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맨에서 ‘칼국수전문가’로

한 우물을 파며 오랫동안 정진했던 분야라도 어느 순간 재미가 없어질 때가 있다. ‘내 일’에 흥미가 줄어들고 덩달아 성취감도 느낄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모종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용인 구갈2지구 새 상권에 칼국수집을 낸 구명환 사장(45)의 1년 전 이맘때가 그랬다. 18년 동안 보험사 법인영업 분야에서 명성을 쌓으며 ‘고도의 전문가’를 목표로 삼았던 그였지만, IMF 위기 이후 급변한 시장환경까지 뛰어넘긴 어려웠다. 회사 내에서 전문 분야의 입지가 좁아지고 성취감과 보람마저 느낄 수 없게 되자 과감하게 퇴직을 결심했다.“IMF 위기 이후 보험사 법인영업 시장이 큰 변화를 맞았습니다. 이전까지 법인영업팀은 회사의 자산 증가, 캐시플로(Cash Flow) 확보 등에 기여한 주요 부서였지만 보험사 구조조정 이후 대형사 위주로 시장이 재편되자 상황이 바뀌었어요. 제가 근무한 D생명 같은 중소보험사는 법인영업시장에서 설 땅이 좁아진 거죠. 누구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일에 대한 애착도 컸지만 미래를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후, 구사장은 여느 예비 퇴직자들처럼 ‘새 일’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경력을 살려 금융업 쪽에서 새 일을 찾아보려고 했다. 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만큼 브로커, 보험대리점 등을 하면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음식점 창업으로 방향을 확 틀게 만든 계기가 찾아왔다. 무역업을 하던 친구가 식당을 차렸다며 한번 들르라고 한 것이 지금의 칼국수집을 여는 동기가 될 줄 그때는 몰랐다.“개업 축하나 하려고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의 음식점에 갔는데, 거기서 ‘이거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음식 맛이 아주 좋은데다 영업도 잘되는 것을 보고 ‘회사 때려치우고 칼국수집이나 할까’ 하며 농담을 했었지요.”친구의 칼국수집 개업이 일종의 ‘계시’였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는 명예퇴직자 신청을 받는다는 공고가 붙었다. 그렇지 않아도 퇴직을 염두에 두고 있던 차에 가족들에게 ‘직장생활 종료’를 선언했다. 그리고 20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지난해 6월 명퇴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퇴직과 함께 전직지원컨설팅업체 DBM코리아에 등록, 3개월 동안 창업 관련 교육을 받았다. 컨설턴트와 함께 상권분석, 점포경영 등을 공부하고 외식업 창업자의 강의도 들었다. 이와 함께 친구와 같은 칼국수 프랜차이즈로 개업을 준비했다. 경험이 전무한 구사장 입장에선 교육과 창업준비를 병행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구사장은 창업을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꿈을 크게 잡았다. 이왕 외식업에 진출하기로 한 이상 ‘전문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더불어 프랜차이즈 계약을 하면서 추가 분점 개업이 가능하도록 계약서를 썼다. ‘용인본점’이라는 상호에 분점을 늘려가겠다는 목표를 담았다. 구멍가게식 음식점이 아닌 ‘기업형 음식점’을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그에 걸맞게 음식점 규모도 크게 시작했다. 찜질방, 은행 등이 들어선 10층짜리 상가 2층에 실평수만 52평, 좌석수는 102석 규모다. 퇴직금과 은행 저축을 털고 친척에게 일부를 빌려 총 2억3,000만원으로 새 터전을 만들었다.크게 시작한 만큼 상권선택이 중요했다. 구사장이 선택한 용인 구갈2지구는 대단위 아파트촌이 형성된 새로운 베드타운. 배후 세대수만 4만5,000가구를 헤아린다. 그러나 아직까지 입주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 상권은 이제 막 태동기를 지나고 있다. 구사장은 “상권 선점 차원에서 일부러 태동기 상권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위험부담이 없지 않지만 그만큼 미래가치도 크다는 판단이다.개업 3개월이 지난 지금, 사업은 비교적 안정궤도에 들어섰다. 첫 두 달 동안은 하루 평균 100만원선의 매출을 올렸다. 단골손님도 늘었고 주변에는 제법 입소문까지 났다. 쇠고기 샤브샤브와 얼큰한 버섯매운탕을 먹다가 칼국수나 죽을 끓여 먹는 ‘3단계 코스’가 어떤 음식점 메뉴보다 푸짐해 고객만족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새해 들어 광우병 파동으로 주메뉴인 샤브샤브 매출이 3분의 2로 떨어지긴 했지만 구사장은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1월은 외식업계 공통의 비수기라고 하더군요. 광우병 파동까지 겹쳐서 매출이 떨어지긴 했지만 곧 회복이 될 거라 믿습니다. 2월에는 졸업, 개학이 겹쳐 매출이 더 오르지 않을까 기대하는걸요?”구사장의 자신감 뒤엔 2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갈고닦은 ‘음식점 보는 눈’이 자리하고 있다. 오랫동안 소비자 입장에서 수많은 음식점을 평가해 왔기 때문에 성공포인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자평이다. 이 점을 유념해 개업부터 지금까지 구사장의 포지션은 ‘주방’을 고수하고 있다. 음식점의 핵심인 주방을 잘 알아야 사업을 성공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시행착오 없이 매끄럽게 사업이 풀려온 것은 아니다. 점포 인테리어와 설비 등 이른바 ‘하드웨어’에 지식과 경험이 없어 한동안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전문업체에 설비 분야를 일임했더니 결과가 실망스러웠습니다. 마감재와 가스, 전기, 배관 등이 예상보다 낮은 수준으로 완성됐거든요. 게다가 행정처리 등에 경험도 없어 여러모로 미숙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창업자들에게 조언을 해 줄 정도로 노하우가 쌓였습니다. 앞으로 사업을 확장하게 되면 시행착오가 좋은 교과서가 되겠지요.”또 하루 8시간 근무에 일정한 출퇴근 습관으로 굳어진 몸이 고된 음식점 일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도 쉬지 못하고 2개월을 버틴 어느날엔 너무 힘들어 후회한 적도 있다”고 털어놓았다.그러나 몸의 고단함이 성공적인 새 출발의 기쁨을 퇴색케 하지는 않은 듯했다.“부부가 맞벌이를 하다가 함께 회사를 그만둔 것, 그동안 모은 자산을 몽땅 투자한 기회비용, 몸의 고단함을 감안하면 직장생활과 창업 가운데 어느 게 낫다고 하기가 애매하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퇴직을 계기로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었고, 새로운 꿈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것만은 무엇보다 값진 소득입니다.”칼국수집 주인으로 변신한 베테랑 보험맨의 얼굴에서 사회에 갓 진출한 새내기의 패기가 엿보이는 듯하다.구명환 사장의 Success Key●결정은 빠를수록 좋다. 직장생활에 희망이 없다면 과감하게 물러나라.●창업 관련 교육은 큰 도움이 된다. 초보일수록 많이 배우고 부딪혀라.●목표는 크게 세우되 무리는 하지 마라. 자신의 자금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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