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ㆍ대립ㆍ불평불만 ‘망조’ 공통적

‘내 탓이오’ 대신 견제만… ‘노조만은 안된다’ 는 시각도 위험

“경영진이 독선을 행하다 결국 망했다”, “노조가 극성을 부려 기업을 꾸려갈 수가 없다”….노사가 극한 대립을 벌이다 문을 닫는 경우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직원들은 경영진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경영진은 노조 혹은 직원들을 원망한다. ‘내 탓이오’ 하며 과오를 책임지려 나서는 사례는 보기 힘들다. 최후의 상황에 도달한 기업들은 ‘망할 수밖에 없는’ 공통점이 있다.건강한 일터가 ‘일하기에 좋은 관계ㆍ제도ㆍ관행을 정립한 곳’이라면, 망하기 쉬운 기업은 그 반대이다. 건강한 일터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신뢰ㆍ자부심ㆍ재미 대신, 불신ㆍ대립ㆍ불평불만이 팽배하다. 경영자는 직원을 ‘사람’보다는 ‘일하는 기계’로 보고 직원은 경영자를 믿고 따라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의사소통은 꽉 막혀 있고 서로를 배려하는 분위기나 제도는 찾을 수 없다. 이처럼 노사가 서로 딴 곳을 바라보는 기업은 ‘곧 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패망의 지름길’ 따로 있다기업을 패망에 이르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는 의사소통의 부재. 특히 조직 구성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대화를 회피하는 경영진이 이끄는 기업은 건강한 일터와는 거리가 멀기 십상이다.부산광역시 소재 H학원의 사례는 대화의 단절이 얼마나 순식간에 회사를 망하게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작게 시작해 제법 큰 규모로 성장한 H학원 경영진은 강사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노조를 만들자 합리적인 대응은 뒷전으로 둔 채 피하기부터 했다. 노조가 대화를 요구하면 ‘잠깐 기다려라’ ‘나중에 하자’는 식이었던 것.학원장은 노조가 자신을 죄인처럼 대우한다고 섭섭해 하는 한편 노조는 학원장이 대화를 피하면서 노조를 우습게 안다고 생각했다. 도중에 문서 도난사건까지 발생하면서 노사간 오해의 골은 깊어졌다. 학원측은 노조를 괘씸하게 여긴 나머지 조합원 강사에 대해 일방적으로 해고를 예고하고 노조는 노동위원회에 조정신청을 낸 후 파업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도 대화는 없었다. 학원측이나 노조측이나 대화하길 주저했다. 불과 3개월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학원 이미지는 떨어지고 원생수는 줄어들었다. 경영이 악화 일로에 들어서자 결국 학원측은 폐업을 결정했다. 해고 조치된 L씨는 뒤늦게 “이러려고 노조 만든 게 아닌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고 학원장은 “노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고 횡포가 두려웠다”고 털어놓았다.H학원의 사례는 노조가 처음 설립된 중소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서로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며 오해를 키우다 돌이킬 수 없는 종국을 맞기 일쑤다.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야 노사 쌍방이 ‘본의’가 아니었다며 뒤늦게 안타까워하는 경우도 많다.대구에 소재한 G공사는 재무구조가 건전한 우량 중소기업으로 코스닥 등록을 준비하던 중에 중요한 정보를 직원들과 공유하지 않아 화를 자초했다. 회사가 제2공장 건설 추진 사실을 직원에게 숨겨 불신이 깊어진데다 노조사무실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된 사실이 확인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알려서 좋을 게 없다’는 사고가 노사 갈등의 축이 된 경우다.서울 J출판인쇄공장은 노사가 견제의 고삐를 늦추지 않다가 상황을 악화시킨 예다. 경영난을 겪던 회사가 노조에 대해 ‘회사가 어려우니 도와 달라’고 한 것을 노조는 ‘노조를 해산하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노조가 강경 투쟁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고 결국 직장폐쇄로 이어졌다. 노사가 합심해서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음에도 끝까지 견제와 대립으로 내달린 결과다.반면 극적인 대화 재개와 상호 이해로 수렁에 빠진 회사를 크게 키워낸 경우도 있다.모범적인 노사관계, 특히 모성보호 경영으로 유명해진 MEMC코리아는 불과 7년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노사대립으로 존폐를 걱정하던 형편이었다. 반도체 핵심소재인 실리콘 웨이퍼를 생산하는 미국계 다국적 기업인 이 회사는 97년 7월 노사협상이 결렬되자 노조가 파업을 단행했다.회사는 이에 맞서 25일 동안 직장을 폐쇄했다. 때마침 닥쳐온 외환위기 탓에 96년 말 24시간 교대근무에 470억원 흑자를 냈던 것에서 가동률 35%에다 적자상태로 돌아섰다.팽팽한 대립은 98년 초 노조가 4조 3교대 근무와 무급순환휴직, 임금반납에 동의하는 대신 구조조정을 하지 않기로 회사와 합의하면서 해소되기 시작했다. 또 회사는 무해고 선언과 함께 투명경영을 통해 이익을 노동자에게 돌려주기로 했다.이후 MEMC코리아는 매년 흑자폭을 넓히며 ‘일하기 좋은 회사’로 변신했다. 현재는 남녀고용평등 모성보호 우수기업, 신노사문화 우수기업 등으로 선정될 만큼 뛰어난 경영관리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여성사원에 대한 복지제도가 잘돼 있어 평균 근속연수가 동종업체에 비해 두 배 가량 긴 6.6년에 이른다.이처럼 건강한 일터의 전제조건인 노사협력을 위해선 대화 외에도 작은 것도 숨김없이 함께하는 ‘공유’, 한 발자국 물러나 서로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양보’와 내 주장에 앞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 등 여러가지 열쇠가 필요하다.특히 중소기업계 경영자 전반에서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노조만은 안된다’는 사고는 노사관계의 유연성을 해친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노사관계 실패사례를 담은 사례집 를 펴낸 노동부 노사조정과 이완영 과장은 “사용자는 노조를 적대적 대상이 아닌 건강한 회사발전에 기여하는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고 밝히고 “노조 역시 조합원의 이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한편 회사의 경영상태를 감안한 활동을 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과장은 또 “극심한 대립적 관계였던 노사가 어떤 계기를 통해 좋은 관계로 변화하는 예를 여러번 봤다”며 “노사가 서로를 상생의 파트너로 인식한다면 그 무엇도 기업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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