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소식 ‘뚝’…춘투시즌도 ‘썰렁’

최근 포스코 노사가 올해 임금을 동결키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노사관계가 좋지 못하기로는 세계적으로도 정평이 난 우리나라인 만큼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고 있는 유수 대기업이 임금동결에 합의한 것은 정말 대단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임금을 동결키로 한 목적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근로자들과의 임금 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더욱 그러했다.그런데 포스코가 노사합의를 발표하면서 밝힌 내용이 주목을 끈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가 호황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년 연속 임금을 동결하면서 여유자금을 설비투자와 신차개발에 집중하고 있는데 자극을 받았다”고 밝힌 것이다.포스코뿐만 아니다. 만년 노사분규 기업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올해는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정리해고를 하지 않기로 하는 내용의 노사합의를 전격 도출해 신선한 충격을 준 통일중공업 역시 ‘도요타식 노사합의’라고 해 세간의 화제를 모았었다.도대체 도요타자동차의 노사관계가 어떠하기에 이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이름이 등장하는 것일까. 도요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계 선두권을 달리는 일본의 대표적 자동차회사다. 재무구조가 튼튼하기 짝이 없고 현금 보유량이 넘쳐나 ‘도요타 은행’으로 불리기도 한다.이런 도요타자동차가 3년 연속 임금을 동결했다니 노사분규가 줄을 잇는 우리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게 당연한 이치다. 사실 도요타는 근로자를 상당폭 줄이더라도 생산에는 아무런 차질이 없다. 그런데도 왜 회사는 인건비 부담을 감수하면서 고용을 그대로 유지해 나가고 근로자들은 임금동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일본식 경영시스템에 있다. 도요타는 물론 대부분의 일본 기업들이 도입하고 있는 이 시스템은 노사관계 안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의 기세가 욱일승천하던 때는 미국조차도 도입해 보려고 기를 썼던 이 시스템은 종신고용제도와 연공서열제도를 핵심으로 한다. 종신고용제도는 말 그대로 한 번 입사한 직원은 회사가 정년 때까지 일자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고 연공서열제도는 회사에 입사한 지 오래된 직원일수록 그만큼 기여한 바가 크다고 간주해 우대해 주는 제도다.온몸 바쳐 충성하는 ‘회사인간’ 늘어일본식 경영시스템은 일본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제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기업들은 종업원의 충성심을 끌어낼 수 있었고 직장인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잊고 일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노사간에 깊은 신뢰관계가 구축됐다.종신고용제는 1904년의 러ㆍ일전쟁 직후 기계산업 발전과 함께 기업들이 노동력 확보를 위해 도입했고, 2차 세계대전 중 관련법이 만들어졌다. 전쟁으로 피폐했던 일본 경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쟁 물자를 공급하면서 다시 부흥의 길에 올라섰는데 종신고용제는 이를 계기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고도성장기에 접어들자 사용자들이 인력확보를 위해 이 제도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연공서열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 등장했으며 종신고용제를 뒷받침해 주는 역할을 했다. 회사에 얼마나 오랫동안 기여했는지를 기준으로 임금과 대우를 결정하는 것은 가장 객관적이면서 말썽 없이 조직을 끌어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정년이 보장되고 내부승진이 기본이 되는 만큼 신입사원도 장기근속자도 불만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이런 두 가지 핵심요소가 완전히 뿌리를 내리자 기업조직의 위계질서도 확고해졌다. 한편으로는 미국이나 유럽지역 국가들이 흉내내기 힘든 가족적 분위기도 생겨났다. 직장을 가정처럼 여기다 보니 회사에 온몸을 바쳐 충성하는 ‘회사 인간’들이 양산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사가 격렬하게 대립하거나 정면충돌로 치닫는다면 오히려 의아해 할 것이다. 일본의 노사관계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안정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구조에 기인한다는 이야기다.물론 일본도 노동자들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했던 50년대부터 60년대 초반까지는 노사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투적 노동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고도성장기로 들어선 이후 이런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그들의 임금협상이란 것은 1%도 안되는 인상률 차이를 두고 밀고 당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춘투 시즌에도 고조된 투쟁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요즘 일본도 실업률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비정규직 근로자수 또한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10년 전에 비해 50%나 증가하면서 전체 근로자의 30%를 넘어섰다. 게다가 소위 리스트라(리스트럭처링ㆍ구조조정)를 하는 기업들도 급증해 노사관계가 점차 악화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천만의 말씀이다.일본 직장인들은 설혹 직장에서 밀려난 경우라 하더라도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버블경제 붕괴 이후 근로자들의 생활여건이 많이 힘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가족적 분위기와 신뢰관계가 수십년간 지속되면서 노조와 사용자가 적대적이라는 생각 자체가 거의 없어져 버린 결과다. 최근 의 일본 현지 취재에서 렌고(連合ㆍ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의 노동조건국장이 “국경 없는 인력시장에서 기업들이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임금이 싼 비정규직을 쓰는데 우리가 뭐라고 따질 수 있겠어요”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일본은 노동계 간부들조차 노동자인지 사용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생각의 기준이 회사 상황이 어떠하냐에 모아져 있다.일각에서는 미국식 성과제도가 확산되면서 일본형 경영도 이제 종말을 고할 때가 다가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실상을 모르는 소리다. 미국식 성과제를 도입하는 기업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가령 도입하더라도 전면적으로 제도를 도입하는 경우는 드물다. 성과제 중 일부를 고유의 경영시스템에 접목해 효율을 높여 보자는 시도를 하고 있을 뿐이다.‘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불황이 이어지면서 한때는 일본형 경영시스템이 경영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목소리가 높기도 했지만 경제가 회복국면에 들어서자 이 제도에 대한 자신감까지 함께 회복하고 있는 것이 최근의 흐름이다. 일본형 경영체제가 그대로 지속된다고 한다면 최소한 노사관계가 위기국면으로 빠져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뜻이 된다.그렇다면 대부분 기업들이 일본식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왜 노사갈등이 심한 것일까. 아마도 기업발전의 역사에서 큰 차이가 나는데다 민족성이 다른 점도 다소 덧붙여진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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