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서 왕따 당하는 ‘조막손’

보유주식 비중 전체 16% 불과…개인투자자보다도 규모 작아

기관투자가(機關投資家ㆍInstitutional Investor)는 증시에서 일반인, 즉 개인투자자와 상반되는 투자주체다. 유가증권 투자로 생기는 수익을 주요한 수익원으로 하는 법인주주(法人株主)를 기관투자가로 지칭한다. 투신사(자산운용회사)ㆍ은행ㆍ증권보험ㆍ종합금융회사ㆍ상호저축은행 등 모든 금융회사와 각종 연금, 기금, 공제회 등이 기관투자가로 분류된다. 채권시장, 외환시장, 단기자금시장에서 기관투자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거래단위가 수백억원을 웃돌아 일반인의 시장참여가 원천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채권시장에서는 투신ㆍ연기금ㆍ보험사 중심으로, 단기자금 및 외환시장에서는 은행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특히 채권시장에서 국민연금이 ‘사자’에 나서고 있다는 소문만 나돌아도 채권가격이 꿈틀거릴 정도다.그러나 주식시장에서 기관투자가의 영향력은 그렇지 못하다. 무엇보다 절대적인 주식보유금액이 적기 때문이다. 거래소시장에서 기관투자가 비중은 16%로 외국인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원기 메릴린치증권 전무는 “한국 주식시장에서는 기관투자가가 없다”고 말한다. 국내증시의 지킴이 노릇을 해야 할 기관들이 외국인 눈치를 살피고 이들의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있는 게 서글픈 현주소다.61조원에 불과한 주식투자금액2003년 말 현재 투자주체별 보유주식의 시가총액 비중(거래소시장 기준)은 외국인 40.1%,개인 19.7%,일반법인 19%,기관투자가 16.7%,정부 4.5% 등이다. 국내 기관의 보유주식 규모가 개인투자자보다 작다.미국, 일본, 홍콩 등 선진국 주식시장에서 기관의 비중이 40~50%에 이른다는 점을 고려하면 국내 기관의 주식비중이 어느 정도 낮은지 가늠할 수 있다.증권전문가뿐만 아니라 금융당국자들도 “한국증시가 선진시장으로 진입하기 위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바로 제대로 된 기관투자가를 육성하는 일”이라고 목청을 돋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관투자가별 주식비중을 보면 은행과 투신이 5.9%와 4.6%로 가장 높다. 그 다음은 보험회사 2.8%,연기금 2.4%,증권회사 0.7%,상호저축은행 0.2%,종합금융 0.1% 등의 순이다.코스닥시장에서의 기관 비중은 더욱 초라하다.2003년 말 현재 코스닥시장의 투자주체별 보유주식 비중(시가총액 기준)을 보면 개인이 57.4%로 가장 높다. 그 다음은 일반법인 17.0%,외국인 14.4%,기관투자가 6.2%,정부 5.0% 등이다.기관별 보유 비중에서도 투신(3.2%)과 은행(1.5%)을 제외한 모든 기관들의 비중이 1%를 밑돌고 있다. 코스닥시장에서 기관들은 ‘조막손’에 불과한 실정이다.그렇다면 국내 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금액은 얼마나 될까. 지난 5월24일 시가총액(거래소 355조1,000억원, 코스닥 31조8,000억원)을 기준으로 산출한 국내 기관의 보유주식 금액은 거래소 상장주식 59조3,000억원어치, 코스닥 등록주식 1조9,000억원어치 등 총 61조2,800여억원이다.감소일로의 증시비중최대 기관투자가는 단연 투자신탁운용회사(자산운용회사)다. 투신사는 고객이 맡긴 돈으로 펀드를 조성, 이를 주식이나 채권 등으로 굴려 그 결과를 실적대로 되돌려주는 전문운용기관이다. 기관투자가가 가장 잘 발달돼 있는 미국 증시에서도 뮤추얼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회사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현재 국내 모든 투신사가 운용하는 펀드규모는 162조원. 이는 미국 최대 투신사인 피델리티의 운용자산 1조달러(약 1,200조원)의 13%에 불과하다. 