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보다 착한 소비자 어디 있겠어요?’

“얼리어답터들은 결코 사치스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제품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아니죠. 같은 제품이라도 1,000원, 100원 더 저렴하게 사기 위해 정보수집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합리적인 소비자입니다.”서울대 법학과 98학번인 조영식씨(25)는 IT제품 중에서도 오디오ㆍ비디오(AV)와 컴퓨터 하드웨어에서 전문가 뺨치는 지식을 지니고 있다. 이어폰의 경우 소니와 아이와, 샤프, 파나소닉 등 각 회사의 제품을 고루 써 보며 미세한 음질까지 비교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대학입학 무렵부터 지금까지 조씨는 AV와 컴퓨터 제품을 사겠다는 주변 사람들과 상담만 수백번 했다. 인터넷 게시판에도 제품 후기를 쓰며 장단점을 자세히 전달했다. 어떤 제품이 좋은지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제품의 특성을 다른 제품과 비교하며 아주 꼼꼼하게 설명해 준다. 본인이 IT제품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각 분야별 제품을 싸게 살 수 있는 장소와 인터넷 사이트를 훤히 꿰뚫고 있다. 그동안 조씨를 통해 다른 소비자들이 구입한 제품들은 수천만원어치에 이른다.조씨는 새로 나온 제품을 사기 위해 기존 제품을 되팔 때 매매가의 70~80% 이상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매매가 50% 이하로 떨어질 무렵 IT제품을 파는 소비자는 얼리어답터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저는 되팔 때 80% 이상 받기 위해 제품을 애지중지해요. CD플레이어의 경우 마스킹 테이프라는 화방에서 파는 얇은 비닐테이프로 돌돌 감아 사용합니다. ”정말로 갖고 싶은 제품이라면 용돈을 몇 달씩 아껴서라도 사지만, 신제품이라도 가격 대 성능비가 떨어지면 절대로 구입하지 않는다. CD플레이어 혹은 미니디스크(MD) 플레이어는 세계 최소, 최경량, 최장 사용시간, 최대 내구성을 자랑하는 제품위주로 사며, 컴퓨터는 최고 속도를 보유했다고 검증되면 구입한다.그는 기업이 얼리어답터를 VIP 고객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는 데 동의한다. 얼리어답터들이 만든 입소문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인터넷에서 이른바 ‘꽝’이라고 특정 제품이 소문나면 사려는 사람이 사라집니다. 업체들은 자사의 제품이 무조건 좋다고만 광고하지만 얼리어답터들은 장단점을 적나라하게 분석한 후 그 내용을 전파합니다.”IT전문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그는 얼리어답터 경험이 훗날 전자상거래나 저작권법을 다루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돈을 내고 제품 테스트를 해주니 이보다 착한 소비자가 어디 있겠어요. 20대 얼리어답터들이 세월이 흘러 사회 중심부로 뻗어나가면 이들의 영향력으로 일반 소비자들은 더욱더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될 겁니다.”피현정 뷰티팀장유행주기 짧은 패션계 ‘트렌드리더’정보기술(IT)분야만큼이나 유행의 주기가 짧은 것이 패션 관련 상품이다. 최근에는 패스트푸드를 본떠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이란 신조어를 쓸 정도로 패션업계는 트렌드 변화가 빠른 곳이다. 따라서 패션 또는 뷰티업종에서 얼리어답터의 역할은 IT분야 못지않게 중요하다.피현정 뷰티팀장(33)은 그런 면에서 패션ㆍ화장품업체들이 관심을 갖고 봐야 할 사람이다.“늘 패션정보를 남들보다 앞서서 접하는 게 직업적 특성입니다. 한두 계절 앞서 다음 시즌 정보를 전달해야 하지요. 그렇다 보니 지금 현재 국내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에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습니다.”‘한두 시즌 앞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요즘 유행하는 옷 중 피팀장이 수년 전 즐겨 입었던 것도 많다. 6년여 전부터 중국풍의 공단 소재로 된 진분홍 치마를 즐겨 입었다는 피팀장은 “당시만 해도 화려한 색깔의 치마를 입는 일이 드물었지만 지금은 화려한 원색이 유행”이라고 말했다.“친구들이 특이한 옷을 입었다고 놀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몇 년 지나고 보니 다들 비슷한 옷을 입고 나타나더군요.”특히 그녀는 직업상으로도 얼리어답터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패션·뷰티 업체의 ‘0순위’ 고객이다. 화장품회사 마케팅 관계자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새로 출시하는 상품에 대한 의견을 물어오는 일도 많다고.