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칼바람 ‘쌩쌩’…‘너무 추워요’

월급 줄고 일은 늘고 … 비용절감·인력감축 등 구조조정 공포 엄습

8월9일 월요일 점심 무렵 여의도 식당가. 마지막 복날(말복)답게 곳곳에 삼계탕ㆍ보신탕 홍보물이 걸려 있다. 10년 만의 땡볕더위를 피해볼 요령인지 이들 식당 앞은 일찌감치 붐빈다. 하지만 손님들의 메뉴선택은 삼계탕의 압승으로 끝난 분위기다. 삼계탕집은 문전성시인 반면, 보신탕 전문가게는 말복이 무색하게 한산하다.“5,000원짜리 반계탕 먹기도 빠듯한 마당에 2만~3만원의 보신탕은 그림의 떡”이라는 한 증권맨의 아쉬움이 귓전을 때린다. 그나마 복날이라고 닭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투다.오후 3시 L증권사 앞 흡연공간. 주식브로커 K씨는 불황 여의도를 ‘죽을 맛’이라는 단어로 요약한 후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깎인 연봉에 살벌한 사무실 분위기는 그래도 참을 만하다. 문제는 본인의 앞날이다. 비전 없는 사양산업에 남아있기는 싫지만 방법이 없다. 얼마 전에 산 자동차할부금도 어깨를 짓누르는 스트레스 중 하나다. “일찌감치 한몫 챙겨 이민 간 친구가 부러울 뿐”이라는 K씨의 신세타령은 줄담배로 이어진다. 한때 한국의 돈줄을 움켜쥐었던 ‘희망의 섬’ 여의도에 지금은 ‘절망의 블루스’가 울려퍼지고 있다. 힘겨운 여름나기 중인 여의도 증권가를 스케치했다.◇불황의 핵, 고민에 빠진 증권사 = 증권사 수익구조도 온통 적자투성이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6월 중 대형사 지점의 과반수가 적자를 냈다. 중소형사는 아예 80~90% 이상의 점포가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 거점점포 몇 개가 겨우 체면치레를 해줬을 뿐이다. 대우증권 구철호 증권담당 애널리스트는 “위탁수수료 위주의 수익구조로는 미래가 절망적”이라며 “구조조정 압력이 높지만 제대로 실현될지 여부도 미지수”라고 말했다. 칼을 댄다 해도 뿌리 깊은 종기를 완전히 도려낼지 자신이 없다는 코멘트다. 해결책은 딱 하나다. 업황 개선으로 주식투자 붐이 일 경우다.매물로 나온 회사도 적잖다. 공식적으로 ‘팔겠다’는 의향이 나온 건 아니지만, 주인이 확실한 몇 군데를 빼면 거의 모든 증권사가 M&A 대상이다. 대표적인 게 LGㆍ대투ㆍ한투증권이다. 이들 증권사는 사실상 M&A작업에 돌입했다. 중소형사는 두말할 나위 없다. 대형증권사조차 허덕이는 판에 뻔한 수익구조로는 버티기조차 힘들다는 게 중론이다. 증권사의 3분의 2는 문을 닫아야 구조조정이 완료될 것이라는 비관론까지 있다. 현재 증권사 숫자는 42개다. 해외증권사까지 합하면 60개가 넘는다. 과당 출혈경쟁이 벌어지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조직ㆍ부서 구조조정은 이제 일상적이다. 한때 경쟁력의 핵심요소로 비교되곤 했던 지점 숫자 또한 매년 감소하는 추세다. S증권 P모 홍보팀장은 “영업점 통폐합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진행됐다”며 “대신 철저히 수익위주로 거점점포를 운영하는 전략이 확산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형태의 영업소도 속속 설치되고 있다. 3~5명의 소규모 인력이 과거의 지점규모를 대체하는 형태다. 부서 역시 분할보다는 업무관련에 따른 통합이 대세다.비용절감은 1순위 구조조정 전략이다. ‘마른수건 쥐어짜기’식의 고강도 절약 캠페인을 벌이는 곳이 수두룩하다. 분석보고서를 내는 리서치센터를 보자. A4용지 사용량이 많은 부서답게 이면지 활용은 기본이다. 보고서도 하드카피 대신 얇은 종이를 사용해 만든다. 회식비부터 출장비까지 하향조정한 짠돌이 증권사도 있다. 최근에는 마케팅비용을 절감하는 것도 유행이다. 마일리지제도의 폐지ㆍ축소가 대표적이다. 