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류’조롱받아도 경제에 ‘누’ 안 끼쳐

오쿠다 회장의 소신 발언2003년 11월 하순 어느 날 오후. 도요타자동차의 회장인 오쿠다 히로시 일본 게이단렌 회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는 대뜸 “며칠 전 총리께서 재가하신 도로공단 총재 인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됐다”고 따지고 들었다.오쿠다 회장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두텁다고는 해도 재계 대표가 공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인사를 놓고 국정을 맡은 최고지도자 앞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월권에 해당하는 일. 더욱이 고이즈미 총리는 ‘대통령형 총리’로 불릴 정도로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게이단렌 실무자들은 ‘고성이 오가지나 않을까’ 마음을 바짝 졸였다.하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다. 회장께서 마음을 풀어라”며 달랬다. 면담을 마친 오쿠다 회장은 “싸운 것이 아니라 경제계의 여론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라며 태도를 누그러뜨렸다.그로부터 반년 전에도 오쿠다 회장의 소신 발언은 일본 사회에서 화제가 됐다.“우선 장관들의 사표부터 받겠다. 그런 다음 장관은 차관의 사표를 받고, 차관은 국장들의 사표를 받으라고 하겠다.”지난해 3월 일본 정부가 유권자들과의 대화 기회를 늘릴 목적으로 마련한 공개 타운미팅. ‘당신이 총리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오쿠다 회장은 “기업에서는 사장이 시키는 일을 부사장이 하지 않으면 사람을 갈아치운다”며 사표론을 끄집어냈다. 고이즈미 총리가 내세운 개혁공약이 자민당 내부의 저항세력은 물론 정치인 출신 각료들의 벽에 부딪히면서 진척이 없는 현실을 꼬집은 발언이었다.이 자리에는 자민당 중진인 히라누마 다케오 당시 경제산업상도 참석한 상태. 히라누마 경제산업상은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예를 갖췄다.오쿠다 회장은 후생노동성이 근로자 정년연장을 추진하자 담당 장관과 논전을 벌인 끝에 보류시키기도 했다.‘금권정치 탈피’ 몸부림일본 사회에는 아직도 ‘관존민비’, 또는 ‘사농공상’의 전통이 남아 있다. 이런 전근대적 사고방식은 정관계와 재계의 관계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한다. 일본 경제가 흥청댔던 70년대와 8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은행이나 공기업 간부가 감독관청의 관리나 유력 정치인에게 접대하는 관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특정업계의 이익을 공공연히 대변하는 이른바 ‘족(族)의원’이 버젓이 행세하는 것도 정치권-관료-업계를 잇는 강력한 유착관계가 빚어낸 일본만의 특이한 현상이다.예컨대 정부가 발주하는 공공공사 물량이 줄어든다 싶으면 건설업계는 해당 상임위 소속의 건설족 의원에게 로비해 예산집행 규모가 늘어나도록 한다. 도로공단 민영화에 가장 반대하는 의원은 공단측으로부터 갖가지 편의를 제공받아 온 ‘도로족’ 의원이고, 우편공단 민영화 얘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우편족’들이 들고 일어선다.각 파벌이 정기적으로 파티를 열어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일본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유력 파벌이 개최하는 파티 초대장을 받으면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은 장당 1만엔씩하는 파티권을 마지못해 단체로 구입한다.하지만 일각에서는 과거처럼 음성적으로 정치자금을 주고받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생겨난 현상이라는 점을 들어 일본 정치가 깨끗해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인다.금권정치로 악명이 높던 일본이지만 요즘은 정치자금 부정에 관한 한 액수를 불문하고 엄격히 따진다.지난해 11월 중의원 총선거가 끝난 뒤 한동안 일본 정가에는 ‘연좌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연좌제란 후보자와 일정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선거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으면 법원이 해당 후보자의 당선을 취소토록 한 제도. 본인이 위법행위에 관여하지 않았어도,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항변해도 소용없다.제1야당인 민주당의 의원 2명은 이들을 지지하는 노조 간부들이 통신회사에 의뢰해 불법 전화 선거운동을 벌인 사실이 적발돼 기소됐다. 수도권 사이타마현에서 당선된 자민당 의원도 중앙당에서 받은 돈 중 일부가 운동원 동원에 쓰인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원직을 박탈당했다.어찌 보면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흔히 생겨날 만한 일로 여겨지지만 일본 사회는 성토 일색이었다. 은 “국민의 세금인 정당교부금을 불법운동에 쓴 것은 죄질이 나쁘다”며 “21세기에도 이런 범죄가 남아 있다니”라며 개탄했다.‘그래도 2류는 된다’일본 경제의 회복을 고이즈미 총리의 뚝심과 연결짓는 시각도 있다.지난해 9월 개각을 앞두고 자민당의 실력자인 모리 요시로 전 총리와 아오키 미키오 참의원 간사장 등은 다케나카 헤이조 경제재정ㆍ금융상의 교체를 요구했다. 표면적으로는 경제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제로는 금융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게이오대 교수 출신인 그는 부실채권 처리 등 금융개혁은 물론 우정사업 및 도로공단 민영화 등의 개혁 밑그림을 그린 인물. 고이즈미 총리는 당내 반발을 무릅쓰고 다케나카 경제재정ㆍ금융상을 유임시켰다. 다른 것은 양보하더라도 구조개혁의 상징인 그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개각 후 고이즈미 정권의 지지율은 11%포인트 상승했다. 국민여론을 확인한 자민당 내 저항세력은 현실을 받아들였다.일본 언론은 세계경제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정치분야는 뒤떨어져 있다고 개탄한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지 않는다는 점에서 2류는 된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오쿠다 회장의 사례에서 확인된 것처럼 재계가 설령 고언을 해도 일본 정치권은 진지하게 경청한다. 한 경제평론가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폐허에서 일본을 부자나라로 이끈 주역이 기업이라는 점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구조개혁 입법을 놓고 자민당 내의 힘겨루기가 치열하고, 여야간에도 입씨름이 벌어지지만 의회 내 갈등으로 기업활동이 차질을 빚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기업 민영화는 본궤도에 올랐고 경제특구 설치, 금융부실 해소, 재정개혁 등 다른 분야의 정책들도 예정대로 진행 중이다.우익 성격이라는 점이 한국 입장에서는 아쉽지만 당적을 초월한 초당파 의원 모임이 많다는 것도 일본 정계의 강점으로 꼽힌다. ‘러ㆍ일전쟁에서 배우는 모임’ ‘북방 영토를 생각하는 모임’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모임’ 등은 주요 현안에 대해 정치권의 뜻을 모아 여론을 주도한다. 정치부의 마키노 요시히로기자는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절충과 타협의 관행에 익숙해선지 지나고 보면 경제에 해가 되는 정책은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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