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회생 앞장…직장문화까지 바꿔

지난 5월 일본에서는 세계적 게임기 메이커인 세가가 자사의 최대주주이자 파치스로(‘파친코’와 비슷한 종류의 도박성 게임기) 메이커인 사미와 경영통합을 실시한다고 발표해 큰 충격을 던졌다. 게임기와 관련해서는 세계시장에서 일세를 풍미하기도 했던 세가가 경영난에 직면하면서 도박게임기 메이커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된 사실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이들의 경영통합 방식이었다.양사가 취한 방식은 공동으로 ‘세가사미홀딩스’라는 이름의 지주회사를 설립한다는 것. 세가의 소프트웨어 개발력과 사미의 자금력을 합쳐 시너지 효과를 올리면서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세가가 사미에 흡수당하는 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데 지나지 않는다. 사미 주식과 세가 주식의 가치가 1대0.28로 평가된 데서도 그런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오는 10월 지주회사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고 나면 그 밑으로 편입되는 세가의 운명이 또 어찌 변할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어쨌든 이들 두 회사의 결합은 일본에서 지주회사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일반화돼 가고 있는지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지난 5월만 해도 스미토모상사가 산하의 발전사업회사와 전력소매회사를 통괄하는 지주회사를 설립했고 올림푸스도 영상사업과 의료사업을 분사하면서 지주회사로 변신했다. 최근 새로 등장한 지주회사는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대형 유통업체인 세이부백화점과 소고는 밀레니엄리테일링이라는 지주회사에 속해 있으며 한국에 잘 알려진 소프트방크 NTT 다이에 역시 지주회사다. 소니는 지난 3월 총자산이 1,763억엔에 이르고 일본 최초로 산하에 은행과 생명보험회사, 손해보험회사를 한꺼번에 거느리는 소니파이낸셜홀딩스라는 금융지주회사의 설립인가를 얻었다. 심지어 부동산 재벌까지 지주회사를 설립해 전국의 산하 부동산업체들을 관리하고 있을 정도다.일본에서 지주회사 설립 붐이 일어난 것은 지난 97년 지주회사 설립에 대한 금지조항이 크게 완화된 이후의 일이다. 과거 재벌의 상징이었던 지주회사를 부활시키기로 한 일본 정부의 결정은 버블붕괴 여파로 불황이 이어지자 경제에 다시 힘을 불어넣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경제의 활력 회복을 위해서는 지주회사 체제가 필요하다는 경제계의 건의를 받아들여 원칙적으로 설립을 자유화하면서 산하 기업의 총자산이 15조엔을 넘을 경우에만 설립을 금지토록 했다. 또 자산규모가 3,000억엔을 밑돌 경우에는 신고를 하지 않고도 지주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금융지주회사의 경우는 98년 3월에 관련 법이 도입됐다. 파산 금융기관을 처리하고 금융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금융지주회사 아래 업태별 자회사를 두는 형태가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 도입 배경이다. 실제 금융기관들은 지주회사 설립을 계기로 잇달아 합병을 선언하는 것은 물론 중복 점포의 통폐합과 인력감축, 사무처리 전산화 등도 강력히 추진해 나가고 있다. 지난 2000년 금융지주회사로 공식출범한 미즈호홀딩스를 비롯한 대형 금융지주회사들이 금융개혁을 앞장서 이끌고 있다.일본이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한 것은 재계의 의견을 존중하는 쪽으로 대기업 정책이 크게 바뀌었음을 뜻한다. 경제계는 일찍부터 지주회사를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지주회사가 존재하면 산하 자회사와의 역할 분담이 명확해져 경영과 사업을 분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강력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정부를 설득해 왔다. 또 각 사업부문을 분사화함으로써 비용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각 부문에 적합한 고용형태와 임금체제를 효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특히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지주회사를 인정하고 있는데 유독 일본만이 이를 규제해 기업의 경쟁력을 스스로 잠식할 필요가 있느냐며 정부에 대한 압박을 계속했다. 정부기관 중에서도 산업부문을 직접 담당하던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이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됐다고 해서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재계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경제력 집중 심화 등을 이유로 지주회사 부활에 강력한 반대입장을 취해왔던 공정거래위원회도 전체 국익을 생각해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결국은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일본에 지주회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97년부터 설립이 허용된 것은 순수지주회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자회사를 지배하면서 스스로 사업도 영위하는 사업형 지주회사는 대단히 많았다. 도요타, 미쓰이, 미쓰비시, 마쓰시타 등 대부분 기업들은 적게는 수십개에서 많게는 수백개에 이르는 자회사들을 거느리는 사업형 지주회사들이다.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순수지주회사는 자체적인 사업활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자회사를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다. 운영자금은 자회사로부터의 배당금과 금리수입으로 충당하는 것이 대부분이다.대표적 지주회사들을 몇 군데 살펴보자.NTT의 경우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자회사 주식에서 생기는 배당수입을 기본으로 하면서 자회사에 대한 경영서비스 수입, 브랜드료, 계약에 의한 R&D용역 대가 수입 등으로 회사를 운영한다. 지난 97년 일본 최초로 순수지주회사로 출범한 다이에 역시 비슷한 형태의 수입을 기본으로 하면서 미상장 자회사의 기업공개를 통해 자본이득을 올린다는 전략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소프트방크의 경우는 벤처기업을 설립 또는 인수하거나 일정 지분을 투자한 후에 기업공개를 통해 자본이득을 수취하는 형태를 수익확보 모델로 하고 있다.사실 일본에서 지주회사는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산업이 크게 발달해 개인경영 형태가 한계에 도달하면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해 1909년에 미쓰이, 1912년 야스다, 1917년 미쓰비시, 1921년 스미토모 등이 차례로 등장했다. 이들 기업집단은 최고지주회사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으며 최고지주회사는 창업 가족을 중심으로 한 동족 집단이 장악했다. 최고지주회사는 직계 자회사를 거느리고 직계 자회사는 다음 자회사를 거느리는 식의 피라미드형 체제였고, 주식의 소유 구조는 최고지주회사의 소유, 가족 소유, 자회사간 상호보유라는 주요 3가지 형태가 있었다.2차세계대전 후 일본에 진입한 연합군은 재벌구조가 침략전쟁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보고 경제민주화를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83개에 달하는 지주회사를 해체해 버렸고 독점금지법을 제정, 설립 자체를 금지했다.1949년 지주회사를 일부 허용하긴 했지만 대상은 사업형 지주회사에 국한됐다. 말하자면 순수지주회사는 50여년 만에 부활한 셈이다.지주회사가 다시 등장하면서 일본에서는 기업문화도 많이 바뀌고 있다. 그동안은 그룹 전체를 통괄할 주체가 없어 사장단 회의 등을 통해 그룹의 운용방향을 결정해 왔던 대기업들이 지금은 지주회사를 통해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최근 들어 일본 재계에서 기업합병이나 분사 움직임 등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과거 같은 회사에서 같은 봉급을 받던 근로자들의 경우도 부서별로 회사가 분리되면서 서로 다른 임금 기준을 적용받기도 하는 등 경제계 전반에 큰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기도 하다. 지주회사의 부활은 기업은 물론 직장인들의 풍속도까지 크게 바꿔놓고 있는 셈이다.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