거래규모에 비례해 포인트를 적립시켜 인터넷쇼핑 때 가격을 할인해 주는 비용조차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비용절감에 초비상이 걸린 상태다.발등의 불은 인력조정이다.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체감할 수 있어서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증권업 종사자수는 매년 급감하고 있다. 일례로 2,247명(2002년 4월)에 달했던 투자상담사수(협회등록 기준)는 최근 1,100명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불과 2년여 만에 절반 이상 옷을 벗은 셈이다. 인력감축의 칼바람은 본ㆍ지점을 가리지 않는다. 브릿지증권은 최근 29개월치 월급을 주는 조건으로 대대적인 희망퇴직을 실시하기도 했다. 파견직이나 외주인력은 좌불안석이 따로 없다. 실제로 여차하면 아웃시킨다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상시적인 군살빼기는 때와 장소가 따로 없다.◇우울한 여의도ㆍ술렁이는 증권맨 = 지난 7월1일. 증권사 리서치센터에는 때아닌 지각출근자가 속출했다. 타 부서보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특수한 조직임에도 불구, 오전 9시 이후까지 지루한 출근행진이 이어졌다. 회사가 발칵 뒤집어진 건 물론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버스체계 개편 탓이었다. 회사측도 전날 이 점을 염려해 정시출근을 독려했지만, 리서치센터만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고액연봉자가 많은 조직이라 자가용 출근이 일반적인 까닭에서다. 그런데 이 판단은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상당수 애널리스트가 버스로 출근했기 때문이다.왜 그랬을까.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다. D증권 K모 애널리스트는 “몸값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말이 억대지 요즘에는 일반 샐러리맨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이 마당에 자가용 출근은커녕 택시이용조차 어림없다는 볼멘소리를 덧붙였다. 고액연봉자라는 이미지도 편견에 불과하다는 푸념이다. 실제로 여의도의 출퇴근 시간대에는 러시아워라는 말이 쑥 들어갔다. 최근에는 유가까지 뛰면서 자가용 출퇴근이 더 어려워졌다.증권맨 수난시대는 계속된다. 연봉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증권맨이 수두룩하다. 올 봄 연봉계약 시즌 때는 곳곳에서 불평불만이 잇따랐다. 열에 아홉은 동결 혹은 감봉이었던 탓이다. 오른 케이스는 아주 특이한 일부에 한정된다. 모 애널리스트는 “몇몇 애널리스트가 2억~3억원의 웰컴(Welcome) 보너스에 연봉 1억~2억원을 받고 이적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나마 장이 좋았던 올 봄이었으니 가능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현 상황이라면 어림도 없다는 얘기다. 계약서에 각종 옵션이 붙는 것도 이제는 일반적이다. 연봉보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셈이다.여의도의 우울한 블루스는 신입사원일수록 보다 적나라하다. 신랑감 후보순위에서도 증권맨은 밑에서부터 찾는 게 더 빠르다. 입사 2년째인 총각 애널리스트 L씨는 “요즘에는 맞선도 안 들어온다”며 “술자리에서도 증권사 다닌다는 얘기는 안한다”고 말했다. 대접은커녕 홀대받지 않으려면 공무원처럼 행동하는 게 더 좋다는 처세술까지 익혔다. 여유도 없다. 구조조정으로 사람은 줄어드는데 업무 강도는 더 세졌다. 웬만하면 ‘멀티플레이어’다. 부장조차 신입사원 시절의 업무를 계속하는 케이스도 적잖다. 