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손에 둘 다 쥐었다”

막강한 자금력 바탕, 선물로 지수 끌어 현물시장까지 밀고 당기고

지난 10월9일, 선물ㆍ옵션시장 참가자들은 외국인의 깜짝 매수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하루를 보냈다. 이날 외국인은 갑작스럽게 코스피200 주가지수선물을 1만4,500계약(6,829억원)이나 사들였다. 코스피200 선물시장이 개설된 이후 가장 많은 액수다. 이런 싹쓸이에 놀란 시장참가자들은 하루 종일 그 배경을 찾아보려 분주했지만 뚜렷한 이유는 발견되지 않았다.그런데 다음날 외국인은 비차익거래를 통해(여러 종목을 한꺼번에 바스켓 매매하는 것. 지수를 사고파는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가 발생한다) 현물주식을 2,000억원어치 매입했다. 이에 따라 선물지수도 하루 동안 3포인트 급등하면서, 앞서 설정한 외국인 선물 매수포지션에서 막대한 이익이 발행했다. 단순계산으로 이익규모는 217억5,000만원(1만4,500계약×50만원×3포인트)이다.이틀 사이에 발생한 현물과 선물거래가 동일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어쨌든 외국인들의 증시영향력이 현물시장에서 선물ㆍ옵션시장까지 급속도로 넓어지고 있다. 외국인은 10월16일에도 8,548계약 매수했다. 이때도 역시 지수 상승흐름이 되풀이됐다. 세종증권 최지환 연구원에 따르면 외국인이 대량으로 선물을 사면서, 지수를 끌어당긴 것은 3월 말 이후 모두 다섯차례나 된다.현재 현ㆍ선물시장에서 매매의 순환구조는 ‘외국인 선물 매수 - 선물 고평가로 베이시스 확대 - 현물 프로그램 매수’로 이뤄지고 있다. 다시 말해 외국인이 선물을 대량 매수하면 선물가격이 현물가격에 비해 고평가되기 때문에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현물에 대한 프로그램 매수세가 들어오고, 이에 따라 지수가 끌어올려진다. 이를 시장에서는 ‘선물로 당긴다’고 말한다. 현물주식의 처분을 원활히 하기 위해 보통 이 같은 꼬리잡고 몸통흔들기가 사용되기도 하고, 현물로 갈아타는 전략으로도 쓰인다. 저가에 선물을 매집하나 현물은 전혀 사지 않고, 후에 선물을 처분하고 현물을 산다. 선물을 매도해서 생기는 손실은 미리 풋옵션을 매집해 두는 방법으로 메운다.현·선물 연계매매, 추적조차 불가능선물을 매수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지수 방향성이 상승한다고 보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외국인 선물매수세가 오직 상승세를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분석가는 거의 없다. 선물지수 상승은 시장베이시스를 확대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외국인이 시장베이시스의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다. 다들 외국인만 쳐다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선물순매수 - 매수차익거래 - 주가지수 상승패턴은 현물주식을 직접 매수해 일어나는 주가상승보다는 단기 투기의 성격이 더 강하다.엄격한 제로섬 게임인 선물시장은 세력간의 싸움으로 승부가 난다. 세력에서 일단 우위를 점하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선물판에서는 두둑한 밑천, 돈의 힘으로 몰아붙이면 시세 방향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과거에도 이런 사례가 있었다. 1998년 12월께 골드만삭스 중심의 외국인투자가는 12월물을 집중 공략, 하루 동안에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인 8,621계약을 집중적으로 매수했다. 결과는 시세를 2.8포인트 올린 것이었다. 개인은 매도로 맞섰지만 외국인은 만기일인 12월10일까지 계속해서 무차별 매수에 나섰다. 선물시세는 49.25에서 68.5까지 폭등했다. 결국 이날 하루 외국인이 개인에게 딴 돈만 800억원에 이르렀다((68.5-49.25)포인트×8,621계약×50만원).올해 5월부터 지속적으로 현물주식시장에서 엄청난 매수세를 보였던 외국인은 최근 그 매기를 선물, 옵션, 파생상품시장에까지 넓히고 있다. 비중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지난 9월 외국인의 주가지수선물시장 거래량 기준 매매비중은 19%까지 치솟았다. 2000년 1월에는 5%대였지만, 2002년 1월 9%, 올해 1월에는 12%로 계속 늘어났다. 옵션시장도 비슷하다. 약정대금 기준으로 외국인 비중은 2000년 1월 7%이던 것이 올해 1월에는 14%, 지난 9월에는 15%를 차지하고 있다.이처럼 자금력이 풍부한 외국인들이 현ㆍ선물을 한꺼번에 쥐면 각종 시장교란행위가 벌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하지만 현ㆍ선물 연계매매의 경우 포지션이나 매매전략이 워낙 다양하고 계좌수가 많아 그 연관성을 밝혀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공정행위 여부를 가리는 일도 그만큼 어렵다.또한 안타깝게도 삼성전자 등 몇 종목의 우량주의 움직임만으로 지수 전체가 좌우되는 취약한 국내 주식시장은 그 폭과 깊이가 선물시장에서 발생하는 영향력을 흡수할 만큼 넉넉지 못하다. 