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르고, 라르고’… 식탁에 부는 느림 바람

‘7일을 기다리면 건강한 채소를 맛볼 수 있습니다.’유기농 전문업체 유기농하우스는 지난 7월 말 독특한 상품을 출시했다. 무순, 브로콜리 등 야채의 씨앗을 화분, 흙과 세트화한 새싹채소가 바로 그것. 커피배양토에 채소를 키워 먹을 수 있는 ‘웰빙 새싹채소’를 전국 15개 매장과 인터넷쇼핑몰(www.uginong.com)에 내놓은 것이다. 한재욱 유기농하우스 사장은 “미국에서 새싹채소가 일반 채소와 비교해 5~20배까지 건강에 좋은 성분을 갖고 있다는 논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면서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히트상품이 됐다”고 상품기획의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또 “시간이 걸리더라도 건강에 좋은 것이라면 키워서라도 먹겠다는 슬로푸드 바람이 반영된 덕분에 출시 초기부터 반응이 좋다”고 덧붙였다.패스트푸드 시대가 가고 슬로푸드 시대가 왔다. 패스트푸드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보도가 연일 쏟아지는 가운데 웰빙 바람을 타고 슬로푸드 물결이 일고 있다. 따라서 대안운동으로서 등장했던 슬로푸드 운동이 마케터들에게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작용하면서 비즈니스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유기농하우스의 새싹채소 판매처럼 틈새시장이 생겨나는가 하면 슬로푸드를 키워드로 한 마케팅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기도 한다.패스트푸드의 대명사 햄버거는 슬로푸드의 유행이 달가울 리 없는 아이템이다. 하지만 햄버거업계 역시 슬로푸드 바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냈다. 이름 하여 ‘홈메이드버거’.원래 햄버거 시장은 클럽햄버거, 홈메이드햄버거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유독 패스트푸드 중심으로 시장이 커 온 게 사실이다. 따라서 슬로푸드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시장의 정상화가 이뤄지고 있는 셈.대표적 업체인 프레쉬니스버거는 일본계 프랜차이즈업체로 지난해 10월에 국내에 진출했다. ‘미리 만들어놓지 않는 슬로푸드’를 컨셉으로 하는 프레쉬니스버거는 현재 명동, 압구정동 등 서울 주요 지역에 5개의 매장이 있다. 가을께부터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매장을 늘려갈 계획이다. 이 업체에서는 유기농 토마토 등 친환경 재료를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일본 본사 사장인 구리하라 미키오씨는 건축가 출신으로 실제 ‘사람냄새 나는 가게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이 회사를 세웠다고 한다.이제 유기농 채소나 유기농 재료를 쓰는 제품의 인기는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다. 롯데마트의 경우 올 상반기 유기농 야채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5배 늘었다. 롯데마트측에 따르면 녹차원의 유기농 녹차나 유기농 찹쌀흑미 등은 지난해에 비해 3배 오른 매출을 기록했다.트렌드에 민감한 유통업체들이 이런 유행을 놓칠 리 없다. 주요 백화점들은 올 상반기에 슬로푸드 관련 이벤트를 벌였다. 롯데백화점의 경우 6월 초에는 잠실점은 같은달 하순에는 강남점에서 ‘제1회 슬로푸드 페스티벌’을 진행했다. 잠실점은 행사기간 중 하루 매출이 1,000만원을 기록하는 등 좋은 반응을 얻었다. 따라서 이 같은 행사는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초부터 ‘친환경농산물’ 매장을 강화해 올 4월에는 강남점 식품매장에 ‘웰빙하우스’를 새로 열었다. 백화점측은 슬로푸드의 컨셉을 소비자들에게 안전성을 보장하고 미래의 수요에 대비한 상품개발까지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이미 7월부터는 그동안 신세계 직영목장을 통해 실시하던 생산이력제를 고객이 확인할 수 있도록 시스템화하고 있다.롯데호텔 역시 지난 5월 웰빙족을 겨냥한 ‘롯데호텔서울 슬로푸드페스티벌’을 개최했다. “획일화된 패스트푸드 맛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건강과 더불어 식사나 미각의 즐거움을 전해주고자 기획했다”는 게 회사측의 설명이다.이처럼 슬로푸드 개념이 다양한 비즈니스에서 쓰이는 것을 두고 일부에서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확인되지 않은 슬로푸드 아이템이 확산되면 본래 슬로푸드 운동의 철학이 퇴색될 가능성이 있어서다.최근 국립국어연구원은 외래어와 외국어를 우리말로 다듬자는 취지에서 ‘웰빙’을 ‘참살이’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웰빙 신드롬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뒷받침하는 셈이다. 따라서 슬로푸드 역시 대안운동으로서든 비즈니스의 새로운 아이디어로서든 장기적 흐름으로 봐야 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채소의 씨앗을 사서 키워 먹는 ‘느림의 시대’에 살고 있다.INTERVIEW / 김종덕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슬로푸드, 종의 다양성 보호하기 위한 것”2000년부터 슬로푸드 운동에 관심을 가져온 김종덕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51) 우리나라 슬로푸드 운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가을에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제1회 슬로푸드시상대회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심사위원으로 선임되면서 슬로푸드 운동을 국내에 알리는 데 적극 나서게 됐다.“슬로푸드 운동의 기원은 1986년 이탈리아로 거슬러올라갑니다. 로마 스페인광장에 미국 패스트푸드체인점 맥도널드가 들어서자 이탈리아의 지식인과 언론인을 중심으로 반대의견이 확산된 것이 슬로푸드 운동의 시작이죠.”현재는 한국에도 슬로푸드운동 한국지부가 있어 지식인을 중심으로 여론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4년 전만 해도 김종덕 교수가 유일하게 이 운동을 주장했던 것.“단순히 패스트푸드에 반대되는 개념이라 보면 안됩니다. 생물학적 종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지역음식을 강조하는 개념입니다. 산업형 농업 대신 대안농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겁니다.”그는 패스트푸드의 개념 역시 두 가지라고 강조했다. 흔히 생각하는 햄버거나 샌드위치처럼 규격화를 거친 음식도 패스트푸드지만 공장형 생산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음식재료를 이용한 음식도 패스트푸드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먹을거리의 90%가 패스트푸드인 셈이다.김교수는 최근 슬로푸드의 개념이 비즈니스와 맞물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슬로푸드 개념이 정착되다 보니 기업 입장에서는 마케팅에 가져다 쓰기 쉽다는 점에 주목했을 것”이라고 꼬집은 뒤 “다만 패스트푸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차원에서는 바람직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슬로푸드 철학을 퍼뜨리는 차원으로 활용돼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예를 들어 바람직한 슬로푸드 운동의 방향을 덧붙였다.“이탈리아에는 슬로푸드에서 지정한 식당이 있습니다. 슬로푸드 로고가 있으면 믿을 만한 기관에서 재료부터 조리과정까지 실사ㆍ확인한 곳이라는 의미가 있는 식당입니다. 저도 이탈리아에 갔을 때는 슬로푸드 로고가 있는 곳에서 식사를 했으니까요.”김교수는 현재 슬로푸드운동 한국지부 고문으로 있으며 (역서), 등을 출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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