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안 150여개 ‘낮잠’…제몫 못해

재경위 77개로 1위, 처리된 것 가뭄에 콩 나듯

지난 5월30일 17대 국회의원들의 임기가 시작됐다. 초선의원의 비율이 크게 높아진데다 경제관료, 기업인 등 ‘경제통’들이 대거 당선돼 국민들의 기대는 어느 때보다 컸다. 낡은 정치를 걷어치우고 어려운 경제상황을 돌파할 ‘묘수’를 기대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상당수가 재정경제위원회, 정무위원회, 건설교통위원회 등 경제 관련 위원회에 소속되면서 ‘경제에 활력이 돌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어 실망스럽다.경제통 의원들의 국회 출석률은 좋은 편이다. 본회의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열린우리당의 변재일ㆍ안병엽 의원, 한나라당의 김애실ㆍ김정부ㆍ김태환ㆍ이종구 의원 등 100% 출석률을 기록하고 있는 의원들이 10여명이나 된다. 다른 의원들도 대부분 90%를 넘어 성실한 면을 보이고 있다. 상임위원회 출석률도 80~95%에 이른다.경제문제에 대한 연구에도 열성이다. 지난 7월15일 국회 의원연구단체 심의위원회는 모두 51개의 의원연구단체를 승인했다. 이 가운데 경제모임은 ‘시장경제와 사회안전망 포럼’, ‘국회민생 경제위원회’, ‘국회제정ㆍ조세연구회’, ‘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 포럼’ 등 4개에 불과했지만 그후에도 연구모임이 꾸준히 발족하고 있다.출석률과 경제연구뿐만 아니라 입법부의 본원적 임무인 ‘입법활동’에도 부지런한 모습이다. 이한길 국회 법제실장이 10월29일 ‘의원입법 발전방안’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보고에 따르면 17대 국회는 개원 후 10월8일까지 382건의 의원입법을 제출했다. 이는 같은 기간 16대 국회의원들이 59건을 내놓은 데 비해 5.5배나 많은 양이다. 양으로 치면 17대 국회는 전대에 비해 대단히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 셈이다.제출된 입법안 가운데에는 흔히 ‘경제통’으로 알려진 의원들이 내놓은 안이 상당수 있다. 특히 민주당의 김효석 의원은 8건의 법률안을 제출했고, 윤건영 한나라당 의원은 6건을 내놓았다. 이밖에 열린우리당의 김진표ㆍ채수찬 의원이 각 2건과 3건, 한나라당의 김애실ㆍ김정부 의원이 각 3건씩을 제출했다.‘정기국회의 꽃’이라는 국정감사에서도 일부 경제통 의원들은 성실한 준비와 논리적인 자세로 주목받았다. 특히 초선의원들의 활약이 눈부셨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국감의 자리마저 국가안보 관련 기밀유출 논란, 국가보안법 폐지 논쟁 등 정쟁의 회오리에 휘말려 경제현안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다.‘경제통’ 가운데 두각을 드러낸 의원으로는 열린우리당의 채수찬ㆍ김진표ㆍ강봉균 의원, 한나라당의 이혜훈ㆍ최경환ㆍ임태희 의원, 민주당의 김효석 의원 등이 꼽힌다. 특히 채수찬ㆍ이혜훈ㆍ최경환ㆍ김효석 의원은 법률소비자연맹, 한국여성유권자연맹 등 270여 시민단체로 구성된 국정감사 NGO 모니터단이 선정한 57인의 국감 우수의원으로 뽑혔다.정쟁에 밀려난 경제현안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16대에 비해 월등히 많은 의원입법을 제출한 반면, 처리된 의안은 극소수에 불과해 우려를 낳고 있다. 11월4일 현재 701개의 의안이 접수됐지만 처리된 것은 112개에 불과하다. 이중에서 경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재정경제위원회의 경우 86개가 접수됐고 9개만이 처리됐다. 정무위원회는 21개 중 1개, 산업위원회는 38개 중 14개, 건설교통위원회는 41개 중 6개를 처리해 계류 중인 경제 의안이 산적해 있음을 알 수 있다.국회사무처에 따르면 11월4일 현재 국회 계류 중인 법률안은 총 547개에 이른다. 이중에서 재정경제위원회에 계류 중인 법률안이 77개로 19개 상임위원회 가운데 가장 많다. 이밖에 건설교통위원회는 35개, 산업위원회 23개, 정무위원회가 20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의원들이 정쟁에만 목청을 돋을 뿐 경제와 민생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쓴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닌 셈이다.이와 관련, 국회사무처의 한 관계자는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지 않아 16대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법률안 처리속도가 다소 늦어질 수 있는 요인은 있다”며 “국회법상 본회의에서는 법률안 심의보다 예산심의를 우선하고 법률안은 긴급한 경우에 한해 의원의 요청에 의해 처리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는데다 17대 국회는 정치적 이슈가 워낙 많아 법률안 처리가 더뎌졌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 다른 관계자는 “통계가 있다 해도 각 회기별, 위원회별 사정이 있으므로 산술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비교 자체를 일축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당 국회의원의 한 보좌관은 “본회의가 중단됐지만 법률안 심의는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후 “17대에는 제출된 법률안이 워낙 많아 처리 시점은 다소 늦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처리된 의안이 이렇게 ‘가뭄에 콩 나듯’ 하니 17대 국회의 생산성이 16대에 비해 떨어진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시민운동단체인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정창수 예산감시국장은 “17대 국회는 6월 이후 4개월간 의원 1인에 대한 시간당 인건비가 180만원 가량이 들었다”며 “이는 16대 국회의 134만원에 비해 34% 증가한 수치”라고 말했다. 현재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갈등으로 한나라당이 국회 등원을 거부하는 등 국회의 파행이 장기화됨에 따라 17대 국회의 생산성은 더욱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국감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경제통’ 의원들의 당내 입지는 사실상 굳건하지 못하다는 시각이 많다. 당의 정책결정에 깊게 관여하고 있지도 못하고 있는데다 일껏 전문성을 발휘해 대안을 발표한 후에도 당의 정책에 밀려 소신을 굽히는 일이 다반사라는 지적이다. 이는 ‘경제통’ 의원들이 대부분 초선이어서 당내 기반이 두텁지 않은 데 기인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또한 현 정부가 ‘경제살리기’보다 개혁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것도 이들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하지만 최근 일부 ‘경제통’ 의원들은 예전과 다른 횡보를 보이고 있어 희망을 갖게 한다. 특히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열린우리당의 경우 성향이 비슷한 의원들이 각종 모임을 발족시키며 당의 개혁노선에 은근히 반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10월에 창립된 ‘일토삼목회’가 대표적이다. 이 모임에는 대표인 김진표 의원을 비롯, 홍재형ㆍ강봉균ㆍ정덕구 의원 등 전직 경제관료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풍부한 국정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경제운영을 주도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당내의 대표적인 보수파 의원들의 모임인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안개모)의 활동도 관심거리다. 지난 11월1일 ‘안개모’의 공식 출범식에서 일토삼목회의 대표인 김진표 의원이 당내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의 축사를 해 일토삼목회와 안개모가 당내 개혁세력에 공동전선을 펼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안개모의 회장을 맡고 있는 유재건 의원은 열린우리당의 ‘4대 개혁입법의 연내 처리’ 방침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당의 개혁 드라이브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는 모습이다. 그동안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던 ‘경제통’ 의원들이 과연 개혁과 경제살리기의 시소게임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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