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불신에 사회뿌리 ‘휘청’

지난 6월3일 일본 참의원(상원에 해당)의 후생노동위원회 회의장에서는 일본 국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진풍경이 연출됐다. 여야 의원들이 뒤엉켜 육탄전에 가까운 몸싸움을 벌였다. 평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체면에 신경 쓰던 일본 정치인들이지만 이때만은 원색적인 욕설과 고함이 난무했다.여야가 첨예하게 맞붙은 것은 일본 정부ㆍ여당이 이번 국회 회기 중 처리 방침을 굳힌 연금관련법 개정안에 대한 시각차 때문.일본 정부는 연금재정의 개선을 위해 보험료를 늘리고 보험급여액은 줄이는 방향으로 연금법 개정을 추진해 왔다. 당장 내야 할 돈은 늘어나는데 혜택은 줄어드니 국민여론이 호의적일 리가 없다. 당연히 야당도 법안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왔다.이날 소동은 정부측 개정안을 심의하던 도중 집권 자민당 소속 위원장이 야당 의원들의 질의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표결에 붙이면서 시작됐다. 집권 여당으로서는 어차피 정식 절차를 밟아 표결을 해봐야 야당의 저항으로 쉽지 않을 게 뻔한 만큼 기습작전을 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위원장은 의원들에 둘러싸여 법안 통과를 선언했다.다음날 참의원 본회의에서는 일본 국회 역사상 신기록이 세워졌다. 역시 연금법 강행처리와 맞물린 해프닝이었다.야당은 개정안의 본회의 표결에 앞서 전날 상임위에서 처리를 강행한 위원장에 대해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했다. 야당이 내놓은 작전은 회의시간을 최대한 끌어 연금법 개정안의 자동폐기를 유도하는 ‘우보(牛步) 전술’.제안 설명에 나선 민주당의 여성의원은 연단에서 신발을 벗고 신는 동작을 반복하는가 하면, 결의안 내용과 관련이 없는 의사록을 천천히 낭독하는 식으로 시간을 끌었다. 여기에 걸린 시간은 3시간 1분으로 종전기록인 2시간 8분을 경신했다.연금법 개정안은 야당의 격렬한 반대 속에 통과됐다. 야당은 오는 7월 참의원선거에서 연금문제를 쟁점으로 삼아 여당을 공격할 태세다. 하지만 ‘세계 제일의 장수대국’인 일본의 처지를 생각하면 연금에서 각자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정부의 논리에 수긍하는 국민도 의외로 많다.요즘 일본사회의 최대 화제는 단연 연금이다. 대학동창들의 술자리에서도, 동네 주부들의 모임에서도 ‘연금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로 얘기가 시작된다.경기회복으로 일본경제가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일본 정부는 연금재정 악화로 골치를 앓고 있다. 이 문제를 잘못 다루면 단순히 연금재정 적자에 그치지 않고 젊은층의 근로의욕 저하, 세대간 갈등으로 확대돼 일본사회의 기초를 뒤흔들 가능성까지 있기 때문이다.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100년까지 필요한 연금지급액은 740조엔으로 부족액이 480조엔에 이른다. 특단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연금이 바닥나 가입자들에게 돈을 내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애써 보험료를 내봐야 늙어서 연금을 받기 힘들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국민연금 미납률은 2002년 현재 37.2%로 치솟았다. 3명 중 1명은 아예 보험료를 내지 않는 셈. 여기에 상당수 현직 각료와 국회의원들이 연금을 미납했거나 아예 가입하지 않은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들의 연금불신은 더욱 심화됐다.일본 정부 2인자인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과 제1야당인 민주당의 간 나오토 대표가 연금미납 사실이 드러나 불명예 퇴진했다. 자민당의 차세대 주자로 꼽히는 다니가키 사다카즈 재무상, 이시바 시게루 방위청장관 등 현직 각료 6명도 국민연금 미납 스캔들에 휘말려 스타일을 구겼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까지 국회의원의 국민연금 가입이 의무화되기 이전인 80년 4월부터 86년 3월까지 미가입한 사실이 밝혀져 곤욕을 치렀다.