴 시간, 디자이너클럽에서 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기 직전, 길거리 노점상 중 유독 젊은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곳이 눈에 띄어 가봤다. 원피스를 사려는 젊은 여성들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이곳에서 파는 여성용 여름 원피스는 한 벌에 5,000원이었다.기사들마저 외면하는 택시업계소비수준의 바로미터 가운데 하나가 택시다. 경기의 영향을 너무 민감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호황인지, 불황인지를 알아보려면 택시기사에게 물어보라는 얘기마저 있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떨까. 주변의 예상대로 그들의 표정은 매우 어둡다. 워낙 경기가 나쁘기 때문이다. 자영업을 하다 1년 전부터 택시를 운전한다는 정모씨(46)는 “택시회사에 들어갈 때만 해도 생활은 되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었으나 지금은 접었다”며 “택시운전을 더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택시불황의 풍속도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아예 공항 근처 등에서 먹고 자며 손님을 기다리는 기사들이 생겨났고, 아예 택시운전을 포기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택시를 타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 정상적으로 운행을 해서는 도저히 수지를 맞추기 힘들기 때문이다.요즘 인천공항 근처에는 소위 ‘택숙자’로 불리는 기사들이 생겨났다. 기름이라도 아껴보자는 생각에 택시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한 택시기사는 “오죽하면 집에도 들어가지 않는 택시기사가 생겼겠느냐”며 “요즘은 IMF 외환위기 때보다도 손님이 더 없다고 보면 틀림없다”고 강조했다.더욱이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버틸 만했는데 이제는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택시업계 사람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14년 경력의 택시기사 이모씨(42)는 “최근 1년 사이 손님이 20% 이상 줄어든 것 같다”며 “하루 8만원인 사납금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라고 설명했다.이러다 보니 실제 택시기사 가운데는 고정급 60여만원을 포함해 한달 수입이 100만원 남짓인 경우가 적지 않다는 후문이다. 영업은 안되는데 사납금은 요지부동이고 설상가상으로 연료비 부담은 늘어났기 때문이다. 공항이나 역, 버스터미널 등에 택시들이 길게 늘어선 것도 연료비라도 아껴보자는 기사들이 늘어난 결과라는 것.사납금을 채우기 힘들 정도로 불황이 깊어지면서 아예 택시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상대적으로 근무여건이 나은 것으로 알려진 버스나 대리운전 쪽으로 전직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 일부는 투잡족으로 변신, 근무가 끝나면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서울택시운송조합에 따르면 지난 상반기 전체 3만9,300명의 회사 소속 택시기사 가운데 퇴직자는 무려 1만3,619명으로 전체의 35%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3명 가운데 1명꼴로 떠난 것이다. 지난 4월 택시회사를 그만둔 정모씨(38)는 “1종 대형 면허를 따기 위해 운전학원에 다니고 있다”며 “자격증을 따면 버스기사로 취업해 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버스기사의 경우 월평균 급여가 250만원선으로 택시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 정씨의 설명이다.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개인택시도 불황을 비켜가지는 못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만 1,160명이 허가증을 반납했다. 일반 택시기사들의 꿈이었던 개인택시마저 불황의 깊은 터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개인택시 기사 김모씨(45)는 “올해 들어 주변의 동료 가운데 4명이 택시를 팔고 버스회사에 들어가거나 다른 일을 찾아 떠났는데 대부분 수입이 크게 줄어든데다 미래마저 불투명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서울택시운송조합의 한 관계자는 “택시의 불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고 더욱이 기사의 돈벌이가 시원치 않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원하는 사람들도 크게 줄었다”면서 “택시회사에 대한 세금혜택이나 기사들의 처우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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