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근성 밑천삼아 창업 ‘한판승’

2003년 12월19일 점심시간, 서울 홍대 앞에 새로 문을 연 퓨전분식점 ‘국당’은 젊은 손님들로 꽉 찼다. 종업원과 점주까지 일손은 일곱이나 되지만 다들 처음 손님을 맞는 것이라 서툴기만 하다. 한바탕 북적임이 가라앉은 뒤에야 장동선 국당 사장(40)은 한숨을 돌리려 주방을 나왔다.그동안 25군데 가맹점을 오픈할 때마다 똑같은 상황을 겪었다.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랴, 우왕좌왕하는 종업원들 코치하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바쁜 날이 개업일이다. 구성원이 일에 익숙해질 때까지 며칠 돌보노라면 6년 전 ‘깡’ 하나로 분식점을 냈던 스스로가 생각난다. 가맹점주가 직장생활하다 창업을 하는 ‘초보’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사업이 뭔지, 요리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창업을 했죠. 평생 운동만 하고 평온하게 직장생활 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분식점을 하겠다니, 주변에서는 단 한사람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창업상담을 위해 찾아오는 퇴직자들을 만나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해요.”실제로 장사장은 음식점 사업과는 거리가 먼 이력을 지녔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유도를 시작, 대구 영신고 재학 시절에는 전국대회만 11번 우승했다. 한국체대를 다니던 84년에는 LA올림픽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선발되는 등 전도유망한 유도선수의 길을 걸었다.그러나 대학 3학년 때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은 후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서둘러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학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졸업 후 모교의 유도코치로 3년여를 몸담고 이후에는 경기대 교직원으로 7년간 근무했다. 선수생활이 끝난 뒤로는 여느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월급쟁이 생활을 한 셈이다.장사장이 ‘사업’으로 다시 한 번 진로를 바꾼 계기는 의외로 간단하다. 어느날 문득 “내가 남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그때 나이가 33살이었는데,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일하려면 더 늦으면 안되겠다 싶었죠. 대학 교직원 생활을 7년 정도 하다 보니 매일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게 지겹기도 했고요. 느슨한 생활을 다시 조이기 위해서는 새 출발을 해야만 했습니다.”그야말로 아무 대책 없이 사표를 던진 게 97년 3월이었다. ‘음식점을 하겠다’는 생각 외에는 결정된 것도, 준비한 것도 없었다. 음식점을 택한 이유도 “먹는 게 좋아서” 일 정도로, 어찌 보면 ‘한심한 창업자’의 전형이었다. 여기에 “이왕 하는 거, 폼나는 걸로 하자”는 막연한 욕심까지 더해 투자금 4억~5억원 규모의 대형 피자전문점에 관심을 두었다. 게다가 수중에 가진 돈은 달랑 2,000만원 뿐, 나머지는 주변에서 빌릴 심산이었다.“피자전문점에 투자하기로 약속한 죽마고우가 어느날 우려를 표하더군요. 굳이 하겠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아무 경험 없이 시작했다가 돈만 날리게 되면 재기가 힘들 거란 이야기였죠. 그제야 무엇을 하던 기초를 다진 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장사장 입장에서는 친구의 조언이 ‘튼튼한 동아줄’이었던 셈이다. 무턱대고 피자전문점을 시작했다면 ‘썩은 동아줄’을 잡았을지도 모르는 일.다시 마음을 다잡고 투자금 규모를 줄이면서도 실속을 얻을 수 있는 업종을 고르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식 우동이 인기 조짐을 보이는 것에 착안, 우동전문 분식점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퇴직 한달 만에 수원시 아주대 앞에 15평짜리 분식점을 냈다.창업한 후로 장사장은 유도선수 시절의 승부근성을 발휘, 독하게 매달렸다. 빚을 내 폼나는 음식점을 차리자는 ‘헛꿈’을 꾸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새벽 5시에 일어나 장을 보고 한밤중까지 주방에서 살았다. 틈나는 대로 전국의 맛있는 분식점을 찾아가 비법을 알려 달라 매달리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식자재와 조미료를 먹어 보기도 했다.“부산의 유명한 우동집에서는 한달 동안 허드렛일을 하며 국물 우려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느 집이 무슨 음식을 잘한다고 하면 그곳이 어디든 그날로 찾아갔지요. 돌아온 후에는 비슷한 맛, 더 좋은 맛을 낼 때까지 만들고 또 만들었습니다. 비법을 전수받느라 들어간 수강료도 만만찮아요.”그렇게 6개월간 매달리다 보니 이 시장에 대해 조금씩 ‘감’이 오기 시작했다. 개업 초기 16가지 정도였던 레서피(조리법)는 100여가지로 늘어났다. 우동이 냉동면, 숙성면, 생면에 따라 맛이 천양지차라는 것을, 상권에 따라 우동 국물을 내는 재료에도 차이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거듭된 연습으로 음식맛이 좋아지자 자연스럽게 손님이 늘고 장사에 재미가 붙었다.사업이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창업 9개월 만에 수원시 중심부에 분점을 내면서부터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IMF 위기와 때를 같이해 한동안 고전을 피할 수 없었다. 하루 매출 20만원을 넘기기 힘들어 종업원 봉급 주기도 벅찼다. 설상가상으로 인근 경쟁점포에서는 일부 메뉴를 1,000원대에 세일하는 이벤트를 시작해 장사장을 위협했다.“어쩔 수 없이 맞불을 놓아 손님을 끌어당겨야 했습니다. 일단 손님이 와주어야 음식맛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이벤트 기간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평균 매출이 3배나 올랐습니다. 단골고객이 크게 늘어난 덕분이지요. 계절이 바뀔 때 다시 이벤트를 여는 식으로 마케팅을 했더니 하루 평균 100만원대의 매출이 달성됐어요. IMF 위기를 슬기롭게 넘긴 셈입니다.”두 점포 모두 장사가 잘되자 가맹점을 내 달라는 문의가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장사장으로서는 ‘음식맛이 좋아 비법을 전수받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프랜차이즈에 대한 개념도 없이 그렇게 10개 점포를 내주었다.상황이 이쯤 되자 체계화된 프랜차이즈 시스템이 절실해졌다. 국당이 주식회사로 업그레이드된 것은 2003년 4월. 이제는 200평 규모의 물류창고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소스를 생산하는 공장을 확보하고 직원만 50명에 이르는 어엿한 프랜차이즈 기업이 됐다. 무작정 사표를 던진 지 6년 만에 이룬 결실이다.“가맹점주가 직접 주방 등 매장 일에 나서지 않으면 가맹 계약을 하지 않습니다. 수요가 받쳐주는 상권이어야 하는 것도 조건이지요. 좋은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점주는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아요. 퇴직자의 경우에는 더욱 꼼꼼하게 따져야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직장을 나와 처음으로 시도하는 일인 만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니까요.”장사장의 꿈은 원대하다. 2년 내에 국당 가맹점을 500개로 늘리고 고기집, 샤브샤브전문점 등을 추가로 런칭할 계획이다. 하지만 무리하게 확장할 생각은 없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끈질긴 승부근성으로 독하게 집중할 뿐.장동선 사장의 Success Key●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해 독하게 매달려라.●해당 분야에 대해 일가견을 가져라. 공부 없이 성공할 수 없다.●하루에 세번 이상 금전출납기를 열지 마라. 매출에 연연하면 힘들어진다.●체인 본사 이야기는 20%만 믿어라. 나머지는 스스로 발로 뛰어 확인하라.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