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만 98조 날아가…깡통계좌 수두룩

‘일찌감치 빠져나왔어야 했는데 시기를 놓쳐버렸다. 계좌를 들여다보면 죄다 마이너스다. 벌써 날려버린 돈만 3,000만원에 달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그다지 희망이 없다. 이제라도 포기하고 나와야 하는데 맘대로 안된다. 본전 생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투자경력 8년째의 개인투자자 C모씨의 넋두리다.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거의 모든 주식투자자가 공감하는 대목이다. 한국땅에서 주식은 이제 골칫덩이로 전락했다. 주식으로 돈 벌었는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반면 잃었다는 사람은 수두룩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주식은 짭짤한 투자수익을 안겨주는 효자투자처였다. 그랬던 게 최근에는 ‘무주식이 상팔자’란 말처럼 심각한 악성자산으로 분류되고 있다. 전저점(515.24)을 찍었던 지난해 3월 이후의 상승장도 외국인만의 잔치로 끝난 분위기다.증권가의 자산디플레는 이미 시작됐다는 의견이 많다. 최근 태풍의 핵으로 떠오른 부동산과 비교해도 그 심각성은 모자람이 없다. 부동산이야 아직 본격적인 하락을 예단하기 힘들지만, 주식은 올 봄부터 폭락을 반복하고 있다. 올해 거래소에서만 공중분해로 날아가 버린 돈이 83조원. 4월23일 413조원이었던 거래소 시가총액이 8월3일 현재 330조원으로 쪼그라들었다. 같은 기간 종합지수는 936에서 726으로 22.44% 하락했다.심각한 건 개인투자자의 손실분이다. 이게 곧 가계의 주식부문 자산디플레 규모를 확정짓기 때문. 보통 개인투자자는 상승 때는 뒤늦게 뛰어들고, 하락 때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 투자 행태를 보인다. 이른바 개미군단의 ‘뒷북치기’다. 이 같은 관점이라면 지난 2003년 3월17일(521.24)부터 올 4월23일(936.06)까지의 상승장에서 개인투자자는 소외받았을 공산이 크다. 반면 2002년 4월23일(937.61)부터 2003년 3월17일(515.24)까지 폭락할 때는 올곧이 총알받이가 됐을 수 있다. 당시 하락장 때의 시가총액 하락분만 147조원에 달했다.코스닥 투자에 따른 자산디플레는 더 가관이다. 거래소야 반짝 반등이나마 있었다지만, 코스닥은 2002년 3월22일 이후 거듭 대세하락 중이다. 최근에는 역사적인 저점까지 연일 갈아엎을 만큼 체력이 바닥났다. 2002년 3월22일 대비 지난 8월3일 현재 코스닥지수는 3분의 1 토막(943.00 → 325.66)났고, 시가총액은 46조원(73조원 → 27조원)이 날아갔다. 코스닥 참가자의 90% 이상이 개인투자자임을 감안하면 가계부문의 자산손실은 엄청난 규모다.기회비용까지 합하면 주식을 선택한 대가는 꽤나 고통스럽다. 만일 주식이 아닌 다른 자산에 투자했다면 손실은커녕 적잖은 수익까지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국고채에만 투자했더라도 2000년 이후 매년 4~9%의 수익이 가능했다. 여기에 대략 4~6%대의 물가상승률까지 반영하면 주식투자 손실규모는 더 커진다. 박동명 굿모닝신한증권 애널리스트는 “주가하락에 따른 자산축소와 안전자산에 대한 투자기회 상실에 따른 비용까지 더하면 주식이 야기한 자산디플레 규모는 더 커진다”고 말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식에서 발을 빼는 사람도 늘고 있다. 개인자금의 주식시장 엑소더스는 지난해 3월 이후 16개월간 지속되고 있다. 대부분의 기관투자가도 기본입장은 ‘셀’(Sell)이다. 지난 7월 말 현재 고객예탁금은 7조원 근처까지 떨어졌다. 코스닥을 합한 하루 거래대금 역시 1조5,000억원 수준까지 폭락한 상태. 썰물처럼 빠져나간 증시자금은 그대로 단기부동화의 길을 걷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개월 미만의 단기부동자금은 388조8,000억원. 전체 예수금의 49.1%에 달한다. 이는 사상 최고 기록이다.주식투자 손실에 따른 자산디플레는 부채조정을 더 가속화시킨다. 부채조정이란 빌린 돈을 갚기 위해 투자자산을 처분하는 행위. 