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가게 주인으로 ‘행복한 변신’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야 할 때가 곧 오리라 생각한 것은 2~3년 전부터였다. 대기업 기술파트에서 쌓은 경력을 바탕으로 D사로 옮긴 것이 97년. 처음에는 회사가 새로 추진하는 반도체사업에서 중추 역할을 담당했지만 시간이 흘러 사업이 일정 궤도에 올라서자 입지가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회사의 기대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이상 떠나야 할 때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대기업에서 20여년 길들여진 편안함을 뿌리치기에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남보다 늦게 결혼해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매와 집안일에만 전념해 온 아내, 주변의 시선까지 어느 하나 녹록지 않았다. 고민의 시간은 길고 힘들었다.2003년 6월, 마침내 어떻게든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회사가 A사를 인수하면서 조직이 개편되고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일기 시작했다. 위기감도 커져갔다. 임원이 된다 하더라도 생명이 길지 않으리란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책상을 붙들고 버텨볼 생각도 없었다. 이미 예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장’ 명함을 버렸다.황병오씨(47)에게 ‘사오정’은 딱 들어맞는 용어다. 비록 스스로 사표를 던지긴 했지만, 그 과정은 40대 중반에 정년의 위치로 밀려나는 요즘 직장인들의 처지를 그대로 대변한다. 다행히 황씨는 퇴직 후유증을 일찌감치 물리치고 짧은 시간에 새 출발에 성공했다. 삶의 터전이 첨단산업 현장에서 조그만 반찬가게로 바뀌었을 뿐, 열정과 희망은 전보다 더 커졌다.그렇다고 퇴직 후 6개월이 시행착오 없이 지나간 것은 아니다. 처음 황씨는 반도체 집적회로(IC)를 디자인하는 사업을 준비했다. 자신의 전문분야인데다 사업성에 대한 자신도 있었다. 사업계획서를 들고 프레젠테이션에 참가하는 등 출발은 활기찼다. 그러나 두달이 못돼 ‘먹고 사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업이 언제 안정될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22년 동안 익숙해진 화이트칼라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지요. 막상 시장에 나서 보니 장벽이 너무 많더군요. 기본적인 경영경험도 없이 무작정 큰 꿈만 좇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현실을 비교적 일찍 깨닫고 생각을 바꾼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싶어요.”첫번째 사업을 접으면서 황씨는 ‘구멍가게라도 하자’고 마음먹었다. 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명퇴가 아니라서 퇴직금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최대한 안전한’ 업종을 고르는 게 급선무였다.“창업박람회와 인터넷을 통해 각종 창업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경험 미숙을 뒷받침해주고 불황에도 견딜 수 있는 업종을 고르자고 기준을 세웠죠. 그러자면 생활과 밀접한 업종이 제일인데, 우연히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반찬전문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꼭 맞다 싶더군요.”다음날로 반찬전문점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지방의 체인점부터 장안의 소문난 반찬집을 수소문하기까지 꼬박 한달여가 소요됐다. 결론은 “다른 업종에 비해 안정적이고 수요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는 긍정적인 것이었다.드디어 10월 중순, 퇴직 3개월여 만에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반찬전문점 ‘장독대’ 체인을 개업했다. 대여섯평 정도의 작은 가게지만 이곳은 황씨 혼자가 아닌, 아내 정향숙씨와 함께 꾸리는 가족 사업의 터전이다.“김장철인데다 연말연시 모임 때문에 12월은 반찬전문점 매출이 좋지 않다고 해요. 그런데도 개업 후 계속 매출이 오르는 추세라서 다행입니다. 월 1,300만원 정도 매출이 오르고 있으니, 나쁜 편은 아니죠. 순이익이요? 부장 시절보다 낫다고만 해 두죠.”대기업의 체계적인 복지후생제도와 사회적 위치, 명예 등을 현재의 사업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황씨는 ‘다시 일어섰다’는 것이 무엇보다 값지다고 밝게 웃었다. 그리고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운영하기에 따라 몇 배의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적잖은 삶의 동력이 된다고 말했다.황씨의 매장에는 120여가지에 달하는 반찬이 구비돼 있다. 이 가운데 절반은 매장에서 매일 만들어내고 젓갈, 김치 같은 밑반찬류는 체인 본사에서 공급받는다. 아내와 조리사가 부엌을 맡고, 황씨는 재료구입과 판매, 제반 관리를 담당하는 분업체제다. 이전에는 혼자 시장 한번 본 적이 없지만 이제는 빨간색 앞치마도 잘 어울리는 영락없는 반찬가게 사장님이다.“고객분석을 해 보니 고시원이나 원룸에서 사는 젊은 독신자들, 외롭게 사는 노인들, 그리고 주부들로 크게 세 부류로 나뉘더군요. 이들은 선호하는 반찬이나 입맛이 달라요. 소비량은 젊은층이 가장 많지만, 맛에 대해 컨설팅하는 쪽은 노인들이나 주부들이죠. 고객들 이야기는 어떤 내용이라도 귀담아듣습니다.”화학조미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 반찬들은 그대로 황씨 가족의 식탁에 오른다. “식구들 먹는 반찬을 허투루 만들 수는 없지 않으냐”는 이야기다.반찬전문점으로 방향을 바꿔 잡았다고 해서 반도체 관련 사업의 꿈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경영경험을 쌓은 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그 시점은 주변 여건이 충분히 갖춰진 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우선은 지금의 사업을 성공시키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그런 후 한 단계씩 점프해 마침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성공을 하겠다는 포부다. 반찬전문점은 첫번째 디딤돌인 셈.“대기업 부장과 반찬가게 주인, 사회 통념상 큰 차이가 나는 것 아니냐”는 기자의 우문에 황씨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현답을 내놓았다. “그게 바로 화이트칼라적인 사고다. 빨리 버릴수록 자신에게 이롭다. 아직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환갑 후까지 내 사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 게 무엇보다 다행이다. 중요한 건 ‘미래가치’다.”황병오 사장의 Success Key●‘미래 가치’를 생각하라. 비전만 확실하다면 현재 무슨 일을 하든 중요치 않다.●퇴직을 겁낼 필요 없다. 퇴직은 곧 ‘기회’다. 이니셔티브를 잡아라.●세상에 ‘일’은 얼마든지 많다. 화이트칼라 근성만 버리면 세상이 훨씬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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