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내 ‘벽 허물기’에 모두가 손뼉

맥주회의 · 조찬강연회 · 현장경영 등 다양한 방법 도입

제일모직 갤럭시사업부의 노만장 부장은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날 오후에 열리는 ‘업적 평가회의’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업적 평가회의는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는 자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회의에 가벼운 맥주가 곁들여지기 시작했다. 회의장에서는 ‘계급장’도 떼어버렸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할말은 하도록 하자는 배려다. 자유롭게 서로의 성공 및 실패 사례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다는 게 노부장의 생각이다.분위기가 자유롭다 보니 실패사례에 대한 분석도 깊게 이뤄진다. 올 3월 대전지역 집중 폭설로 협력업체의 기계설비가 파손돼 신사복 납기가 지연되는 일이 발생했다. 과거 같으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연재해로 치부하고 넘어갔을 일. 하지만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협력업체가 풍수재해보험에 가입했으면 납기 지연에 따른 보상청구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영업팀이 일기예보와 함께 날씨에 맞는 상품을 제안하는 엽서를 단골고객들에게 발송해 판매실적을 두 배나 신장시켰다는 성공사례가 발표됐을 때는 회의 참석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건배’를 외치기도 했다.제일모직이 이렇게 변화하기 시작한 건 올해 초 부임한 제진훈 사장이 조직 내 의사소통을 ‘훌륭한 일터 만들기’ 캠페인의 첫 번째 과제로 삼았기 때문.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의사소통이 이뤄져야 직원들 한사람 한사람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제사장은 이를 위해 ‘아이디어 경영’을 화두로 던졌다. 기존의 관행을 깨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일해 보자는 의미. 회의에 맥주를 곁들여 살아 있는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만들자는 것도 제사장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아이디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왔다. 사장과 직원들간의 도시락간담회도 그중 하나. 임원에서 말단사원까지 계층별로 돌아가며 갖는 간담회에서 제사장과 참석자들은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현업 부서의 애로 및 건의 사항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고 그 자리에서 해결책을 도출하기도 한다.제사장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실시간 정보공유를 통해 전 임직원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며 조직 내 의사소통이 물 흐르듯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사내 전산망을 이용해 CEO의 메시지를 정기적으로 발송하고 있는 것도 공동의 목표를 전 임직원이 공유하기 위해서다.제사장이 훌륭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의사소통만큼이나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학습하는 조직문화의 조성이다. 매월 조찬강연회를 실시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 책을 통해 현안을 진단하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삼자는 것이다.일반적으로 기업에서 진행하는 특강은 오전 늦게 또는 오후에 이뤄지는 데 비해 제일모직은 오전 6시에 강의를 시작한다. 일찍 출근해 맑은 정신으로 학습하자는 취지다. 지난 4월 처음으로 팀장급 이상 임직원을 대상으로 의 저자 특강을 진행했다.이 강연에 참가한 빈폴의 남지훈 디자인 실장은 “아침 일찍 나와 강연을 듣다 보니 변화에 대한 강한 의욕이 생겼다”며 “일에 대한 열정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전했다.조찬강연회를 통해 정착시키고 있는 ‘액션 러닝’(Action Learning)도 제일모직이 거두고 있는 큰 수확 중 하나. 독서경영의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임직원의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키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액션 러닝이란 영국의 레그 레번 교수가 개발한 경영기법으로 일종의 팀 단위 실천학습. 제기된 문제에 대해 팀원들이 ‘의견제시 → 상호학습 → 상호지원’의 과정을 거치면서 혁신해 나가는 방식으로 미국 듀폰사에서 이를 적용해 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제일모직 임직원은 세미나 실시 전 경영 현안에 관련된 책을 샅샅이 읽은 후에 저자나 강사에게 강의를 듣고 심층적인 토의를 통해 문제 해결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아이디어 경영이 의사소통과 학습문화 조성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최근의 극심한 내수불황에 대한 타개책들도 줄을 잇고 있다.제일모직은 최근 삼성전자 프린터사업부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이 부서에서 실행하고 있는 단납기(短納期)시스템을 제일모직에도 적용하기 위해서다. 단납기시스템이란 시장상황에 가장 알맞은 제품을 단기간에 생산해 시장에 선보임으로써 재고부담을 제로(O)화한다는 것. 철저한 판매데이터를 바탕으로 생산량을 조절하는 등 시장변화에 생산을 최적화시키는 시스템이다.그동안 패션업계의 생산 사이클은 최소 3~6개월 전 상품기획을 통해 생산아이템과 수량을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해 왔다. 제일모직은 삼성전자 프린터사업부의 노하우를 패션에 접목시켜 그동안 업계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월별 생산, 무재고 실현에 도전하고 있다.이 회사는 ‘팔릴 제품만 생산한다’는 목표 아래 실제 판매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퇴근 전에 다음날 추진할 내용을 결정하는 업무방식을 구축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1차적으로 근접기획, 월별기획을 정착시키고 완전판매를 목표로 팔리는 제품만을 만드는 시스템을 갖춰 모든 브랜드에서 업계 1위를 달성한다는 전략이다.현장경영도 제일모직이 내세운 새로운 경영기법 가운데 하나. 회사의 브랜드팀장과 디자이너들은 지난 1분기부터 남대문, 동대문 등 재래시장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다. 불황 극복의 해답은 현장에 있다는 판단에서다. 의류의 기획ㆍ생산ㆍ판매 네트워크가 한곳에 구축돼 있는 재래시장에 대한 현장조사를 통해 재래시장의 기동성과 네크워크를 직접 체험하고 실제 업무에 반영하는 제도다.오후 11시까지 두타, 밀리오레 등 도소매 매장 5곳을 직접 조사한 브랜드팀장 및 디자이너들은 “회사 내에서는 풀리지 않던 다양한 물음에 대한 해답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며 “상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경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어 현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계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제사장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는 제일모직이 반세기 동안 수많은 기업들의 부침 속에서도 업계 선도기업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재를 중시하는 경영철학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라며 “기업의 경쟁력은 조직의 구성원에 의해 결정되고 구성원의 경쟁력은 훌륭한 일터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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