“얼마전 국내 화장품 브랜드에서 새로운 제품 런칭건에 대해 묻기에 우리나라 제품도 글로벌화를 위해 패키지나 이미지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무척 많은 비용을 들여서 패키지 디자인을 했다는 이야기를 이후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그녀는 해외출장을 나갈 때면 늘 패션ㆍ뷰티 관련 아이디어 상품에 관심을 갖는다.“일본 출장 중 다국적 화장품 브랜드에서 나온 예쁜 화장품 파우치 가방을 발견했습니다. 귀국해서 그 회사 한국 담당 매니저에게 이런 걸 한 번 만들어 보라고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두 달 뒤에 제 의견을 받아들여 만든 파우치라면서 하나를 보내왔습니다.”굳이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사실 그녀에게는 화장품을 비롯한 여러가지 새로운 제품이 수시로 들어온다. 한 달에 새로 생기는 물건의 개수만 30여개. 그야말로 패션ㆍ뷰티업계의 VIP 고객인 셈이다.“무엇보다 나에게 맞는 제품을 잘 알고 제대로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 얼리어답터라고 봅니다. 유행을 선도하는 트렌드 리더이자 유행을 안착시키는 존재이지요. 한마디로 시장을 활성화하는 역할을 얼리어답터가 담당 한다고 생각합니다.”기업의 움직임 한정환 스펙트럼디브이디 마케팅과장12명 선정단 통해 소비자 의견 미리 들어국내 대표적인 DVD타이틀업체인 스펙트럼디브이디는 지난해 11월부터 ‘스펙트럼 DVD 홍콩영화 선정단’을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공개모집에서 수십대1의 경쟁을 뚫은 12명의 홍콩영화 마니아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회사 관계자와 한달에 한번 정기모임을 갖고 이미 출시됐거나 출시될 작품들에 대한 조언을 한다. 회사측은 상시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선정단 전용 게시판도 제공하고 있다. 선정단원들끼리 번개모임을 갖는 등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다고 회사측은 귀띔한다.선정단을 운영하게 된 이유는 뭡니까.스펙트럼디브이디는 지난해부터 홍콩영화라는 타깃 시장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홍콩영화는 예전에는 보편적인 장르였지만 요즘은 일부 마니아만 봅니다. 당연히 음질이나 화질 등 모든 면에서 그들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만들 필요가 생겨 선정단을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소비자의 요구를 제품에 반영하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최근 들어 소비자들의 요구가 더욱 다양하고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미리 듣기로 한 거죠. 다른 경쟁업체들도 비슷한 개념의 선정단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선정단은 주로 어떤 사람들로 구성됐나요.선정단원의 기준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홍콩영화에 대한 애정도가 그것이었습니다. 당연히 홍콩영화 슈퍼마니아들로 이뤄지게 됐지요. 연령대는 홍콩영화에 열광한 경험이 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대부분입니다. 활동상황은 매우 좋습니다. 한달에 한번 있는 정기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것은 물론 제품 기획 아이디어를 수시로 제안하는 단원도 있습니다.선정단의 요구로 제품을 수정한 경우도 있나요.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의 요구를 수용한 일은 있지요. 시리즈의 경우 케이스에 적힌 글자의 위치와 크기가 동일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 케이스를 바꿨습니다. 의 경우 사은품으로 증정하는 포스터의 이미지를 수정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요구를 들어줄 형편은 아닙니다. 타이틀의 스펙을 변경하라는 등 때로는 비용이나 판권계약상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선정단을 좀더 활성화할 계획입니다. 국내시장의 경우 마니아 시장이 아직 작지만 일본이나 미국처럼 시장이 활성화되면 이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DVD타이틀에 대한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은 물론 제작과정에 깊숙이 참여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우선은 현재까지의 성과들을 회사의 소식지에 싣거나 독립적인 출판물로 엮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변형주 기자 hjb@kbizwe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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