어떤 부서든 ‘꽃 보직’은 없다는 게 정설이다.한편 회식문화는 더 조촐해졌다. 예전 같으면 3~4차까지 가던 회식 술자리가 요즘에는 1차에서 대부분 끝이다. 그래서 생겨난 게 ‘1차형 술집’이다. 맥주에 요깃거리 안주를 내놔 1차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 그나마 회식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돈도 없거니와 눈치가 보여 최대한 자제하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D증권 P모 대리는 “신입사원이 들어와도 회식 얘기는 감히 못 꺼낸다”며 “직원끼리 갹출로 먹긴 하지만, 그마저도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취흥은커녕 살벌한 안주거리만 회자되는 것도 술자리를 막는 원인이다. 증권가에 더 이상 주지육림은 없다는 게 주당들의 한목소리다.반면 생존경쟁은 한층 치열하다. 떨어지는 낙엽 신세를 피하려면 경쟁력을 높이는 게 유일하기 때문이다. 리서치센터를 중심으로 학업 열기가 뜨거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발적인 역량강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으로 부각됐다. 샐러던트(Salary man과 Student의 합성어)도 증가 추세다. 최근 10여명의 애널리스트가 단체로 박사과정에 입학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주경야독으로 어수선한 시기를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다. 영업부문은 고객쟁탈전까지 심심찮게 벌어진다. 상도덕은 사라졌다. 업무장벽 철폐로 고전 중인 운용사 쪽 상황은 더 긴박하다. 일부 펀드매니저는 아예 전업하기도 했다.◇피박 맞은 개미군단ㆍ파생사업자 = 하락장세를 견뎌낼 장사는 없다. 프로선수조차 비틀대는 판에 개미군단은 태반이 전사자다. 오죽하면 ‘행방불명된 개인투자자를 찾습니다’란 우스갯소리까지 떠돌까. 요즘 증권사 객장에는 피서객밖에 없다. 손님이 없으니 창구직원도 눈칫밥에 배부르다. 객장 주변에서 만난 중년의 개인투자자 Y모씨는 “객장친구들이 다 떠나갔다”며 “답답하고 억울하지만 여기라도 안 나오면 갈 곳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 개인투자자의 월별 순매수 동향을 살펴보면 지난 5월을 빼고 모두 마이너스다. 썰렁한 객장에는 괴담까지 기승이다. ‘부시 대통령이 암살되고 한반도에 국지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증권사와 영업라인을 맺고 있는 파생사업자는 이미 줄줄이 도산하고 있다. 증권사에 IT솔루션을 납품하는 I사 K모 사장은 “동종업체 사람들을 만나면 한숨밖에 안 나온다”며 “경쟁업체가 줄었는데도 매출은 급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증권사 구조조정, 비용절감 분위기가 하청업체의 수익구조를 더 갉아먹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례로 예전에는 2개의 프로젝트로도 충분했지만 지금은 4개를 따내도 버티기 힘들다. 깎아봐야 5% 정도였던 할인율이 최근에는 10~20%까지 늘어났다. 증권사 마케팅대행업체인 C사는 전년 대비 매출이 5분의 1로 줄었다. 이 회사 사장 K씨는 “아예 증권사로 출근해 눈도장을 찍지만 무용지물”이라고 밝혔다.이 결과 여의도에는 이제 접대도 사라질 모양이다. 간혹 있다면 간단한 식사자리가 태반이다. 접대문화 자체가 건전(?)해진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증권사를 고객으로 둔 업체 사장 B모씨는 “매출을 쥐락펴락하는 최고위 VIP가 아니면 밥 먹자는 얘기도 안 한다”며 “상대편도 술 안 얻어먹을 테니 원가나 좀 깎자는 케이스가 더 많다”고 밝혔다. 일식집 회식은 거의 반기행사일 정도다. 