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공화국’옛말…풀어주고 기 살린다

일본 후쿠오카시에는 ‘로봇실험특구’라는 것이 있다.일본 기업들이 ‘만화 속에 나오는 아톰을 만들겠다’며 오랫동안 인간형 로봇의 연구를 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로봇을 실험하는 데 큰 장애물이 있었다. 로봇의 경우 도로에서 ‘주행’실험을 하려면 자동차 관련 법규를 따라야 하는지, 기타 법규를 따라야 하는지 문제가 있어 결국 로봇실험은 실험실 안에서만 가능했다. 바로 여기에 착안한 것이 로봇의 거리실험을 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풀어주는 ‘로봇실험특구’다. 후쿠오카시 관계자는 “로봇이라는 말이 나오면 로봇관련특구가 있는 후쿠오카를 떠올리게 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군마현 오타시에서는 일본어 이외의 전 과목 수업을 영어로 하는 사립초ㆍ중학교를 건설할 수 있는 특구가 생겼다. 일본인과 외국인 교사를 2인1조로 교단에 세울 방침이다. 사이타마현 도다시에는 시내의 모든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국제이해교육추진특구’가 있다.일본은 오랫동안 ‘규제 공화국’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일본은 국가 차원의 경제개발 전략을 취한 일은 없지만 그 대신에 스스로 뻗어나가는 민간기업들을 국가가 잘 조직해서 나간다는 전략이었고 이 때문에 많은 규제가 생겨났다.그러나 각 정부부처가 만들어 놓은 이중삼중의 규제가 기업의 활동을 방해하는 수준이 됐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하자 일본은 규제 완화에 총력을 기울이게 됐고, 그 규제 완화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구조개혁특구’였다.구조개혁특구제도란 한 지역을 특정해 이 지역에 한해서는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풀어달라고 신청한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해 주는 제도를 말한다. 지방자치단체가 단독으로 혹은 아이디어를 내서 몇 개의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으로 특별한 사업을 하기 위한 특구가 필요하다고 신청을 하면 이것을 정부가 심사해서 특구를 인정해 준다. 이 과정에서 법률개정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면 정부의 특구 추진본부가 관련부처와 협의를 해준다. 물론 법률 자체가 개정이 될 경우 규제 완화의 효과는 전국에 미치게 된다. 실제로 한국의 수학여행 학생들에 대한 비자면제는 관광지를 갖고 있는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특구’의 형식으로 규제를 풀어달라고 한 것을 전국으로 확대, 적용한 것이다.원래 ‘창의력’과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하다 보니 지방자치단체가 내는 아이디어들도 매우 기발한 것이 많다. ‘구조개혁추진본부’ 관계자는 “특구 아이디어 자체는 어느 곳이나 모두 흠잡을 데 없는 것으로 정부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고 말했다.대체로 특구들을 분류해 보면 교육이나 육아와 관련된 특구, 농촌 부흥과 관련된 농촌관광특구, 기타 산업분야 특구로 크게 나뉜다.일본에는 특별한 첨단산업과 관련된 특구가 많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사실 특구는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의 수가 많은 농촌특구가 많다. 농업과 관련, 보호에 연결돼 있는 규제를 풀어달라는 것이고, 농촌특구들의 경우 특구의 정신이 잘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는 ‘도시농업성장특구’를 만들었다. 주식회사들이 농지대여 방식으로 농업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특구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농업은 역사적, 정책적 차원에서 일반 주식회사 등의 참여를 막고 있다. 자금력을 가진 회사들이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농산물을 생산, 경쟁력이 떨어지는 농민들이 도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다. 지주, 소작농 등의 계급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의 제도이기도 하다. 일본의 경우 대체로 농촌 현지에서 조직되는 농업생산법인을 제외하곤 기업이 농업을 할 수 없는데 바로 이런 규제를 풀어주는 특구다.이렇게 일반기업들의 농업 참여를 가능케 하는 특구는 오다와라시 이외에도 야마나시현 야마나시시의 야마나시시농지생생특구, 아오모리현의 ‘쓰가루 생명과학활용식료특구’, 가나가와현의 ‘사가미와라시 신도시농업 창출특구’ 등 1, 2차를 통해 총 16개의 특구가 ‘주식회사의 농업참여’를 허용했다. 이는 허용된 전체 특구의 15%에 해당하는 수치다.특히 이런 기업들의 투자는 ‘특별한 연유’가 있는 곳에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일반적이다. 95년 대지진이 일어났던 효고현 아와지섬 북부 구릉지는 현재 농지의 약 40%가 버려진 땅이다. 지진도 지진이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 농촌도 이농현상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버려지는 땅이 적지 않다. 기업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경작을 해준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심산이다.나가노현 이이다시는 일반농가도 자유롭게 민박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미나미신슈 그린투어리즘특구’를 만들었다. 며칠간 직접 농가에 숙박하면서 농업 체험을 하게 하는 ‘그린투어’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일반농가도 불특정 다수의 손님을 맞아 민박을 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가가와현의 우치노미는 간장제조회사들이 올리브를 재배할 수 있도록 규제를 푸는 ‘올리브 진흥특구’를 만들었다. 역시 지역의 회사들이 좀더 사업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특구들이다.최근에는 농가에서 직접 술을 제조, 민박을 찾은 손님에게 대접할 수 있도록 하는 특구가 생겨났다. 예전 같으면 ‘밀주 제조’로 잡혀갈 상황이지만 소규모의 특구라면 해 볼 만하다고 봤고, 이곳저곳에서 ‘술 특구’가 생기고 있다.교육 관련 특구는 대부분 영어교육과 관련된 특구이거나 유치원 입학연령 조정, 유치원과 보육원을 일원화하는 등 육아지원 관련 특구가 많다. 또 일본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학생들의 부등교(등교거부) 문제와 관련된 특구도 많이 생겼다. 도쿄 하치오지는 일본사회에서 늘어나는 부등교학생들을 위한 일관교육이 가능한 특구를 만들었다. 오랫동안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쫓아가기 힘들다. 이에 따라 아예 학년을 없애고 수업을 능력별로 들을 수 있게 해 중학생도 초등학교 공부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기후현의 다지미시는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이 집에서 인터넷으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쿄학습특구’를 만들었다.물론 특구가 만능은 아니다.일단 규제를 푼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마이너스 발상이다. 한곳에서 풀어서 될 규제라면 원래부터 전국에 규제가 없는 편이 더 낫다. 실제로 법령이 개정되고 있다는 점도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특구 사이에 경쟁이 붙을 경우 실제로 전국이 특구 상태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또 정부는 ‘규제 완화’만 해줄 뿐 ‘지원’은 해주지 않는다. 실제로 좋은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자금이 필요할 경우 스스로 현실성 있는 재원조달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물론 원래 ‘보호’와 규제는 한 틀인 만큼 규제완화에 이어 지원까지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이 일본 정부의 논리다. 일본 정부는 그래서 ‘특구에는 자립의 논리가 들어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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