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배치’ 당내 비판에 ‘열중쉬어’

짱짱한 경력도 허울 뿐…정치이슈 앞에 몸낮추기 바빠

지난 10월2일 서울시내의 한 음식점. 홍재형, 김진표 의원 등 열린우리당 내 전직 관료와 청와대 출신 의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매월 첫째 토요일과 셋째 목요일에 모임을 갖는다는 뜻의 ‘일토삼목회’(一土三木會)가 결성된 자리였다. 참여정부의 초대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김진표 의원이 회장을 맡은 이 모임은 ‘경제살리기’를 모토로 내건 당내 조직이다. 김의원은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회복”이라며 “다양한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뒷받침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일토삼목회는 발족 한달이 지난 지금까지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열린우리당 내에서 ‘경제우선론’을 앞세운 ‘일토삼목회’가 결성된 것 자체가 당내 ‘경제통’ 의원들의 입지가 그동안 얼마나 약했던가를 방증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집권여당 경제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도대체 들을 수가 없다”는 불평이 곳곳에서 들린다. 주요 경제현안이 이슈로 떠올라도 당내 경제 전문그룹의 의견이 당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지 불분명한 경우가 태반이다.사실 지난 4ㆍ15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화려한 경력의 경제통 의원들을 대거 배출해 주목을 받았다. 경제정책의 최고수장인 재경부 장관 출신만 해도 강봉균, 홍재형, 김진표 의원 등 3명이나 된다. 정덕구 의원은 산자부 장관을 지냈고 안병엽, 변재일 의원은 정보통신부 차관 출신이다. 현대자동차 사장과 현대카드 및 현대캐피탈 회장을 역임한 이계안 의원, 쌍용 상무를 지내고 국회 예산결산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3선의 정세균 의원, (주)한양 사장과 대한주택공사 사장을 지낸 오시덕 의원 등 기업인 출신 의원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미국 라이스대 종신교수(경제학)로 활약한 채수찬 의원도 빼놓을 수 없다.경제장관 출신 의원이 한명도 없는 한나라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짱짱한’ 경력들이다.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에 경제 드림팀이 떴다’는 말이 나올 만도 했다.그러나 막상 17대 국회가 시작되자 기대는 어긋났다. 경제통 의원들의 목소리는 정치 이슈에 묻히기 일쑤였고, 오히려 당 지도부의 방침이 어떤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최근 출자총액제한제를 둘러싼 여권 내의 논란은 당내 경제통 의원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 중 하나다. 내수가 좀처럼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던 지난 8월 강봉균 의원은 당 의원워크숍에서 “출자총액제한제를 신축성 있게 완화해야 한다”며 “시장개혁의 초점은 대기업 오너의 경영투명성 확보와 지배구조 개선에 있는 것이지 기업규모가 커지는 것을 억제하는 것은 아니다”고 치고 나왔다.출자총액제한제 유지를 당론으로 삼고 있던 지도부의 방침에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정덕구 의원도 “대기업의 회계투명성이 보장된다면 폐지해야 한다”고 가세했고 제3정조위원장을 맡고 있는 안병엽 의원은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는 투자를 살리는 효과와 대기업집중 심화라는 부작용이 함께 있으므로 깊이 논의해 결정할 사안”이라고 지원사격을 했다. 기업인수ㆍ합병(M&A) 전문 변호사 출신으로 당내 규제개혁특위 간사로 활동 중인 김종률 의원은 “업계에서 출자총액제한제에 대한 불만이 많기 때문에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거들었다. 당내 경제통 의원들이 오랜만에 자신들의 ‘소신’을 적극적으로 표명한 것이다.그러나 한달도 못가 이런 목소리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9월5일 노무현 대통령이 MBC와의 회견에서 “기업인들이 얘기하는 현 정권 담당자들의 반기업 정서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며 “출자총액제한제도 그거 안 고쳐 줬는데 그것 때문에 투자 안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기관에서도 나와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의 이 한마디로 여당 내의 출자총액제한제 논란은 일순간에 ‘교통정리’됐다. 김종률 의원은 “출자총액제한제는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하면 될 일”이라며 물러서고 말았다. 나머지 의원들도 기자들의 질문에 말을 아끼며 언급을 피했다.이에 앞서 열린우리당이 총선 과정에서 공약으로 내걸었던 공공주택 분양원가 공개를 둘러싸고도 문제가 불거졌다. 