국내 투신사가 어느 정도 초라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국내 투신사 펀드 가운데 주식에만 투자하는 주식형펀드는 8조5,000억원, 채권에만 투자하는 채권형펀드(MMF 포함)는 113조원, 주식과 채권에 모두 투자하는 혼합형펀드 41조원 등이다. 투신사 고객의 70%는 금융회사, 상장기업 등 법인이며 개인고객은 30% 수준이다. 투신사는 펀드로 돈이 들어오면 주식이나 채권을 사고, 환매(펀드의 자금인출)가 생기면 현금마련을 위해 주식 등을 처분한다. 2003년 4월 이후 주가가 1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상승했지만 투신권이 주식을 지속적으로 순매도한 것도 주식형펀드에서 환매가 발생했기 때문이다.은행은 고객이 맡긴 예금(고유계정)과 금전신탁(신탁계정)을 대출, 채권 및 주식투자 등으로 운용해 오다가 외환위기 이후 주식투자 규모를 대폭 줄였다. 고유계정의 주식투자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며 신탁계정도 은행당 1,000억원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행권의 주식보유 비중(거래소 기준 5.9%,금액 20조원)이 투신권(4.6%)보다 높은 것은 은행의 자사주, 상장사에 대한 출자전환 지분 등이 포함된 데 따른 것이다. 실제 주식투자 규모는 이보다 훨씬 적고, 증시영향력도 투신사에 비해 훨씬 낮다.보험사의 주식비중(2.8%)도 삼성생명, LG화재 등 대기업 계열 보험사의 계열사 지분이 포함된 것이다. 즉 실제 주식투자 비중은 극히 미미하다. 금융자산이 10조원이 넘는 삼성화재의 주식투자 금액도 1,000억원이 채 되지 않는다.증권사들도 90년대까지는 상품주식(고유계정) 투자를 활발하게 해 왔으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대폭 줄였다. 증권사 가운데 주식투자 규모가 가장 큰 동원증권의 상품주식 규모는 1,000억원 안팎에 불과하다.이처럼 투신사, 은행, 보험, 증권사 등의 주식투자 비중이 해마다 줄어드는 데 반해 연금, 기금은 주식투자 비중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지난 2000년 2조1,590억원이었던 국민연금의 주식투자금액(직접투자+간접투자)은 2002년 말 4조7,510억원, 2003년 말 6조9,033억원, 올 4월 말 8조2630억원 등으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교원공제회 등도 2001년 이후 주식투자 비중을 꾸준히 확대하는 추세다. 연기금이 주식투자를 늘리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저금리 때문이다. 저금리 영향으로 과거 주요 투자수단이었던 채권 투자수익률이 떨어지자 대체 투자수단으로 주식투자 비중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4대 연금을 제외한 나머지 연기금의 주식투자는 극히 미미하다.4대 연금을 포함한 연기금의 여유자금은 190조원에 이르지만 주식투자 비중은 4%에 불과하다. 연기금이 전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4%로 주요 선진국의 20~30%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 최근 정부가 기금관리기본법을 개정,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전면 허용키로 한 것도 연기금의 주식투자 비중을 확대시켜 증시 안전판으로서의 역할을 제고하자는 포석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주식=위험자산’ 인식 팽배국내 기관투자가들이 애초부터 나약한 존재는 아니었다. 외환위기 전인 96년 기관투자가의 보유주식 시가총액 비중은 30.7%에 달했다. 그 이전에는 기관 비중이 40%를 웃돌면서 국내증시를 호령하기도 했다.기관투자가의 증시영향력이 크게 줄어든 것은 IMF 외환위기의 충격이 결정타로 작용했다. 은행, 투신, 보험, 증권사 등 모든 기관투자가들은 주식을 잔뜩 안고 외환위기를 정면으로 맞았다. 