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제도, 신용평가 ‘두 토끼’잡아야

감독당국, 자본시장에 제도 개혁의지 ‘신호’보내… 속도는 미지수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해 3월의 ‘카드대란’이다. 신용카드 연체율 상승이 기업어음과 MMF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금융시장 전체로 순식간에 확대 재생산되는 악순환의 모습을 보였다.또한 기업어음은 기업의 분식회계와 비자금 사건에서도 빠짐없이 단골 출연하기도 한다. SK그룹의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에서도 기업어음이 쓰였다. SK해운은 실제 사지 않은 기업어음을 산 것처럼 장부에 올려 회계장부에 거짓 처리했고, 392억원의 가공 이자까지 장부에 올렸다. 이 돈은 회사 밖으로 새나간 것으로 드러났다. ‘월드컵 휘장비리’로 알려진 코오롱TNS 역시 분식회계의 도구로 기업어음을 활용했다. 월드컵 열기가 채 식기 전인 2002년 7월 말 부도가 난 코오롱TNS는 고의부도를 내기 위해 이전부터 기업어음(CP)을 발행해 자금을 융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기업어음 발행을 통해 만든 돈을 회계장부에서 누락시켰으며, 비자금을 조성했다.금융시장에 무슨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기업어음(CP)과 MMF. 왜 이런 단기금융상품들이 매번 문제가 되고, 위기를 증폭시키는 확성기 노릇을 하는 것일까.기업 분식회계 수단으로 오용 잦아사실 CP는 매우 우수하고 인기도 좋은 금융증권이다. 보통 담보 없이 신용으로만 발행되므로 발행절차가 간단하고, 발행에 소요되는 시간도 며칠에서 몇주일 정도로 짧다. 모든 거래 내용과 정보가 노출돼야 하는 회사채에 비해 비밀보장이 된다. 또한 만기가 짧으므로 발행금리가 낮고, 은행대출과 비교해도 금리가 유리해 싼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투자자 또는 예금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금융상품인 MMF는 운용자산으로 장기증권을 편입할 수 없기 때문에 만기가 짧은 CP를 집중 보유해 왔다. 전체 발행 물량의 70% 가량을 투신사와 은행신탁이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결국 CP는 자금흐름을 원활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발행자에게, 그리고 유용한 자금운용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운용자에게 좋은, 한마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품’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행도 유통도 활발하다. 2003년 10월 말 기준 순발행잔액이 40조원이나 된다. 이는 회사채 상장잔액의 30%, 상장주식 시가총액의 12%에 이르는 금액이다.이렇듯 많은 장점에도 불구, CP는 단기라는 특성 때문에 금융시장에 어떤 급격한 충격이 왔을 때 완충작용 없이 곧바로 직격탄을 맞고, 한 번 충격이 퍼지면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 또한 현재 CP 정보의 비대칭성이 심해 전체 발행액이 얼마인지, 누가 보유하고 있는지도 뚜렷하게 집계가 되지 않는 실정이다. 카드채가 문제가 되었을 때도 금융시장에서는 당국이 발표하기 전까지는 월별로 만기가 어떻게 돌아오는지, 업체별로 CP 발행 규모는 어떻게 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특정 기업의 CP 발행액이 얼마인지는 기업 기밀에 속하는 것으로 통용될 정도다. 사업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기업은 반기보고서 중 단기차입금 명세서에 6개월~1년이라는 기간의 CP발행실적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CP의 만기는 3개월에서 9개월 정도이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현재 CP에 관한 정보는 은행연합회와 증권업협회 양쪽으로 나뉘어 관리된다. 증권업협회의 정보는 일부 접근이 가능하지만, 은행연합회 것은 그렇지 못하고 그나마도 발행사가 아닌 신용공여자 위주로 취합된 것이라 회사별 발행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더불어 지난해 12월28일 금감원 등이 내놓은 ‘금융감독규제 합리화 방안’에 따라 앞으로 CP를 발행할 수 있는 기업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게 돼, 투명성과 정보 부재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기존에는 상장ㆍ등록법인, 정부투자기관, 특별법인 등이 발행할 수 있었지만 자산 총액 70억원 이상인 외부감사대상 법인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CP 발행 가능 기업은 현재보다 1만여개가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최근 여러차례 CP 관련 시스템의 문제점이 불거지자 지난해 12월26일 금융감독원에서는 ‘CP 관련 정보공시 및 관리 강화방안’을 내놓았다. 