일본에는 노후 대비 연금이 크게 두 종류로 나눠져 있다. 성인이 되면 봉급생활자를 대상으로 하는 ‘후생연금’과 자영업자(국회의원 포함)와 학생 등이 가입하는 ‘국민연금’ 중 한 가지는 들게 돼 있다. 이밖에 공무원들은 ‘공제연금’에 가입해 있고 국회의원들은 국민연금과 동시에 ‘의원연금’의 적용을 받는다. 후생연금과 공제연금의 경우 보험료의 절반은 본인이 납부하고 나머지 절반은 각각 소속 기업과 국가가 부담하는 식으로 운영된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공적연금제도를 일원화하자는 주장이 나오지만 우선은 연금재정의 내실부터 갖추자는 게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개정안에 따르면 연금재정 확충을 위해 후생연금 보험료가 올해부터 매년 0.354%씩, 국민연금은 내년부터 매년 월액 기준으로 280엔씩 2017년까지 오르게 된다. 현재 연간 수입의 13.58%인 후생연금의 보험료율을 18.3%로, 국민연금 보험료는 월 1만3,300엔에서 1만6,900엔으로 늘린 뒤 고정시킨다는 것이다.고령화가 현 추세대로 진행되면 퇴직 후 받는 급여수준은 당연히 하락한다. 퇴직자에 대한 급여액을 보험가입자들로부터 받는 연금수입의 범위 내로 묶는다는 방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직장인이 퇴직 후 65세가 되는 시점에 받는 급여액은 지금은 현역 직장인 봉급의 59%이지만 2017년 이후에는 50%선까지 낮아진다.기업체의 법률상 정년퇴직 연령인 60세부터 연금 최초 지급시기인 65세까지 5년간의 수입 공백기간을 없애기 위해 재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근로자 정년을 65세로 늘리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올해 45세로 4인 가족의 가장인 기업체 중견간부 A씨는 현재 매월 2만6,000엔(자기부담)의 후생연금 보험료를 내는데 앞으로는 매년 1만엔씩 늘어 58세가 되면 자기부담액이 월 3만5,000엔으로 불어난다. 65세에 퇴직하면 기초연금을 합해 회사원 평균수입의 50.2%인 월 28만엔을 받는다. 연금액은 70세 때 30만엔, 80세가 되면 33만2,000엔으로 소폭 증가하지만 현역 봉급생활자들의 급여 대비 비율은 65세의 50.2%에서 80세 때는 42.7%로 낮아진다. 일본이 장기 디플레이션 상태라고는 하지만 화폐가치 하락과 물가상승 등을 고려하면 연금에만 의존해 노후를 보내기가 힘들다는 계산이 나온다.세대간의 형평도 중요한 문제다. 후생연금의 경우 앞으로 95년간 보험료를 내는 세대의 부담은 세금을 포함해 1,390조엔이지만 연금으로 챙겨갈 수 있는 금액은 970조엔이다. 젊은 세대가 땀 흘려 번 나머지 420조엔은 앞세대의 몫이 된다.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고이즈미 총리는 국회의원 경력자에게 지급되는 의원연금을 폐지할 뜻을 내비쳤다.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연금의 국고부담률이 30% 정도인 데 비해 의원연금은 70%여서 특혜라는 비판을 받는 데 착안한 것이다. 하지만 의원들이 순순히 응할 리 없다는 점에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게 중론이다.출산율 저하와 평균수명 연장 추세를 감안할 때 연금제도에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여야 모두 의견이 일치한다. 다만 정부는 공적연금 중 재원이 가장 많은 후생연금 보험료를 계속 올려 재원을 확보하자는 것이고, 민주당은 보험료는 그대로 두되 세금으로 저소득층에 대한 ‘최저보장연금’을 지급하자고 주장한다.한국에서도 국민연금공단과 네티즌간의 연금논란이 뜨겁다. 연금문제의 근본원인이 노인인구 증가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는 두 나라가 비슷하지만 한국은 경기침체까지 겹쳐 자영업자들이 매달 보험료를 내기가 더 힘들어졌다.일본 국회가 몸싸움까지 벌이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지만 다음 세대의 문제를 미리 고민한다는 점만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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