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있어야 주식 사지…무력감 커져

주가 오르는데도 자금 이탈 심해져…버팀목 아닌 장애물 전락

“주가가 떨어질지 오를지는 외국인에게 물어보세요.” 한 증권사 투자전략가의 자조섞인 하소연이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인들의 주식보유 비중은 세계에서 거의 제일 많은 42.9%로 50%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러다 보니 외국인이 ‘기침’만 해도 우리 증시는 심한 ‘몸살’을 앓는 상황이다. 이미 외국인에 의해 시장이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실제로 국내증시는 조그만 충격에도 주가가 폭락하는 ‘블랙먼데이’가 2주째 나타나면서 시장참여자들을 패닉(공황)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지난 4월23일 936.06으로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던 종합주가지수는 불과 3주일 만인 지난 5월17일 728.98로 22.1%나 폭락했다.이 같은 폭락은 외국인의 ‘투매사태’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국내증시의 매수 기반이 워낙 취약하다 보니 소규모 매도 공세에도 지수가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블랙먼데이였던 지난 5월17일 외국인의 순매도 규모는 424억원에 그쳤지만 지수는 39.48포인트(5.14%)나 밀렸다. 과도한 반응이 나타난 셈이다.이는 외국인과 함께 수급의 3각축을 이뤄온 기관과 개인들이 매도물량을 받아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내증시는 이날 1% 안팎 하락한 미국과 유럽증시는 물론 일본(-3.18%), 홍콩(-2.74%), 중국(-1.45%), 태국(-4.61%), 대만(-5.10%) 등 아시아권의 하락폭에 비해 낙폭이 가장 컸다.그럼 국내 주식시장의 원주인이었던 기관투자가들은 어디로 갔을까.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주식시장에서 은행, 증권, 보험, 연기금, 저축은행 등 기관투자가 비중은 계속 낮아지는 추세다. 미국이나 일본 등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낮다.주식형펀드 수탁고 ‘소걸음’우재룡 한국펀드평가 사장은 “총체적인 매수 기반 부재로 국내증시는 조그만 충격에도 맥없이 무너지는 취약한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고 강조하고 “결국 연기금의 주식투자 활성화와 간접투자시장 육성으로 매수 기반을 강화하는 길 이외에 해결책이 없다”고 지적했다.지난 3월 종합주가지수가 900선을 넘었지만 투신ㆍ자산운용사 주식펀드매니저들은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수가 오를수록 돈이 들어오기는커녕 투자자들의 펀드해지가 늘어 당시 지수상승은 남의 얘기가 됐기 때문이다.자산운용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3월 중순 지수 515.24를 저점으로 꾸준히 올라 900선을 돌파하는 동안 주식형펀드의 수탁고는 오히려 11조대에서 8조원대로 3조원 가량 빠져나갔다. 주가가 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자금이 계속 이탈한 셈이다. 그러니 주가가 떨어질 때도 당연히 수탁고는 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5월24일 현재 주식형펀드의 수탁고는 8조5,000억원대에서 횡보하고 있다. 한 투신사 펀드매니저는 “투자자들이 주가가 오르면서 오히려 환매하다 보니 기관투자가로서의 역할은 이제 남의 얘기”라며 “투자할 돈이 있어야 주식을 사거나 팔 것 아니냐”고 하소연했다.지난해 말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정과제회의에서 동북아 금융허브 구축 방안’을 확정 발표했다. 자산운용업을 집중육성하고 한국투자공사를 만들어 세계 50대 자산운용사들을 유치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하지만 운용업계 관계자들은 그 효과에 대해 쓴웃음만 지었다. 금융정책이 은행 중심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자산운용업 육성은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실제로 올해부터 시행된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은 은행과 투신사간의 차별정책을 명확히 보여준 사례다. 이 법은 그동안 여러 법으로 나뉘었던 자산운용업을 하나의 법 테두리로 통일시키고 자산운용업 내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투명성을 높이려는 목적이었다.이 과정에서 은행의 자산운용업을 금지시키고 자회사 형태로 있는 자산운용사로 집중시키고자 하는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막판 은행의 강력한 로비에 밀려 은행에 신탁업무 겸영을 계속 허용함으로써 은행은 판매, 수탁, 운용 모두를 할 수 있게 됐다.강창희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은 “국내 가계 금융자산의 60% 가량이 은행예금에 집중돼 있지만 미국의 경우 13%에 불과하고 70~80%가 투자상품으로 운용된다”며 “은행 저축으로는 고령화에 대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은행 중심의 정책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분위기 휩쓸려 단타매매 치중”그렇다고 해서 자산운용회사(투신사)들이 잘하는 것도 아니다. 최근 증시의 변동성을 키운 주범 중 하나는 바로 자산운용회사들의 프로그램 매매라는 지적이 많다. 주식운용에 자신 없는 자산운용회사들이 외국인처럼 내재가치 위주의 장기정석 투자는 포기하고 초단기 프로그램 매매에 치중함에 따라 더 이상 증시의 버팀목이 아닌 장애물로 전락한 상황이다.또 다른 주요 기관투자가로서 연기금의 주식투자 활성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장기자금을 가진 연기금이 주식투자에 활발하게 나섬으로써 주식시장의 버팀목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부와 여당이 올해 하반기부터 주식투자를 원천적으로 금지한 연기금 관련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 전체 기금은 총 190조원으로 이중 51%(98조원)가 채권에 투자되고 있으며 주식비중은 전체 연기금의 6%에 불과한 실정이다. 주식시장에서 기관투자가로서 연기금 비중도 2.4%로 주요 국가의 20~30%에 비해 매우 낮은 상황이다.전문가들은 법개정에 대해 긍정적이나 연기금 등이 주식투자를 꺼리는 이유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다.신동성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연기금의 자산운용을 다양화한 기금관리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연기금의 주식투자에 대한 투자마인드 제고와 자산운용시스템 및 유연한 평가시스템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단기적 심리효과 이외에 연기금의 투자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그는 또 “연기금의 주식에 대한 투자규제 완화가 해당 연기금의 필요가 아니라 시장참여자와 정부당국의 주식시장 수요 확충을 위한 제3자의 필요에 의해 취해진 조치라는 점에서 각종 연기금이 실제 주식투자에 나설지는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실제 주식투자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연기금이 보수적인 투자 관행에서 벗어나 주식에 대한 투자 마인드를 제고해야 할 것이라는 설명이다.우재룡 한국펀드평가 사장은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성과평가와 보상기준 산정이 연간 단위로 이뤄져 전략적 자산배분과 투자지침 등 장기적 전략이 없다”며 “이러다 보니 채권위주로 운용하거나 시장분위기에 휩쓸려 단타매매에 치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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