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百壽)보험 민원 ‘폭발’ 직전

금리하락으로 보험금 턱없이 적게 지급, 시민단체 소송준비 중

서울 서대문구에 거주하는 이모씨는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노년이 되면 매해 1,000만원씩 준다는 보험증서 하나 믿고 있었는데, 막상 보험금을 받으려니 보험사는 1년에 100여만원밖에 주지 않는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한참 쪼들렸던 시절에도 해약하지 않고 어렵사리 유지해 온 보험이었다.“불입한 총액이 344만원입니다. 80년도에 100만원이면 전세 한채를 얻을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노후대비라더니, 1년에 100만원이면 한달에 10만원으로 살라는 얘깁니까? 혼자 아이들 기르면서, 우리 애들 컸을 때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어주며 좀 편안하게 살려고 들었던 보험이 이렇게 되다니요.”초등학교까지밖에 교육을 받지 못한 이씨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억척스럽게 살아왔다. 정기예금 금리가 떨어져서 약속한 금액을 줄 수 없다는 보험사의 설명을 들었지만 ‘예정이율’이니 하는 것은 배운 것이 적어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김씨가 가입했던 백수보험은 80년부터 85년까지 대한생명보험, 제일생명(현 알리안츠제일)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흥국생명, 동해생명(금호생명에 흡수) ,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 등 6개 생명보험사가 공동으로 판매한 장기저축성상품이다. 계약만기가 되면 보험금과 함께 ‘확정배당금’을 별도로 지급, 노후생활을 보장한다며 팔았다. 판매 당시에는 모집인들을 통해 “33세인 사람이 매월 3만4,600원씩 7년간 납부하면 22년 뒤인 55세부터 사망할 때까지 매년 1,000만원 이상을 받게 된다”는 예를 들면서 선전했었다. ‘노후자금 걱정 말고 오래오래 살라’는 취지에서 이름도 백수(百壽)보험이었다.당시 금리는 25%선에 이르렀고, 이런 계산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이 상품의 예정이율이 12%였기 때문이다. 예정이율과 실세금리의 차이를 ‘확정배당금’이라는 이름으로 지급하게 돼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이후 기준이 된 실세금리인 정기예금 이자율은 계속 떨어졌고 급기야 82년 이후에는 한번도 예정이율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한편 대부분 30대에 이 보험에 가입했던 사람들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보험금을 지급받을 나이(계약에 따라 55~60세)에 이르렀고, 기대하고 있던 금액보다 턱없이 적은 연 100여만원대의 보험금을 받게 되자 민원이 잇따르게 됐다.이 상품은 80년대부터 끊임없이 논란거리가 돼 왔다. 계약자와 보험사간에 마찰이 거세지자 89년 9월 당시 보험감독원은 보험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보험사가 보험금 예시표를 제시했을 때 한 약속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판정을 내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완전한 해결책은 못됐다. 같은 회사의 똑같은 보험에 들었다 해도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은 약속대로 보험금을 받고, 그런 것이 없는 사람은 받지 못하는 등 논쟁의 불씨가 여전했기 때문이다.89년 6월 기준 이 보험에 가입했던 사람들은 교보 4만9,100명, 삼성 5만7,500명, 제일 2만1,700명 등 6개 생명보험사 전체 계약자가 16만8,20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금리가 하향세를 기록하면서 보험사들은 이 상품을 비롯해 ‘재테크보험’ 등 역마진의 우려가 있는 고이율의 저축성상품 해약을 적극 유도해 왔다. 이에 따라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백수보험 계약자는 10만여명인 것으로 추정된다.이후 2000년대 들어서 분쟁은 법정으로 넘어갔다. 관련사건의 첫 승소자는 부산에서 나왔다. 이것은 백수보험과 관련해서 계약자가 처음으로 승소한 사례로 기록됐다. 보험모집인이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팔았다면 애초 모집인이 선전한 금액대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요지의 판결이었다.하지만 유사소송에서 계약자보다는 보험사가 승소한 소송이 더 많다. 최근 백수보험금을 약속대로 지급하라고 항의하기 위해 교보생명에 찾아갔던 김모씨는 “직원이 자리에 앉자마자 관련 소송에서 교보생명이 승소한 판례집 뭉치부터 내놓았다”고 말했다.여전히 금감원에 민원 월 평균 1~2건 접수 중금융감독원 민원상담팀에는 최근까지도 한달에 한두 건 이상은 꾸준히 백수보험 관련 민원이 들어온다고 한다. 분쟁조정실 관계자는 “백수보험이 언론에 한 번 보도되기만 하면 갑자기 민원인들의 전화가 폭주한다”고 말해 관련된 계약자들의 불만이 산적해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이 관계자는 또 “민원이 접수되면 이 건은 계약자가 금리변동의 적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해준다”면서 “대법원 판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정리된 문제 아니냐.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해서 민원인 마음만 아프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그런데 해묵은 이 보험분쟁은 시민단체인 보험소비자연맹(www.kicf.orgㆍ이하 보소연)이 계약자들에게 ‘힘을 합치자’며 계약자 모임을 추진하고 나서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보소연은 올 1월 들어서 인터넷 게시판에 백수보험 계약자 모임을 만든다는 광고를 띄워 놓고 비슷한 사례들을 수집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10건 이상이 접수됐다. 보소연 조연행 사무국장은 “80년대 초 30대에 가입했던 이들이 55세가 되는 2001년부터 백수보험 만기가 집중적으로 도래하기 시작하면서 민원도 급증하고 있다”면서 “늦은 감은 있지만 이런 계약자들을 모아 함께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시민단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사무국장은 “유사사건의 판례로 볼 때 모든 계약자가 승소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부 팸플릿 등을 보관하고 있으며, 이 문서에 배당금이 정기예금 금리 변동에 따라 변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지 않은 경우는 승소확률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계약자가 충분히 모이면, 개인이 일일이 보험사와 상대하기보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보험사와 대화를 시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10년 넘게 문제가 돼 왔고, 유효계약이 10만여건 가량 있는 것으로 추정돼 앞으로도 계속 마찰이 예상되는데도 감독당국이나 보험사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자 소비자단체가 나선 것이다.세월이 흘러도 멈출 줄 모르는 백수보험의 분쟁사례는 보험이 돈독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장기상품임을 재확인시켜 준다. 파는 보험사나 사는 사람이나 더 신중하고 그만큼 정확하고 양심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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