양적, 질적으로 발전한 시장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한 옵션딜러는 “연계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금력이 필요한데, 이를 수행할 정도의 능력을 가진 주체는 몇몇 외국인 이외에는 없다”면서 “선물ㆍ옵션시장에서 매매주체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어도, 이것이 현물과 연계된 거래인지 정확히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반면 LG증권 황재훈 연구원은 외국인의 현ㆍ선물 연계에 뚜렷한 전략은 관찰되지 않는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다른 우려점도 있다. 선물시장에서의 외국인 영향력 확대가 시장 일시 폭락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선진국 주식시장은 상승은 완만하나 하락은 급격하다는 특징을 나타낸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오를 때는 급하고, 내릴 때는 서서히 조정을 받는 모습을 보여왔다.그러나 최근에는 정반대로 선진주식시장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신아투자자문 최정현 사장은 “모든 문제는 단기간에 너무 많이 샀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들이 일시에 많은 주식을 사들이면서 삼성전자 등 우량주를 싹쓸이하면서 유통물량이 잠겨버렸다는 것이다. 유통주식수가 너무 적으면 선물과 옵션으로 몸통을 흔들 때 그 파급효과가 더욱 증폭된다.(현물)주식시장으로의 외국인 자금 유입이 갖는 긍정적인 효과 중 하나는 투기적인 국내 증시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개인 위주의 투기적 시장이었던 국내에서 단기투자라고 하면 1개월도 안되는 기간을 뜻했다. 국내 기관 역시 마찬가지여서, 많은 펀드의 만기가 6개월도 못되기 때문에 중장기 투자가의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외국인은 1~2년은 갖고 가는 것을 단기투자라고 한다.그런데 최근 선물시장으로도 뻗치고 있는 외국인들의 매기는 정반대의 우려를 낳는다. 시장의 변동성을 확대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최근의 선물시장 특징은 ‘개인과 외국인이 대치국면’으로 요약된다. 미결제약정이 급증하면서 외국인의 매수포지션과 개인의 매도포지션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태다. 미결제약정이 약 10만개라고 하면 5조원이 서로 맞물려 있다. 만약 하루에 선물지수가 1포인트만 움직이면, 제로섬 게임인 선물시장에서 대치하고 있는 양쪽 중 누군가는 매일 500억원씩 잃거나 벌어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연일 주가가 치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 관계자들이 즐거움을 만끽하기는커녕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기분을 떨치지 못하는 까닭이 이런 데 있다.돋보기 | 외국인 매입 배후 설설설“외국인, 퇴직연금 증시유입 노리고 매수?”외국인의 국내 주식 매입 배경에 대한 정설은, 아시아 펀드에 투자금이 유입되다 보니 한국, 대만 등 이머징마켓에 매수세가 들어와 우량주부터 매입하는 ‘국제적인 유동성 장세’라는 것이다. 하지만 원체 말도 많고 소문 무성한 곳이 증권시장. 워낙 상상을 초월하는 외국인들의 순매수세가 지속되다 보니 그 배경에 대한 각종 논리적인 해설 뒤에는 ‘미확인 설’이 흘러넘치고 있다. 떠도는 말 중에서 들어보면 비교적 그럴듯한 것들이 크게 세가지 정도다. 첫째, 외국인들이 곧 기업연금이나 국민연금 자금이 증시로 유입될 것으로 보고, 저가에 주식을 매입한 채 보유 중이란 설이다. 이 돈만 들어오면 갖고 있는 주식을 처분해 이익을 실현할 계획이란 것.둘째, ‘신용등급 상향설’이다. 일종의 음모론에 가깝다. 외국인투자가들과 거대 신용평가사들 사이에는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흘러다녔다. 신용등급 상승설은 이런 커넥션론에 기초하고 있는 소문. 외국인들이 주식을 집중 매집해서 살 만큼 사고 나면, 차후에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을 두단계 올리기로 미리 시나리오가 짜여 있다는 것이다. 신용등급이 올라가면 다른 매입주체들이 외국인들을 따라 추격매수를 시작하고 이에 따라 지수가 상승하게 되면, 외국인들은 그동안 저가에 사모은 주식을 비싸게 되팔고 국내 시장에서 빠져나가기로 되어 있다는 얘기다.셋째, 북한 변수와 관련된 시나리오다. 워싱턴이 불가침 조약과 같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할 선물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다는 설이다. 이런 증시 호재를 미리 준비해 놓고, 외국인들은 주식을 매입했고 이 선물이 개봉되면 추가 자금이 유입되면서 외인은 털고 나갈 수 있다는 설이다.이렇게 시장에 퍼져 있는 루머들은 대부분 과장과 비약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국내 증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요 변수들을 빠짐없이 등장시키고 있어 재미로든, 심각하게든 흘려들을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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