이 안은 공시규정을 강화해 정보취약성을 극복한다는 내용으로,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첫째, 일정규모 이상의 CP를 발행하거나 상환할 때 수시공시 의무를 부과하거나 둘째, 은행연합회라는 한군데 창구를 통해 증권 종금 은행을 통해 발행되는 CP 매입 중개정보를 집중한다는 안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채권처럼 예탁원을 통해 발행하게 하는 등록발행제도 도입 등도 가능한 방법으로 거론되고 있다.하지만 금감원이 발표한 강화방안은 당국의 의지를 천명하고, 취지를 밝힌 것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금감원 공시감독국 박찬수 팀장은 “원칙을 밝혔을 뿐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없다”면서 “2004년 사업 계획으로 수시공시제도 전반을 보완하는 내용이 잡혀 있는데, 급박한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CP 공시제도 개선도 이때 같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금융당국이 CP제도 보완책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은 이미 7월부터 간간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연말이 되어서야 의지를 밝히는 수준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감독당국은 지난해 옵션CP 문제를 통해 게임이 끝난 뒤 경고카드를 빼드는 ‘뒷북감독’을 보인 바 있다.이처럼 빠르지 않은 감이 있음에도, 금융시장에서는 일단 CP 정보의 투명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에 대해 환영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자금조달자인 기업들의 입장은 다르다.한 대기업의 재무담당 팀장은 “수시공시를 하면 잡무가 많아져 귀찮을 뿐, 우리 회사는 공시를 하든 안하든 거리낄 것이 없다”고 단단히 못박은 뒤, “계열사들끼리 예금 넣어주고 CP로 빌려가는 등의 비정상적인 거래를 하는 기업이라든가, 발행가격(금리)까지 공시가 될 경우 회사 상태에 대한 금융시장의 평가가 드러나니까 그것을 꺼릴 기업 등이 반발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같은 맥락에서 공시강화를 계기로 CP시장이 축소될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한편 이번 공시강화 방안에는 CP 신용평가를 정상화하는 문제가 빠져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2년부터 집중적으로 CP시장의 구조적 결함을 제기해 왔던 굿모닝신한증권 윤영환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CP 신용평가는 선진금융시장에서 이뤄지는 것과 매우 다르다”고 말했다. 이들은 기업의 펀더멘털 분석을 위주로 하는 회사채 신용분석을 기본으로 하되, 이에 덧붙여 유동성 리스크 분석에 치중한다.CP 신용평가, 유동성 위주로 전환 필요하지만 우리나라의 CP 신용평가는 발행할 수 있는 업체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약식 회사채 신용분석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수수료도 회사채는 몇천만원대인것에 비해, 기업어음은 몇백만원 수준으로 회사채 평가 수수료의 5분의 1 정도에 그친다. 즉 CP 평가의 핵심은 상시 유동성 평가에 있는데 현재 이것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본래 신용으로만 발행되는 CP는 우량기업의 자금조달 수단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시장 형성기부터 종금사의 주요상품으로, 비우량 기업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애용되며 발전해 왔다.초기에는 단기자금 전문금융사인 종합금융사가 자체 보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할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계기업 CP가 주종을 이루던 80년대 후반에 도입된 우리나라의 CP 신용평가는 시장환경을 고스란히 따라서 발행 적격업체 평가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그러나 외환위기와 대우사태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CP시장도 질적 변화를 겪어 우량회사의 발행 비중이 대폭 늘어났고, 또 종금사들의 퇴출로 자체 보유보다는 증권사의 단순 중개가 주류를 이루게 됐다. 윤연구위원은 금융당국이 평가방식 개선도 지원해야 공시제도 개선의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을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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