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자금 ‘일단 튀자’ 나라 금고 바닥 나나?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3주 전 팔아버렸습니다. 올 봄에 세입자와의 계약기간이 끝나 다른 세입자를 찾으려 했습니다. 부동산중개업소에 집을 내놓은 지 넉 달이 흘러도 집이 나가지를 않아 기존 세입자와 마찰까지 빚어졌어요. 최근 역전세란도 시작된다는 얘기도 들리는 등 한국에 있는 아파트 관리가 매우 힘들더군요. 세입자 찾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느니 아파트를 매각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미국 버지니아주에 살며 아파트 처분을 위해 잠시 한국에 들른 재미동포 최모씨(51)는 속이 다 후련하다는 듯이 말했다. 최씨는 “아파트 판 금액을 종자돈 삼아 미국 LA지역에 투자하거나 차라리 중국의 부동산 투자처를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최씨는 한국의 부동산을 처분해 재산을 미국으로 가져간 셈이다. 국내에 있던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간 하나의 사례다.최씨와 같은 해외동포의 재산반출과 유학연수지급, 송금이전지급이 늘면서 국내 자금은 가속도를 내며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여기에 개인의 외화예금과 해외 직접투자까지 더해져 개인자금의 해외 유출은 나날이 급증하고 있다.한국은행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경상이전 대외지급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2% 증가해 58억5,620만달러를 기록했다. ‘경상이전 대외지급액’은 국내 개인들이 해외의 가족과 친척에게 보낸 수치를 나타낸다. 또한 올 상반기 ‘자본이전 대외지급액’은 8억6,72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3.5% 늘었다. 이 수치는 이민자들의 이주비와 동포들이 국내 재산을 처분하고 국외로 가져간 자금을 합산한 금액을 말한다.한편 상반기의 해외여행 경비는 지난해 동기간 대비 6억달러 늘어 43억2,760만달러를 나타냈다. 해외유학과 연수비도 32.8% 늘어 10억8,990만달러를 보였다. 이 같은 개인의 해외송금과 재산 반출을 합치면 올 상반기 해외로 빠져나간 돈이 8조원에 이른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이런 현상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본탈출이 신호탄을 올린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자본탈출’(Capital Flight)이란 특정 국가의 해외 자본 또는 국내 자본이 해당 국가의 정치ㆍ경제적 상황의 악화로 인해 대규모로 외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뜻한다.지난 7월12일 ‘개인자금의 해외유출 확대, 자본탈출인가?’라는 보고서를 발간한 전상준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자본탈출은 특정 국가의 사회적ㆍ정치적 정세 불안이나 전쟁 위험, 경상적자 누적,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한 통화가치의 평가절하, 국가채무 누적으로 국가부도 등이 예상될 때 발생한다”며 “자산의 안전성이 위협받는 경우에 나타나며 해당 국가의 외환시장 교란, 국제수지 악화, 성장잠재력 훼손 등을 초래한다”고 설명했다.그는 또 “자본탈출의 동기는 금리ㆍ환율 변동을 이용한 적극적 수익 추구보다는 불의의 자본손실을 피해 자산의 안전성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우세하다”며 “지난 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해외자본이 대규모로 아시아 신흥시장에서 철수해 선진국으로 이동했고, 80년대 초반 중남미 외채위기 당시 멕시코, 브라질 등의 국내외 자본이 미국 등 선진국들로 대규모 도피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한국경제의 자본탈출 가능성을 분석하기 위해서 전문가들은 △자본수지의 직접투자 및 증권투자의 적자 여부 △유학연수지급, 송금이전지급, 자본이전지급 등 개인의 증여성 대외지급의 증가율과 증가세 지속 여부 △개인의 외화예금 및 해외 직접투자 증가율과 증가세 지속 여부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개인자금의 해외유출이 증가한 배경 중 2001년 외환자유화 조치를 빼놓을 수 없다. 이때부터 외화의 해외송금이 완전 자유화됐고 이어 2002년 해외동포의 금융자산 해외반출을 완전 자유화해 국내 자본은 물 새듯 빠져나갔다. 여기에 국내 교육환경에 실망한 학부모들이 늘어나며 폭발한 조기유학붐은 유학연수지급과 송금이전지급을 확대했다.외화예금과 해외 직접투자 또한 개인자금을 국외로 빼가고 있다. 올 상반기 국내 거주자가 보유한 외화예금 잔액이 수출 호조세에 힘입어 증가세이며, 특히 개인의 외화예금 비중은 늘어갔다. 내수 침체 장기화로 해외에서 투자 대상을 찾는 개인 또한 증가해 올 1분기 해외 직접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대폭 증가했다. 지난해 말 44억8,000만달러 수준이던 개인 외화예금은 21억2,000만달러 급증해 올 6월 중순 66억달러에 이르렀다. 전체 외화예금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해 말 29%에서 6월 중순 33.4%로 높아졌다. 오정선 외환은행 PB센터 팀장은 “원화 예금보다 1~1.5%포인트 가량 높은 4.5~4.6%의 엔/원 스와프 예금이자 상품의 경우 확정금리를 바라는 고객들이 선호한다”며 “부동산 규제가 심해지자 달러를 유리한 보유자산으로 인식한 고객이 늘어났다”고 말했다.전상준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최근 개인의 증여성 대외 이전지급, 외화예금 및 해외 직접투자 확대를 자본탈출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며 “그렇지만 향후 국내 투자여건이 악화될 경우 투자처를 찾지 못한 국내 개인 부동자금이 고수익을 찾아 대규모로 해외 유출돼 진정한 자본탈출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이는 국내 투자 여건의 악화를 반영한 것이며 투자환경 개선 등을 통해 개인자금의 국내 투자 유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최근 내수 침체가 장기화되고 주식과 부동산시장 침체, 저금리 지속으로 투자처를 찾지 못해 단기 부동자금이 약 400조원에 이른다. 이 같은 현실은 앞으로 국내 투자자금의 지속적인 해외 유출 확대를 초래할 수 있다.전상준 수석연구위원은 “교육시스템을 개혁해 해외 유학연수 수요를 흡수하고, 출자총액제도와 수도권 공장총량제, 과도한 건축 및 토지 관련 규제 등 투자를 저해하는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며 “더불어 국내 투자에 대한 세제혜택 등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정쟁과 노사갈등 정치, 사회불안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증권시장 또한 선진화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연기금의 주식투자 확대와 투자은행업 및 주요국채 딜러제 활성화, 증권투자에 대한 세제혜택 증가, 공시ㆍ감독기능 강화 등을 통해 증권시장 시스템을 선진화시켜야 한다는 얘기다.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개인자금의 해외유출 증가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는 교육시장의 개방 등을 통해 국내에서 돈을 쓸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국내 투자를 꺼리게 만드는 요인인 각종 규제도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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