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조업이 사는 길

최근 국내 기업들은 ‘꼬리잡기’ 놀이를 하고 있다.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긴 행렬을 이루듯, 그렇게 중국으로 떠나고 있다. 떠날 생각이 없는 기업들이 괜히 불안감을 느낄 정도이다.대기업들의 중국진출은 새삼스럽지 않다. 삼성, LG, SK 등은 이미 그룹의 미래를 나라밖에 두고 있다.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도 최근 바짝 속도를 내고 있다. 이들 그룹총수의 중국 등 해외출장도 빈번하다.대기업보다 더욱 몸이 단 것은 중소기업이다. 행보가 예전보다 더욱 빨라지고 있다. ‘러시’(Rush)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조사결과 중소기업 10곳 중 4곳은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겼거나 혹은 서두르고 있다.중소기업협동중앙회 조사자료(2003년 9월)를 보면 총 375개 조사대상 기업 중 115개 기업(37.9%)이 이전했거나 계획 중이다.더군다나 단순생산부문의 이전이 줄어들고 고부가가치 제품이나 핵심부품의 이전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는 조사결과는 앞날을 더욱 어둡게 만든다. 2003년 11월 대한상공회의소는 2001년 말 현재 중국진출 한국기업은 2만2,000개에 달한다며 이러다간 국내 제조업 기반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분석을 내놓았다.그렇다고 기업들의 해외진출을 탓할 수 없는 노릇이다. 좀더 나은 경영환경을 찾아가는 것이 기업의 생리다. 하지만 두 가지 딜레마를 함께 안고 가야 한다. 우선 크게 보면 국내 제조업의 공동화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산업구조조정이냐, 산업공동화냐 등 논란이 있지만 봉제나 신발 등 노동집약적 산업뿐만 아니라 첨단산업까지 해외이전에 나서고 있는 것은 심각한 일임에 분명하다.이뿐만이 아니다. 기업들의 해외이전이 과연 능사인가 하는 점도 따져봐야 한다. 특히 전문가들은 해외진출을 하는 기업들이 마치 중국이나 베트남 등을 국내 제조업체의 천국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크게 잘못됐다고 꼬집는다. 고임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인건비를 보면 중국은 국내의 10분 1 이하 수준으로 제품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2.5% 정도다. 국내의 경우 인건비가 20~30%에 달하기 때문에 단순비교를 하면 중국이 훨씬 유리하다. 그러나 각종 경비와 물류비, 임대료 등의 경비가 20~30%에 달해 원가경쟁력 확보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가령 한국기업이 중국에 주재원을 한명 둘 경우 연간 대기업은 1억2,000만~1억5,000만원, 중소기업은 6,000만~7,0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따라서 현지 토종기업들과의 원가경쟁력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설사 인건비가 싸다고 하더라도, 단지 20%의 인건비 때문에 해외로 나가는 것은 나머지 80%의 리스크를 안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한 중소기업인의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하다.이밖에 중국의 불투명한 세제와 불합리성 등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을 확률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 사례를 들어보자. 90년대 중반부터 중국에 진출한 L기업의 경우 직원들이 직접 운전을 못하게 한다. 부서장급에는 운전기사가 딸린 차량을 제공하고, 그 밑의 직원들에게는 필요한 경우 역시 운전기사가 딸린 회사차를 배차해준다. 혹시 직접 운전하다가 사고가 났을 경우 외국인에 대해 엄청난 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등 해외를 단순히 인건비가 저렴하고 규제가 없어 기업 경영환경이 좋은 곳이라는 판단만으로 진출할 경우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그렇다면 국내에서 살길은 있는가. 이 대목에서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를 낸다. 인허가나 노사 관련 분야에서 각종 규제를 풀고, 세제 혜택을 주는 등 정부가 각종 기업하기 좋은 환경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맞는 말이다. 정부는 기업의 고충을 풀어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이와 함께 기업가 정신의 재무장도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업가 정신이란 개발도상국 시절의 마인드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즉 연 평균 경제성장률이 10%대를 오가는 시절을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산업구조가 선진화돼 가면서 전통산업은 이익률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이제는 이익률이 2~3%에 불과한 시절이다. 우리나라보다 인건비가 5배, 10배 높은 미국, 일본 등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우선은 ‘이익률 2~3% 시대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 또 생산합리화, 고부가가치 사업 진출 등 자구노력를 배가해야 한다. 환경을 탓할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자세도 필요한 것이다. 적어도 도피성으로 해외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생산합리화 컨설턴트인 백대균 월드인더스트리얼매니지먼트컨설팅 대표는 “지금이라도 생산혁신에 나선다면 충분히 살길이 있다”며 “먼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주변에 성공사례는 적지 않다. 이들은 현실을 피하지 않고 부딪쳐 돌파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먼저 시작하는 자가 유리할 것이다.
상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