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견지명’탁월… 시대흐름 이끌어

'마누라 자시기 빼고 다 바꾸자'에서 '천재론'까지…재계 유행어 제조기

‘이건희 회장의 선견지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주위에서 삼성이 호조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삼성은 장래를 내다보며 개혁을 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경제전문지 는 삼성의 성공요인을 이회장의 선견지명에서 찾았다.실제로 이회장은 각종 현안에 직접 나서는 것보다 경영화두를 던지는 스타일이다.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삼성의 인재들은 이를 잘 소화하고 즉각 실천에 옮겼다.농사로 치면 이회장이 개혁의 씨앗을 뿌리고, 구조조정본부가 경작방법을 보급하고 감독하며, 계열사들이 실제로 농사를 짓는 셈이다.이회장이 던진 경영화두는 단지 삼성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지만은 않았다. 재계의 유행어가 돼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이회장의 첫 유행어는 아무래도 프랑크푸르트 선언일 것이다. 1993년 6월7일 계열사 임원들을 불러모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이회장은 ‘질로 가자, 처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호소했다. ‘신경영’의 첫 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이후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해 런던, 후쿠오카, 도쿄를 거쳐 68일간 연인원 1,800명을 대상으로 총 350시간 신경영을 설파했다. 그가 말하는 신경영은 삼성 제품이 세계 1등을 하고 서비스가 선진 수준에 오르며 경영시스템이 세계 일류기업 수준이 되도록 꾸준히 개혁하자는 것이다.삼성은 신경영 이후 지난 10년간 매출액 3.4배, 이익 28배를 기록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됐다. 또 D램, TFT-LCD 등 18개의 월드베스트 제품과 세계 34위(83억달러)의 브랜드 강자로 성장했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이회장의 개혁론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7ㆍ4제를 실시하라’93년 7월 일본에 머물던 이회장은 이학수 당시 비서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7ㆍ4제를 실시하라’는 한마디만 남긴 채 끊었다. 따라서 7ㆍ4제는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며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뒤 이회장이 내린 첫 번째 작전명령이나 다름없다.7ㆍ4제는 삼성은 물론 재계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룹 안팎으로 찬반논쟁이 그치지 않았지만 삼성을 움직이게 한 상징적 조치였다는 점에서 기대한 효과를 거뒀다는 평이다. 무엇보다 ‘바뀌어야 산다’는 절박감을 임직원들이 온몸으로 느끼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그 뒤 8년여 만에 7ㆍ4제를 공식 중단하고 탄력근무 시간제로 바뀌었지만 7ㆍ4제가 남긴 변화의 정신은 지금도 삼성을 움직인 거대한 동력으로 남아있다.양적사고를 버려야 산다‘양적사고를 버려야 산다’는 이회장의 발언은 지금은 평범하게 들리지만 당시만 해도 ‘질이 먼저냐, 양이 먼저냐’는 ‘질량 논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충격을 던진 화두다.그룹 내에서조차 반대가 만만찮았지만 그는 초일류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품질이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70~80년대에는 물자부족으로 무조건 만들기만 하면 팔렸지만 90년대 이후에는 양이 최고인 시대가 지났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특히 95년 3월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무선전화기를 포함해 팩시밀리, 휴대전화 등 15만대의 제품들을 다 태워버린 이른바 ‘불량제품 화형식’은 양을 우선시하는 문화를 바꾸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 성격이 짙었다.‘품질확보’라는 머리띠를 두른 2,000여명의 직원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는 현수막 아래서 돈으로 따지면 500억원어치가 잿더미로 변했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오로지 양에만 사로잡힌 의식을 깨지 않으면 기업의 발전은 물론 개인의 인생까지도 퇴보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세계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양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이회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세계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사업부별로 한 개이상의 명품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으며 연말 사장단 평가 자료로 활용됐다.2003년말 기준으로 삼성 계열사가 생산하고 있는 제품 가운데 월드베스트 제품은 모두 18개에 달한다.삼성전자가 D램(금액 기준), TFT-LCD, CDMA 휴대전화 등 7개, 삼성전기가 DY(브라운관 부품소재 편향코일), FBT(모니터용 고압변성기) 등 5개의 월드베스트 제품을 보유하고 있고 이밖에 삼성SDI, 삼성코닝, 삼성정밀유리, 삼성정밀화학, 제일모직 등도 세계 1등 제품을 보유하고 있다.‘세계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그의 외침은 메아리가 돼 재계 공통의 언어로 진화했다. 삼성은 향후 5년 내 1등 제품을 30여개 품목으로 늘릴 계획이다.1명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린다이회장은 매년 신년사에서 인재육성과 확보에 관해 언급할 정도로 인재를 중시했다.2002년 6월5일 경기도 용인에 소재한 삼성그룹 인력개발원에서 계열사 사장단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인재전략 사장단 워크숍’에서 “21세기는 탁월한 한명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리는 인재경쟁의 시대”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때부터 국적불문의 채용, 핵심인력의 글로벌 역량 강화, 재능과 끼를 갖춘 인재 조기양성 프로그램 제공 등 3대 중장기 과제를 추진하고 있다.인재유치를 독려하기 위해 연말 사장단 업적 평가에서 100점 만점에 30점이나 계열사별 핵심인력 확보 달성률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계열사 사장과 인사담당 임원이 틈만 나면 우수인재 확보를 위해 해외출장길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1명의 천재가 1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른바 ‘천재론’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재계에 인재육성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돋보기신경영 2기 화두는‘상생’과 ‘나눔’ 부쩍 강조‘상생’과 ‘나눔’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최근 부쩍 강조하는 말이다. 이는 단순한 불우이웃돕기나 사회환원 차원이 아니라 초일류기업을 지향하면서 나온 경영화두다.이건희 회장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 글로벌 인재육성과 차세대 첨단기술 개발은 기본임을 다시 한 번 천명했다. 여기에다 ‘나눔’과 ‘상생’을 함께 강조하며 “이런 노력을 다할 때 고객과 사회로부터 진정어린 신뢰와 존경을 받는 기업으로, 글로벌 리딩컴퍼니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지난해 말부터 이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눔과 상생’을 설파했다. 그는 12월19일을 ‘나눔데이’로 정하고 전 임직원이 자원봉사에 참여하도록 했다.특히 올 4월 삼성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복지사업에 1,100억원 등 총 4,000억원을 사회공헌활동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해 재계를 놀라게 했다. 이는 웬만한 중견기업의 연간매출액과 맞먹는 수준이다. 이처럼 밖으로는 나눔과 상생을 외치고 안으로는 훌륭한 일터를 강조하는 것은 초일류기업으로 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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