그런데 부동산보다는 주식을 처분해 빚을 갚는 게 좀더 일반적이다. 주식 쪽이 유동성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이후 개인투자자(15조원)와 기관투자가(10조원)는 도합 25조원을 상환했다. 여기서 기관투자가의 매도금액도 결국에는 개인투자자의 펀드환매 요구에 따른 결과라는 점에서 가계부문으로 통합할 수 있다. 이필호 신흥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부채조정에 사용된 막대한 액수의 환매자금은 십중팔구 손해보고 내다판 돈일 것”이라고 말했다.주식부문의 자산디플레 여파는 이미 심각한 수위에 도달했다. 역자산효과(Negative wealth effect)의 확산이 대표적이다. 역자산효과란 자산가치 하락이 소비심리를 위축시켜 궁극적으로 경기침체를 가속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저금리 → 대출증가 → 자산매입 → 자산가치 상승 → 소비증가의 자산효과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최근의 소비침체 원인을 역자산효과에서 찾는 분위기도 이 때문이다. 또 자산디플레에 따른 금융부문 부실화는 추가적인 신용경색을 초래하기도 한다.물론 반론도 적잖다. 주식투자에 따른 자산디플레가 다소 과장됐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부동산과의 규모 비교가 자주 인용된다. 이른바 부동산 디플레이션이 자산붕괴의 핵심이지 주식은 비교조차 안된다는 평가다. 실제로 가계부문 자산구성을 보면 80%가 주택 등의 비금융자산에 몰려 있다. 그나마 예금과 주식ㆍ채권 등의 금융자산은 계속 하락 추세다. 부채만 봐도 그렇다. 약 450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 중 250조원이 부동산 섹트에 투자돼 있다. 따라서 부동산이 붕괴하면 부채조정은 한순간에 물건너간다.그럼에도 불구, 주식자산의 디플레 조짐과 경고를 무시하고 지나쳐서는 곤란하다. 주식이 다른 자산에 비해 선행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반면 부동산(주택가ㆍ지가)은 충격에 대한 반응이 느려 가격에 반영되는 데 시차가 있다. 실제로 IMF 당시의 자산디플레 때 주식폭락은 부동산폭락보다 약 6개월 이상 앞서 발생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자산디플레 징후로서 주가하락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정책당국의 경제운용에 적잖은 힌트를 제공하기 때문이다.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주가하락에 따른 자산디플레를 해결하는 방법은 딱 하나다. 주가 상승세만 유지되면 주식자산의 가치회복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 보인다. 여의도의 투자전략가 중 상당수가 내년 하반기 이후를 회복시점으로 내다보고 있어서다. 신후식 대우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앞으로 15개월 이상은 힘들어 보인다”며 “특히 내수에 치중된 사업구조를 보이면서 비교적 높은 주가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지금보다 더 떨어질 가능성도 크다”고 전망했다. 우량기업이나 내수 독점기업을 빼면 자산디플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소수파지만 주가 회복세를 낙관하는 의견도 있다. 이쪽 분석가들에 따르면 연내 주가반등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신성호 우리증권 상무는 “경기수준이나 기업실적과 비교해 주가가 지나치게 떨어졌다”며 “연내 반등을 확인하고 내년부터 본격 상승국면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일본식 자산디플레와 결부할 필요도 없다는 논리다. 사이클의 문제지 디플레는 아니라고 봐서다. 700선 정도면 더 이상 떨어지기 힘든 지지선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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