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기업인… 서민경제‘안정’주력

1980년 5월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군복무를 하던 이동명 후보는 시위진압의 명령을 받고 광주로 내려갔다. 한 민족 간에 총을 쏘며 피를 흘리던 그 비극의 현장에서 이후보는 태어나 처음으로 정치에 대한 생각을 했다.“군사독재의 실상을 봤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비극이 멈추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20대 초반의 나이에 정치인에 대한 꿈을 품었지만 그후로 오랫동안 이후보는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먹고사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기 때문이다.이후보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처음 시작한 일은 문구업계의 점원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돼 부산 괴정에서 문구점을 창업한 것을 시작으로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군제대 후에는 슈퍼마켓을 창업해 점차 덩치를 키워 나갔다. 현재는 800평 규모의 할인점 2곳과 건설회사를 경영하고 있다.“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누구보다 서민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고 자부합니다. 또 나이에 비해 기업 경영의 경험이 풍부해 실물경제에도 밝습니다. 서민을 위한 경제정책을 펼쳐나갈 계획입니다.”이후보는 생필품을 비롯한 소비재 물가는 서민경제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만큼 반드시 안정시켜야 한다고 지적한다. 서민아파트 보급에도 앞장설 계획이다. 지역개발의 묘수로는 관광산업 육성을 내세우고 있다. 이를 위해 남해안 관광벨트 개발, 전통 향토음식 개발, 지역 축제 이벤트를 집중 지원한다는 계획이다.이후보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87년 민주당에 입당하면서다. 지금까지 부산시 광역의원선거와 민주당 경남 비례대표선거 등 2번의 출마경력이 있지만 모두 낙선의 고배를 들었다. 특히 아쉬웠던 것은 2002년의 민주당 비례대표선거였다. 당시 표결 결과 이후보는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당의 여성대표 우대정책에 따라 2번으로 지명돼 국회 진출에 실패했다.이후보는 스스로 ‘소신을 지키는 정치인’이라고 자부한다. 87년 민주당 입당 이후 한 번도 당적을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을 했을 때도 따라가지 않고 이기택 전 총재를 도와 신당 창당에 앞장섰다. 최근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으로 분당될 때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와해 위기에 직면한 민주당 경남도지부의 지부장 직무대행을 맡아 조직 재정비에 나서고 있다.약력: 1958년 경남 산청 출생, 1973년 신등중학교 졸업, 1995년 부산 금정구 광역의원 출마, 2003년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고등학교 졸업, 2004년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학년 재학, 세일마트 사장, 세일건설주식회사 대표이사, 민주당 경남도지부장 직무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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