불가피하게 접대할 때 경비절감은 최우선 전략과제. 1차에서 많이 마시게 해 2차 경비를 최소화한다. 흥이 올라도 2인 기준 100만원을 훨씬 웃도는, 이른바 10%는 출입금지다. 굳이 가야한다면 저렴(?)한 가격의 클럽 수준에 비용을 맞춘다.돋보기 여의도 상가돈가뭄에 목타는 해바라기 상권이미 여의도 상권은 비명소리만으로 넘쳐난다. 예컨대 증권가 식당은 하락장세 유탄에 문닫기 일보 직전이다. 주당들을 유혹하던 24시간 해장국집은 새벽시간 공치기 일쑤다. 연중무휴ㆍ24시간 영업이라고 적혀 있는 간판까지 내릴 판이다. S따로국밥 사장은 “재료비는 오르는데 손님은 더 줄었다”며 “벌써 몇 년째 적자장부만 쳐다보고 있다”고 긴 한숨을 내쉰다. 재료상에 따르면 60% 이상의 식당이 매출부진에 허덕이고 있다. 업종전환에 나선 식당도 적잖다. 대신 구내식당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증권가에서는 거의 유일한 호황 현장이다. 시간을 잘못 맞추면 20분 이상 기다리는 게 보통이다.술집은 아예 개점휴업 상태로 전락한 지 오래다. M빌딩 수위 C모씨는 “입주해 있는 룸살롬 중 절반은 아마 내놓았을 것”이라며 “옛날에는 취객 뒤치다꺼리에 새우잠 자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조용하다”고 전했다. 사실 여의도만큼 술집이 성황이었던 곳도 없었다. 오죽하면 대형빌딩 2~4층까지 술집이 줄줄이 들어섰을까. 이는 ‘술집=지하’의 등식을 깬 여의도만의 광경이었다. 이 술집들이 최근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다. 흉흉한 소문까지 떠돈다. 세를 밀린 술집주인이 야반도주했다는 얘깃거리는 더 이상 특별한 뉴스가 아니다.손님과의 마찰도 잦다. 손님이 없으니 업소측에서 다소 엉뚱한 불황타개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시키지도 않은 음식이나 음료를 서비스인 양 내놓은 뒤 나중에 덤터기를 씌우는 형태다. S증권사 H모 부장은 “얼마 전 손님이 와 카페에 갔는데 홍삼과 알로에를 내놓아 기분 좋게 먹었더니, 결국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며 허탈해했다. 단골이 아닌 뜨내기손님을 벗겨먹기 위한 전략이다. 제살 깎아 먹기에 불과한 상술이라는 여론에도 불구, 눈앞의 이익 탓에 ‘독박 씌우기’는 계속된다.저가를 표방하는 서민형 주점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대표적인 게 포장마차다. 증권거래소 부근에 몇 개 있던 포장마차가 최근에는 그 대열을 여의도역까지 확대했다. 불황 때는 포장마차가 늘어난다지만, 여의도만큼 확연히 세를 불린 곳도 드물다. 한 포장마차 주인은 “말도 마라. 벌어먹고 살 만하니 여기저기 우후죽순 생겨난다. 샐러리맨의 몇 만원 푼돈조차 여럿이 나눠가지는 셈이다”고 푸념했다. 가격경쟁이 붙은 건 당연하다. 1만원을 웃돌던 안주거리가 최근에는 20~30%씩 가격이 하락하는 추세다.고객을 끌려는 홍보 전단지도 한층 자극적이다. 점심이나 저녁 무렵 여의도 대로변은 미성년자 출입금지지역이다. 노출이 심한 티셔츠에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차림의 술집언니들이 점령했기 때문이다. 아는 손님이라도 만나면 보기 민망한 스킨십까지 불사한다.냉커피에 휴지, 라이터 등의 홍보물은 지천에 널렸다. 1장에 1,000원 하는 로또복권을 대여섯 장씩 나눠주는 판촉행사도 잦다. 파격적인 쇼를 선보이는 곳도 늘었다는 후문이다.서울의 대표적 유흥가인 북창동 시스템을 카피한 곳도 상당히 늘었다. 그래도 불황을 이기긴 힘들다. ‘단돈 6만원에 여대생과 스트레스를 풀자’는 저가 안마업소의 전단지도 90% 이상 휴지통으로 직행한다. 훗날(?)을 기약해 챙기기도 하겠건만, 요즘 증권맨의 주머니사정은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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