당 정책위의장 출신인 정세균 의원을 중심으로 경제통 의원들은 원가공개를 집중적으로 주장했지만 청와대와 정부의 반대논리에 곤욕을 치렀다. 결국 당 지도부까지 적극 나선 끝에 전용면적 25.7평형을 기준으로 원가연동제와 채권입찰제를 각각 시행하는 절충안을 가까스로 마련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시장주의 또는 실용주의로 분류되는 열린우리당의 경제통 의원들이 이처럼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개혁’과 배치된다는 당내 분위기 탓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최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열린우리당의 개혁은 경제를 위한 개혁”이라고 강조했지만 여전히 당내에는 ‘개혁 아니면 비개혁’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경제관료 출신의 한 의원은 “경제현안에 대해 소신을 말하고 싶어도 당내 개혁세력들이 반기를 들지 않을까 고민돼 자제하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열린우리당 스스로 강조하듯 ‘헌정 사상 최초로 민주세력이 의회 과반수를 차지한 17대 국회’에서 첫째 목표는 개혁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의원들 사이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일부 의원, 개혁파 공격받아특히 최근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 철폐와 형법보완, 과거사진상규명법 제정, 언론관계법 개정, 사립학교법 개정 등 이른바 ‘4대 개혁입법’에 ‘올인’하면서 야당과 첨예한 대립각이 서자 이런 분위기는 더욱 확연해지고 있다. 경제통 의원들로서는 개혁입법을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가만히 있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이런 분위기는 최근 여권 지도부를 향해 ‘쓴소리’를 했던 일부 의원들이 개혁세력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은 사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승복할 것을 촉구하며 자성론을 제기한 정장선 의원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노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비판한 김부겸 의원은 개혁파 의원들로부터 호된 질책에 시달려야 했다. 유시민 의원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비꼬았고, 임종인 의원은 “이해찬 총리가 선봉에 서 있고 당 장수들이 쓰러지고 있는데 승복하라고 말하는 것은 뒤에다 대고 총질하는 셈”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제통 의원들은 국회 연구모임을 중심으로 정책연구 등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이다. 괜히 민감한 현안에 나섰다가 구설수에 휘말리지 말고 ‘전공’을 살려 공부나 하겠다는 것이다. 정덕구 의원은 ‘시장경제와 사회안전망 포럼’이라는 연구단체를 구성, 정책토론회를 3차례나 개최하며 열성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김진표, 안병엽 의원도 최근 에너지, IT산업 정책 등을 연구하는 ‘신산업정책포럼’을 만들어 기업 CEO, 학자들과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강봉균 의원은 ‘지역혁신ㆍ기업도시 정책포럼’ 회장을 맡아 활동 중이다.경제통 의원들의 이 같은 ‘잠복’은 올 겨울 ‘동면’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국이 4대 개혁입법을 둘러싸고 여야간 일대 격돌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경제이슈보다 국보법 등 정치적 논쟁이 정치권의 중심에 놓일 전망이다.그러나 최근 들어 미묘한 변화의 흐름도 감지된다. ‘일토삼목회’에 이어 10월1일 당내 중도ㆍ온건파 의원들로 구성된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들의 모임’(안개모)까지 공식 발족했기 때문이다. 안개모에는 안병엽, 변재일, 이계안, 오시덕 의원 등 경제통 의원들도 상당수 참여했다. 안개모는 발족 선언문에서 “당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묵묵히 따라만 가던 우리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모였다”며 “국민정서와 동떨어지거나 지나치게 이상적인 개혁입법은 개혁과정에 혼란만 야기할 뿐 아무런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개혁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맡을 것임을 강하게 내비친 대목이다. 따라서 4대 개혁입법의 회오리가 몰아친 후 경제이슈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 경우 ‘일토삼목회’와 ‘안개모’를 주축으로 한 당내 실용주의파가 개혁세력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 확장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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