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라도 아프지 않다면”

갈 곳 없는 노인들의 해방구… 자식ㆍ나라 걱정 앞서

노인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간 서울 탑골공원은 썰렁했다. 봄비로 인해 쌀쌀해진 날씨 탓이려니 했지만 그러기에는 봄기운이 너무 완연했다. 알고 보니 노인들의 아지트가 종묘공원으로 옮겨진 뒤였다. 지난해부터 문화재보호를 이유로 탑골공원 이용에 제약을 받으면서 대이동이 시작됐다는 것.종로통을 끼고 탑골공원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종묘공원은 한마디로 인산인해. 담장이 없는 구조 때문인지 탑골공원보다 사람들이 더 넘쳐 보였다. 경로우대증만 있으면 서울 근교 어디서든 이곳까지 무료로 올 수 있다. 점심 한 끼는 종교단체 등에서 제공하는 식사로 해결된다. 몸만 움직일 수 있다면 돈 한푼 안 들이고 남의 눈치 보지 않으며 소일할 수 있는 이곳은 일종의 ‘어르신들의 해방구’다. 특히 주머니사정이 넉넉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대부분이 넉넉지 않지만….최근 들어 이곳을 찾는 사람이 더욱 늘었다고 한다. 불경기 탓이다.이곳에서 10년째 커피를 팔고 있다는 신영미씨(가명ㆍ52)는 “올 들어 노인들이 눈에 띄게 늘었지만 매상은 오히려 지난해 가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고 하소연한다. “불경기로 자식들이 돈을 못 버니까 노인들의 주머니사정도 같이 나빠진 것 같다”는 나름대로의 분석도 덧붙였다.옆자리의 옷 파는 상인에게 물어봐도 벌써 한나절인데 “아직 개시도 못했다”고 한다.노인들에게 말을 붙여 보면 하나같이 정치문제로 시작해 경제문제로 대화가 귀결된다. 자식 걱정도 빠지지 않는 주요 메뉴다.74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장해 보이는 김경도씨(서울 가리봉동)는 목수 출신이다. 올 2월까지 한 달에 20일이 넘게 공사현장에서 남들과 똑같이 일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택건설경기가 급속히 꺾이면서 더 이상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김씨는 “장사가 안돼 생활조차 힘든 막내아들의 8살 된 딸을 맡아 키우고 있다”면서 “나는 일을 못해도 어쩔 수 없지만 자식들은 빨리 돈을 벌어 기반을 잡았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돈 만지는 경리 일이 주특기인 정한섭씨(75ㆍ서울 후암동)는 6ㆍ25 참전용사 출신이다. 그는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이 용돈에 도움이 되지만 노부부가 살림하기에는 부족해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받아쓴다고 한다. “생각 같아서는 어떤 일자리든 당장 잡고 싶지만, 젊은이들도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인데 그런 마음을 갖는 것조차 미안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만나는 노인들마다 나라 걱정과 자식 걱정에 자신에 관한 관심은 뒷전이었다. 노인복지를 위해 무엇이 필요하냐는 다소 딱딱한 질문을 던졌다.“노인복지관에 가면 공짜로 컴퓨터도 배우고 운동도 하고 밥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김순집씨(81ㆍ서울 순화동)는 “하지만 사람도 많고 절차도 번거로워 이곳 종묘공원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여러 시설과 관심은 고맙지만 김씨는 “이곳이나마 거르지 않고 나올 수 있도록 몸이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결국 행복한 노인의 삶은 나라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본인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단상(斷想)이 스쳐지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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