당시 삼성전자, 포스코 등 핵심블루칩의 주가가 5만원 밑으로 떨어지고, 종합주가지수 300선이 무너지는 등 증시는 붕괴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94~95년 증시 활황기에 수천억원에서 수조원 규모의 주식투자를 해 왔던 기관들은 주가폭락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일부 은행, 투신사, 증권사는 주식투자 손실로 문을 닫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이때부터 국내 금융회사에서는 ‘주식투자=위험자산’이라는 등식이 싹텄다.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전세계 정보기술(IT) 경기 호황에 힘입어 국내증시가 다시 활황세로 접어든 99~2000년 국내 기관들은 ‘주식투자의 향수’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주식투자에 나서기도 했다. 외국인과 기관이 동시에 주식매수의 주체로 등장하면서 ‘쌍끌이 장세’가 연출되기도 했다.그러나 IT버블이 꺼지면서 증시가 침체의 늪으로 접어들자 기관들은 또다시 호된 시련을 겪었다. 기관들이 이처럼 수차례에 걸쳐 주가에 ‘농락’당하자 ‘주식은 잘해봤자 본전’이라는 심리가 뿌리내렸다. 대형보험사 한 임원은 “주식투자를 하지 않아서 남보다 수익이 떨어지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주식투자로 손실을 보면 그 날로 잘리는데 왜 주식투자를 확대하겠냐”고 털어놓았다.최근 몇 년간 기관의 주식 매매동향을 보면 기관들이 얼마나 주식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지난 2000년 국내 기관은 8조6,000억원어치 주식을 순매도했다. 이어 2001년에 2조7,000억원,2003년에는 8조9,000억원의 순매도를 기록했다. 올해 들어서 5월까지 기관들은 8조원 이상의 매도우위를 보이고 있다. 연기금을 제외한 증권, 보험, 투신, 은행, 종금 등 모든 기관들이 주식비중을 줄이고 있는 중이다.돋보기기관투자가 흥망성쇠89년 12·12조치 ‘부실의 원죄’우리나라에서 기관투자가의 역사는 곧 투자신탁회사의 역사다. 최초의 투자신탁회사는 한국투자개발공사가 70년 5월 설정한 1억원 규모의 주식형 수익증권이다. 당시 이 펀드는 연 26.0%를 기록했다.가능성을 확인한 정부는 74년 6월 5개 시중은행과 27개 증권회사의 출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투자신탁 전업회사인 한국투자신탁을 설립했다. 투자신탁 인구도 늘어 74년 1,316명에서 75년 1만명을 넘어섰고, 76년에는 7만4,811명으로 급증했다.지난 77년 한국투자개발공사가 증권감독원으로 해체되면서 공사의 증권투자신탁업무를 양수받아 두 번째 전업투신사인 대한투자신탁이 탄생했다. 이어 82년 7월 국민투자신탁(현 푸르덴셜투신)이 설립돼 대형 3대 투신사 체제를 갖추게 된다.주가가 본격적인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86년부터 성장국면에 접어들었다. 투자신탁 가입자수는 85년 말 113만명에서 88년 306만명으로 늘어났다. 투신사들이 명실공히 기관투자가로 우뚝 선 것이다. 89년에는 지방에 잇달아 투신사 설립을 허용하기도 했다.하지만 89년 정부가 이른바 12ㆍ12 증시안정화 대책을 발표하며 대형 3대 투신사에 주식매입자금을 무제한으로 지원하고 적극적인 주식매수를 유도하면서 부실이 싹텄다. 이후 투신사들은 90년대부터 주가가 하락하면서 중병을 앓기 시작했다. 대규모 주식매입자금에 따른 이자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IMF 이후 살인적인 고금리 덕에 채권형펀드에 시중자금이 몰려들었다. 97년 94조원이었던 수탁고가 1년 만에 198조원으로 급증했다. 채권형펀드에 이어 주가가 오르면서 주식형펀드에도 돈이 몰렸다. 그러나 99년 7월 대우사태와 2003년 카드채 대란은 연이어 투신사에 직격탄을 날렸다. 투자자들로부터 환매요구가 잇따랐지만 투신사들은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 신뢰에 치명적 상처를 입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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